별을 품은 소드마스터 > 뉴토끼 - 웹툰 미리보기 [101-15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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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1화 19

저 눈이 녹을 때면 (2)

예전에.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예전에 블라드는 호르헤의 조직원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있었다.

“아. 딱 100골드만 있으면 좋겠구만.”

사내들이 모이면 으레 하는 상투적인 대화들.

술, 여자, 별 특별할 것도 옛날이야기.

그리고 그런 대화들이 한 바퀴 돌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

“100골드 있으시면 뭐 하게?”

“있으면 이 짓 말고 당장 어디 땅 하나 사서 정착하지.”

“평생을 여기서 살았는데 퍽이나 농사짓고 살겠네.”

돈에 관한 이야기.

정확히는 일어날 리 없기에 상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들.

“보스 봐. 역시 농사보다는 장사지. 어디 그럴싸한 건물 하나 잡아서······.”

“그러다 폭삭 망하는 거야. 장사는 쉬운 줄 아나.”

미래가 빤히 보이는 인생이란 서글프다.

그러니 가끔은 이런 시답잖은 이야기도 필요한 법이었다.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어떠한 자격도 필요치 않으니까.

“······.”

땅을 산다, 건물을 산다, 아니다 사업을 해야 한다.

아무런 의미는 없지만, 열정만큼은 뜨거운 대화 속에서 버레이는 저 멀리 혼자 떨어져 있던 소년을 바라보았다.

“어이 신입. 너는 100골드 있으면 뭐 할래?”

선배들의 하릴없는 이야기를 들으며 가만히 밀대질을 하고 있던 조직의 막내.

“누가 준대요?”

“말은 해 볼 수 있는 거 아냐. 말은.”

금발 머리의 소년은 버레이의 질문에 잠시 밀대를 멈추고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갑자기 돈이 생긴다면 무엇부터 할 것인가.

“······100골드면 먼저 빚부터 갚아야겠는데.”

“뭐? 100골드나 빚졌냐?”

“저놈 싹수가 노랗네. 어디서 도박이라도 한 거 아냐?”

일어날 리는 없겠지만 상상은 해 볼 수 있었고 블라드는 그 상상 속에서도 먼저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박 빚은 아닌데 그래도 갚아야 할 게 몇 개 있어요.”

언제나 블라드의 머리 한편에는 무언가를 갚아야 할 사람들의 목록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그 목록에는 원한에 관련된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정말로 빚졌기에 갚아야 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그 중 가장 위에는 언제나 같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328골드라.”

그리고 지금, 쇼아라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의 손에는 100골드가 훌쩍 넘는 돈이 들려 있었다.

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자신의 대답을 들어줄 버레이는 이제 없지만 블라드는 항상 생각해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이제는 갚아야 할 때다.

※※※※

“우리는 뭔가 안 맞나봐.”

“그러게요.”

떠들썩한 손님들 속에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건네는 두 사람.

또다시 근신을 당하고만 그레고리와 아예 추방이라는 징계를 받은 블라드는 임무에서도 제외된 채 하릴없이 서로를 마주 보는 중이었다.

“언제 떠나냐?”

“한 5일 남았나? 그냥 준비되면 빨리 나가게요.”

요제프는 블라드에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줬다.

넉넉한 것 같아 보이지만 평생 살아온 도시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미묘하게 촉박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계획했던 일은 다 끝나긴 한 거거든.”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번 일의 원인 제공자나 다름없는 그레고리는 자신이 제안한 일 때문에 도시를 떠나야 하는 블라드를 위해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싶어 했다.

“조만간 쇼아라로 칸노르 가문의 사람들이 올 거다.”

어쨌거나 검은 곰과 그의 조직은 뒷골목에서 자취를 감췄고 쇼아라에는 칸노르 가문이 파고들만 한 영역이 생겨났다.

“이건 실패할 수 없는 사업이야. 이미 요제프 님과도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난 일이거든.”

“······.”

보르단의 말대로 기사는 봉급으로 돈을 모으는 자들이 아니다.

유력자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장점은 얼마든지 기사들을 반짝이는 금화 앞으로 가져다 놓고는 했다.

“명목상 조금이라도 투자해둬라. 그러면 섭섭지 않게 챙겨놔 주마.”

칸노르 가문의 쇼아라 진출.

다른 상인들이라면 이번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쳐대겠지만 그레고리는 블라드에게만은 문 한켠을 열어주겠다 말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기사는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요?”

“특별 수당으로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다만 여유가 되는 대로만 넣어둬.”

그레고리의 시선이 맥주잔을 넘어 블라드를 향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뒷골목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블라드와 함께 천천히 뒷골목에 뿌리를 내릴 계획이었다.

“흠.”

말로만 들으면 사기꾼들의 전형적인 수법같이 들렸지만 블라드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증명할 수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였다.

“50골드면 되려나요.”

“그 정도면 적당하지.”

턱도 없는 금액이었지만 그 정도면 이름 하나 올릴 정도의 명목은 될 것이다.

그리고 칸노르 가문은 이미 블라드를 후원하는 가문 중 하나였으니 분명 섭섭지 않게 챙겨놔 줄 것이다.

“몸 조심히 다녀오고.”

“저 없는 동안 여기 잘 부탁드려요.”

“그래.”

그레고리는 미안하다 말했고 블라드는 뒷일을 부탁한다 대답했다.

이로써 서로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으니 남은 것은 술잔을 들이켜는 일뿐.

“······.”

그레고리가 맥주잔을 들어 올리는 동안 블라드는 무심히 앞에 놓여 있는 안주를 바라보았다.

빨갛게 익어있는 소시지.

“맛없긴 했어요.”

세상을 보기 전 블라드에게 있어 이 소시지만큼 맛있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검은 곰이 만들어 낸 조악한 소시지 따위로는 만족하지 않기로 했다.

※※※※

“이게 뭐야. 여관비는 필요 없다니까.”

“이제는 여기 있지 못하잖아요. 그리고 돈 안 내고 도망간 라문드 영감님 몫도 있어요.”

블라드는 멋쩍은 농담과 함께 마르셀라에게 50골드를 건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받아줄 것 같지 않아서.

“······우리 여관이 이렇게 비싼 값을 받지는 않거든?”

“이건 투자라는 거예요. 나중에 수익금으로 돌려줘요.”

블라드는 그레고리가 한 말을 그대로 마르셀라에게 써 먹어 보았다.

“나는 장미의 미소가 이번 고비만 넘기면 충분히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마르셀라는 장미의 미소라는 창관을 여관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 돈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동안 모은 돈이 아무리 많았다고 한들 외팔이 잭의 방해 때문에 날아 가버린 돈이 대다수였고 비록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마르셀라는 지금 자금난에 허덕이는 중이었다.

“······고마워. 이번 투자는 후회하지 않을 거야.”

“대신 앞으로 소시지는 무조건 칸노르 가문 걸 써야 해요. 가능하면 홍보도 해야 하고.”

“후후. 그런 조건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지.”

단순히 어린 마음에 자신을 동정해 주는 것이었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나름의 사업을 제안하고 있었고 명분상 투자라는 명목으로 그녀에게 금화를 쥐여주고 있었다.

어른과 아이가 아닌 서로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었으니 마르셀라의 입장에서는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제가 없는 동안 제미나 잘 부탁해요.”

“그건 장담 못 하겠는데.”

미묘한 표정을 짓는 마르셀라를 보며 블라드는 그저 씁쓸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자신이 쇼아라에서 추방당한다는 말을 들은 제미나는 지금도 방구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상실감은 오직 블라드라는 존재만이 채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 가?”“좀 바쁘네요.”

다음 일을 위해 계단을 내려가던 블라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쥐여준 금화 주머니를 들고 있는 마르셀라가 있었다.

“고마웠어요.”“응? 뭐가?”

호르헤가 주워왔지만, 그녀가 씻겨주었다.

마르셀라가 머리를 감겨주기 전까지 블라드의 머리는 그저 먼지 가득한 잿빛이었을 뿐이었다.

이제 그녀의 여관에는 질 좋은 칸노르 가문의 고기가 들어올 것이고 당분간은 적자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여유자금도 생겼다.

그래서 블라드는 자신의 머릿속에 적혀 있는 이름 중 마르셀라의 이름을 지워내기로 했다.

“다녀올게요.”

이제 요제프에게 받은 시간은 며칠 남지 않았다.

서둘러 여관을 빠져나온 블라드는 수도원에 있는 무덤가로 가 늙은 대장장이의 비석을 닦아주었다.

추운 날씨에 손이 얼어붙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하기로 했다.

“고마웠어요.”

오랫동안 보지 못할 늙은 대장장이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으니까.

그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와 함께 블라드는 머릿속 목록에서 늙은 대장장이의 이름을 지웠다.

“목숨값 갚은 것뿐이야.”

“그래도 꼭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시청으로 찾아간 블라드는 자신을 대신해 장미의 미소를 지켜준 기사에게 고개를 숙였다.

비록 빚진 것을 갚았다 말하고 있었었지만 기사 막심은 자원해서 주교의 병사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자신을 위해 원한을 산 막심에게 고개 숙인 블라드는 자신의 인사를 받아준 그를 보며 목록에서 또다시 이름 하나를 지워냈다.

자신을 대신해 명령문을 읊어주었던 보르단을 위해 그가 좋아하는 과자를 가져다주었다.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던 오타르에게 멋진 도끼 하나를 사주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쥐여주고 고맙다 고개를 숙일 때마다 블라드의 머릿속에 있는 이름들이 하나하나씩 지워져 나갔다.

“······.”

요제프나 자야르, 안드레아 사제와 같이 감히 갚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블라드는 아직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해 줄 위치에 서 있지 못했기에 훗날을 기약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제 목록에 적혀 있는 이름 중 가장 오래된 이름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여기는 왜 오자고 한 거야?”

“빚 좀 갚으려고.”

“뭔 빚?”

절뚝이는 걸음으로 블라드를 따라나선 하벤은 곧 얼어붙은 강 옆으로 기대어 서 있는 커다란 건물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여긴 조선소잖아.”

“그래. 여기 조선소야.”

북부의 혹독한 날씨는 젖줄과도 같은 강을 일 년의 절반 정도는 얼어붙게 만들고는 했지만 그나마 북부에서도 최남단에 있는 도시인 쇼아라는 그 여파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조선소가 그에 대한 증거였다.

“그런데 여긴 왜 왔어?”

“빚 갚는다니까.”

조선소라는 곳은 배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지만 배를 판매하는 곳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까다로운 절차가 필요하겠지만 기사인 블라드에게는 크게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흐으······. 저거 봐라. 나오급 배다. 강 때문에 갇혔나? 선장이 애 좀 타겠는데.”

“저건 너무 비싸더라고.”

“응?”

블라드의 안내와 함께 조선소로 들어선 하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기는 예전부터 꼭 한번 와보고 싶긴 했지.”

“······.”

하벤은 어렸을 때부터 배를 좋아했었다.

언젠가는 배를 살 것이고 그 배로 강을 건너 뒷골목을 벗어날 거라고 쉴 새 없이 이야기했었다.

마치 다짐하듯이, 잊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그리고 어린 블라드는 그런 하벤을 보며 별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었다.

“지금도 배 타고 싶어?”“그렇지.”

“쇼아라 멀리로 나가보고 싶은거야?”

“당연하지. 뭐야. 왜 그러는데.”

죽기 전에 반드시 먼 바다로 나가보겠다고 말하던 하벤.

그러나 하벤은 블라드와 제미나를 위해 어두운 뒷골목에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저건 200골드더라고.”

자신을 위해 주저앉은 하벤을 위해 허접한 지팡이를 깎아내던 날이 있었다.

뒷골목 어딘가에서 쪼그리며 앉아 나무를 깎아내던 그 날, 블라드는 결심했다.

반드시 하벤에게 빚을 갚겠노라고.

그래서 자신의 머릿속 가장 높은 곳에 그의 이름을 깊숙이 새겨넣었었다.

“코그(Cog)?”

블라드가 가리킨 곳.

조선소 구석에 박혀 있는 작은 배 하나.

그래도 자신이 범선이라는 것을 알려주듯 가로돛 하나가 올려져 있는 배는 강을 이용하는 상인들이 제일 많이 사용한다는 코그선이었다.

“저건 좀 싸더라고. 그래서 샀어.”

“응?”

지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하벤은 멍청한 소리를 내며 되물었지만 블라드는 그저 손짓으로 조선소의 직원을 불러왔을 뿐이었다.

“이제 네 거야.”

“······.”

블라드는 조선소 직원이 들고 온 종이를 내밀며 말했다.

“서명해. 네 이름으로.”

조선소의 직원이 들고 있는 하얀 종이.

그것은 선박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선박증서(船舶證書)였다.

“아니 이게, 이게 지금······.”

하벤은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당황하며 입을 더듬거렸지만, 곧 자신의 머리 위에 덮이는 무언가의 감촉을 느끼고는 그만 더듬거리는 것도 멈춰버리고 말았다.

“오늘부터 너는 캡틴 하벤이야.”

조선소 직원이 들고 온 것은 서명을 기다리는 증서만이 아니었다.

빳빳한 느낌이 드는 삼각형 모양의 모자.

그것은 오직 배를 가진 자들만이 쓸 수 있다는 선장모였다.

절름발이 하벤.

그러나 오늘부터는 그는 뒷골목 추레한 이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이름을 선물 받았다.

“······캡틴 하벤.”

웃고 있는 블라드를 보는 그의 흔들리는 동공 속에서부터 짙은 물기가 번져오고 있었다.

100골드가 있으면 무엇을 할 것이냐.

이제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지금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캡틴 하벤, 캡틴······.”

하얗게 비어있는 서명란에 하벤의 이름이 새겨질 때마다 블라드의 머릿속 목록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주저앉은 하벤을 위해 울면서 나무를 깎아내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하벤이었고 그의 손에는 허접한 나무 지팡이가 돛이 달린 배 한 척이 쥐어져 있었다.

발목이 그어진 하벤은 여전히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겠지만 땅이 아닌 바다에서라면 누구보다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발이 아닌 돛으로 움직이는 세상이었으니까.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2화 19

저 눈이 녹을 때면 (3)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

교황청에서 직접 북부로 파견한 주교이자 평생을 악(惡)과 이단, 그리고 삿된 자들과 싸워온 자.

그러나 이번 일은 그의 신념과는 전혀 동떨어진 속된 일이었을 뿐이었다.

명분을 얻기 위해 뒷골목 잡배에게 면죄부까지 내주었지만 결국 처참한 실패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주교님. 전보가 왔습니다.”

“이리 다오.”

자부심과도 같았던 성 마르엘로의 거울은 깨지고 지금은 산 로지노와 쇼아라의 시장에게 거센 압박을 받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번 일로 주교직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북부인들은 예전부터 교황청에서 온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되었군.”

그래도 되었다.

결국은 이 전보가 자신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큰 뜻을 위해서라면 가끔은 돌아갈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용의 피를 이은 기사라면 라마슈트의 숨통을 끊을 수 있겠지.”

언제나 옳은 길만을 걷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다 믿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똑바른 길로만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을 피에르는 이미 예전에 깨닫고 있었다.

신의 뜻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빛나지만은 않는다.

“무리한 보람이 있었어.”

사제가 들고 온 전보.

자그마한 종이쪽지 가장 밑에는 드라굴리아 가문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우매한 북부인들에게 다시 한번 교황청의 찬란한 빛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

“어때? 생각해 봤어?”

시청에 들른 블라드는 마구간에서 일하고 있는 고트를 찾아갔다.

“예전에 그랬잖아. 큰 건 하나 같이 하자고.”

“······쇼아라에서 추방당하는 게 큰 건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자신의 제안에 말을 흘리는 고트였지만 딱히 섭섭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은 추방당하는 처지였고 고트의 입장에서는 안정된 직장을 때려치고 나와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누가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이었다.

“나는 말은 한 거야. 물론 결정은 네 몫이겠지만.”

“······.”

고트는 분명 유용한 사람이었다.

평생을 쇼아라에서 갇혀 지내다시피 한 블라드와는 달리 고트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기에 견문이 넓었고 다양한 직업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다재다능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용하다는 말이 꼭 필요하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블라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내일 아침 일찍 떠날 예정이야. 생각 있으면 성문에서 보자고.”

“······.”

자신을 기회 삼아 좀 더 높은 곳으로 오르려 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얄팍한 수작에서 시작했더라도 위기의 순간에는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었던 사람이었으니 진심을 다해 손을 내밀어 본 것이었다.

설사 고트가 제안을 거절한다 한들 그에게 마지막 예의는 다한 셈이 될 테니까.

“벌써 가게?”

“여기서 볼일은 다 봤거든.”

고트가 오지 않아도, 그래서 혼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이제는 어디 있더라도 홀로 설 자격을 갖추었으니까.

망설임 없이 돌아서는 블라드의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결국, 요제프를 만날 수는 없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죄인이나 다름없는 추방자의 입장에서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다.

칼과 같은 공과 사의 구별.

마지막까지 명분 하나 내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인사까지 거절한 요제프였지만 그래도 섭섭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칸노르 가문과 이야기를 해뒀어. 하벤은 강이 녹으면 그 배로 스투르마에 있는 고기들을 받아와.”

“벌써 거래처까지 뚫어놨어?”

“다음 일은 가능하면 준비해 둬야지.”

항상 다음 수를 생각해라.

언제나 최악을 준비해라.

이제 홀로 서야 하는 블라드는 요제프와 자야르에게 배웠던 조언들을 가슴 깊이 새겨두기로 했다.

“오타르. 하벤의 사업을 도와줘. 네가 옆에 있으면 힘이 될거야.”

“음.”

배를 가진 하벤에게 칸노르 가문과의 연을 틔워주었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오타르를 옆에 붙여놓았다.

둘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작은 사업이었고 또 옆에서 도와줄 사람들도 있을 테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이건 왜? 밖에서 지내려면 돈이 필요할 텐데?”

“이정도는 없어도 충분할 거야. 언제는 돈 있어서 살았나.”

블라드는 이제 18골드만 남은 주머니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금화 열 개를 빼내어 하벤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밖에 애들 좀 챙겨봐. 원래 보스들이 이맘때쯤 하던 거 있잖아.”

“아아······.”

예전 다섯 명의 보스들이 있었을 때 지금같이 먹고살기가 막막한 계절이 오면 각 보스들은 뒷골목에 먹을 식량들을 풀고는 했다.

민심을 끌어당기고 기반을 단단히 하기 위한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실제로 그들이 주는 한 끼에 목숨을 부지하는 존재들도 있는 법이었다.

“이젠 뭐 보스가 둘밖에 없으니 밖에 있는 애들 다 굶어 죽겠어.”

“그래. 네 말이 맞다.”

약하면 짓밟히고 투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믿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뒷골목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들만큼은 챙겨주는 것이 도리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눈빛이 자꾸 밟히고는 했었다.

“······애새끼들이 자꾸 쳐다보잖아.”

“알았다니까.”

할 수 있기에 하기로 했고 해야 할 만한 위치에도 있었다.

뒷골목에서 나고 자란 기사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위해 흔쾌히 10골드 정도는 내놓기로 했다.

그 정도면 적어도 이번 겨울에 굶어 죽는 아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제 된 것 같은데······.”

뒷골목 애송이들도 다 챙겨놓았으니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거의 다 마무리 지은 셈이었다.

“그런데 얘는 끝까지 안 나오네.”

블라드의 눈길이 4층에 있는 어느 방을 향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대화를 가려준다며 자신을 바로 옆으로 끌고 왔던 제미나의 방이었다.

※※※※

“내가 나중에 처녀 값 받으면 저거 사줄게.”

도로 위 진창에 서서 늙은 대장장이의 검을 바라보던 때가 있었다.

“5골드면 된다고 그랬지?”

그렇게 멍하니 반짝이던 검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항상 옆에 서 주었던 붉은 머리 소녀가 있었다.

빌어먹는 거지가 아니라면 몸을 파는 창녀가 될 수밖에 없는 잔인한 선택지 속에서 제미나는 웃으며 장식 없는 검을 사준다고 했었다.

“네 처녀 값이 5골드나 되겠어?”

“사준다고 해도 지랄이야.”

농담과 핀잔 속에서 소년도 웃고 소녀도 웃었지만, 사실은 아무도 웃고 있지 않았다.

뒷골목 인생들에게는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조차 사치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미나는 자신에게 기어이 검 하나를 들려주었다.

검 값으로 내밀었던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은 아무것도 없던 제미나에게 있어 마지막 무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날 소녀의 눈물로 산 검은 자신을 기사로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여태껏 장식 없는 검과 함께 한 모든 업적들은 제미나에게서 시작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디 가냐고!”

“생각보다 늦었는데.”

“······대답 안 할 거야?”

방 안에 틀어박힌 제미나를 어깨에 둘러메다시피 업고는 밖으로 나온 블라드는 서둘러 골목을 내달리는 중이었다.

“좀 뛰자.”

“······마음대로 해.”

제미나는 퉁퉁 부은 자신의 눈이 부끄러웠는지 블라드의 등 뒤에 얼굴을 묻고 말았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 사이로 블라드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길래 잘 좀 하지.”

“뭐?”

예전에는 도망친 것이지만 지금은 쫓겨난 것이다.

이제야 겨우 붙어있나 싶었더니 괜히 등신 같은 짓을 해서 이 사단을 만들었다.

제미나는 또다시 다가오는 이별 앞에서 슬픔도 분노도 아닌 그저 서러운 감정만을 느낄 뿐이었다.

“여기다. 여긴가?”

“······여기가 어딘데.”

갑작스레 끌려 나오느라 신발도 신고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블라드에게 한참 업혀서 달려온 곳은 평소에 보던 뒷골목이 아닌 쇼아라의 중심에 있는 중앙 광장이었다.

“문 닫았나?”

뒷골목이라면 한참 불을 밝힐 시간이었지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이제 장사를 접고 집에 들어갈 시간.

그래도 블라드에게는 오늘밖에는 시간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쫓겨날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주문해놓을 걸 그랬다.

쾅-! 쾅-!

문 좀 열어봐요!

“야!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주인장! 문 좀 열어보라니까!”

“경비병들이 쳐다보잖아!”

순찰을 돌고 있는 경비병들이 세차게 문을 두들기는 블라드를 향해 다가왔다.

언제나 경비병들 앞에서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뒷골목의 소녀는 당황하며 블라드의 목덜미를 잡고는 흔들대었지만, 사실 이제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일 뿐이었다.

“뭐 어쩌라고. 나 기사야.”

“······아.”

언제나 두려워하던 경비병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

이제 블라드는 등에 업고 있는 제미나 하나쯤은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누군데 지금 시간에!”

“내가 예약 해 놓은 거 있죠? 완성됐습니까?”

“······들어오시죠 블라드 님.”

누구도 블라드와 함께 있는 제미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단순한 두려움이 아닌 블라드가 들고 있는 권위와 명예가 그렇게 만들고 있었다.

영업시간은 지났으나 다시금 문을 연 가게.

돌변한 주인의 태도만큼이나 다시 환하게 불을 밝힌 가게 안에서 제미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와.”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옷을 보며

맨발이었음에도 저절로 차디찬 바닥을 딛게 하는 멋진 옷감들.

“그런데 여긴 왜 왔어!”

이곳은 쇼아라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양장점이었다.

“완성은 됐는데 늦게 오셔서 내일 가져다드리려고 했죠.”

“늦어서 미안합니다. 지금 입혀보죠.”

블라드는 제미나의 물음에 대답 대신 손짓으로 대답했을 뿐이었다.

“나?”

“여기서 너 아니면 이 조그만 드레스를 입을 사람이 어디 있어.”

제미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블라드의 손이 가리키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입어봐.”

양장점 주인의 손 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드레스 하나.

고급스럽게 염색된 새빨간 색깔이 제미나의 머리와 잘 어울려 보였다.

※※※※

보석점의 문을 열어 목걸이와 귀걸이를 받아왔다.

무두장이 집에 들러 새빨간 구두를 받아왔다.

주문했던 화장품을 가져오고 장신구 점에서 화려한 부채도 가져왔다.

“그때 보니까 잘 어울리더라고.”

“······.”

블라드는 예약해 놓았던 물건들을 하나씩 받아들고는 제미나에게 입히고 있었다.

저무는 황혼과 함께 쇼아라의 광장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지만 제미나의 차림새만큼은 더욱 빛나가고 있었다.

“키는 더 안 클 것 같아서 딱 맞는 크기로 했어.”

“미친놈.”

“이제 마르셀라한테 빌리지 말고 네꺼 입고 다녀.”

블라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누아르를 들여오기 위해 제미나가 새빨간 드레스를 입고 왔었던 그때를.

그때만큼은 처녀를 팔겠다고 말하는 뒷골목 소녀가 아닌 누가 보아도 인정할만한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이거 다 얼만데.”

남의 것을 빌려왔기에 어색했던 모습은 이제 없다.

오직 소녀만을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와 장신구들은 그날 보았던 모습보다 더욱 제미나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아마 5골드 정도.”

“이게 5골드일 리가 있어?”

제미나는 치맛자락을 잡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사본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새빨간 벨벳으로 만든 드레스만 해도 5골드는 가뿐히 넘을 물건이었다.

“좋아. 이쁘네.”

블라드는 양손을 허리를 올려놓고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방안에 틀어박혀 울고 있던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모습이었다.

“머리까지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동안 내가 너무 바빴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여태껏 마음먹었던 일들을 정리하기에도 바쁜 시간이었다.

그래도 쇼아라의 마지막 밤만큼은 온전히 제미나를 위해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받아.”

“뭔데.”

이제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블라드는 제미나에게 천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내가 만든 손수건이잖아.”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매단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투박한 손수건.

누군가의 이름만큼은 확실히 새겨져 있는 그것은 제미나가 블라드에게 직접 만들어 주었던 손수건이었다.

“나는 몰랐었는데 귀족들은 이렇게 한다고 하더라고.”

자신이 만든 손수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미나를 보며 블라드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 해?”

옥사나에게 혹독히 배운 귀족의 예법.

제미나는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그 모습 하나하나에는 감히 뭐라 할 수 없는 기품이 깃들어 있었다.

“부디 저에게 당신의 손수건을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비록 고귀한 피는 타고나지 않았을지라도 소녀는 블라드에게 있어 지켜야 하고 갚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기사가 지켜야 하는 여자라면 당연히 레이디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제미나는 자격 있는 여자였다.

“그거 이제 나한테 주면 돼.”

“응? 응.응.”

제미나는 얌전히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내밀었다.

손수건을 달라 말하는 블라드의 모습에서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진중함이 느껴졌으니까.

“······.”

기사가 레이디가 주는 손수건을 건네 받을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검 끝으로 받는 방법.

또 하나는 손에서 손으로 받는 방법.

“뭘 그렇게 봐.”

블라드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제미나의 꺼끌한 손등을 바라보았다.

알리시아의 매끈한 손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정감 갈 수밖에 없는 손이었다.

“내가 사준 거 꼭 손에 바르고 다녀라.”

“어차피 설거지하면 다 지워질걸.”

제미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블라드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이제는 웃음으로 서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됐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레이디에게 한 명의 기사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수건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으며 제미나는 몰랐겠지만 블라드는 그 행위를 통해 기꺼이 의무 하나를 어깨에 짊어지기로 맹세했다.

너를 지켜주겠다는 맹세였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3화 16

보리밭의 파수꾼 (1)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평소보다 일찍 집무실에 들어선 요제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커튼을 걷어냈다.

커튼을 걷자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정경.

하얀 눈이 내려앉은 도시.

보는 것만으로도 시려오는 쇼아라의 모습에 요제프는 팔짱을 끼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서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가겠군.”

여행을 떠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쇼아라를 나서야 해가 지기 전 다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목적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떠나가는 블라드에게 임무를 주거나 임의로 목적지를 정해줄 수도 있었지만, 요제프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평생을 남의 명령만 받으며 살아온 소년에게 한 번쯤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움직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깃발을 든 기사(Knight banneret)라······. 실로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겠군.”

비록 추방이라는 형태로 쇼아라를 떠나는 것이기는 하지만 블라드는 오래된 북부의 전통을 재현하게 될 것이다.

오직 스스로의 명예만을 치켜든 채 여행을 떠나는 기사.

아버지의 세대도 아닌 할아버지의 세대에서나 찾아볼 수 있었던 오래된 전통 중 하나였다.

저 멀리서 오늘을 맞이하는 쇼아라의 성문이 열리고 있었다.

멀리 있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 저곳에서는 자신만의 깃발을 든 기사 한 명이 밖으로 나서고 있을 것이다.

쇼아라가 품었으며 바예지드가 키워낸 기사.

그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였다.

※※※※

“······안 오네.”

옷깃을 목 끝까지 세운 블라드는 누아르와 함께 성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상인들도 여행자들도 움직이지 않을 지금 시기에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 한 명뿐이었다.

히이이이힝-

“원래부터 밖에서 살던 놈이 뭐가 춥다고 난리야.”

이미 편하디편한 마구간에 길들여져 버린 누아르는 차가운 바깥으로 나서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투레질을 해대었지만 이제 녀석도 좋은 시기는 다 갔다.

지금은 초심을 찾아 의연한 자세로 눈보라를 맞아야 할 때.

그리고 그 태도는 누아르뿐만 아니라 블라드도 기억해내야 할 만한 자세일 것이다.

“가자.”

자그마한 재촉과 함께 앞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검은 말.

안장 뒤에 매달린 자그마한 깃발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휘날리기 시작했다.

“······.”

누아르의 위에서 한 걸음씩 밖으로 나서던 블라드는 어쩌면 지금이 떠나기에 알맞은 시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살아온 도시 쇼아라.

이곳에서 꿈꾸던 목표들이 있었다.

검을 잡겠다는 목표와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

그러나 이제 이 도시에서 꿈꾸던 것들은 모두 달성하였으니 위를 바라보고 앞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더 넓은 세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대장! 잠깐만!”

옛 기억을 떠올리던 블라드는 등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렸다.

“같이 가자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새벽의 거리를 내달려오는 남자.

그는 바예지드의 마구간지기인 고트였다.

“아이고. 이거 겨우 맞췄네.”

“늦었잖아.”

블라드는 자신의 옆에서 혀를 빼물고 있는 고트를 보며 티 나지 않게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늦은 것도 아니지. 아직 쇼아라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잖아?”

고트는 가쁜 숨을 내쉴지언정 대답하는 것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실로 전직 사기꾼다운 태도였다.

“용케 따라올 생각을 했네?”

“아무래도 억울해서 말이지.”

고트는 가슴을 피고는 당당한 목소리로 블라드에게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대장한테 투자한 게 있는데 여기서 그냥 날려버릴 수는 없는 거 아냐.”

투자에는 언제나 위기가 따른다.

적은 판돈을 가진 고트는 인생을 역전할 만한 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고트는 자신과 같은 밑바닥 인생들은 인생을 걸만한 위험한 기회조차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들어보니까 하벤인가 하는 친구한테는 배도 한 척 사줬다며? 나도 나중에 그 정도는 챙겨주나?”

“너 하는 거 봐서.”

평소와 같은 부루퉁한 대답일 뿐이었지만 고트는 그러려니 하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목적지를 묻는 고트의 질문에 블라드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저 앞에 있는 하얀 벌판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정한 것은 아닌데.”

지금의 블라드는 두 개의 계약에 의해 만들어졌다.

하나는 검과 함께 신의를 바치겠다는 요제프의 계약.

그리고 또 하나는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목소리와의 계약.

“일단은 동쪽으로 가볼 생각이야.”

이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던 세계가 있었다.

넓은 밀밭과 함께 조용히 불어오던 바람에 따라 흔들리던 단풍나무 한 그루.

그리고 목소리는 그 나무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었다.

“거기서 찾아야 할 게 있어.”

블라드는 대답과 함께 검집을 치켜들고는 손잡이 끝에 박혀있는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목소리의 잔재밖에 남지 않아 오직 희미한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지만 그래도 목소리의 마지막 흔적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 한 명뿐이었다.

“이제 가자.”

의무를 짊어진 기사는 신의를 바치겠노라 맹세한 대상을 뒤로 둔 채 또 다른 계약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갔다.

한 명의 사기꾼과 한 명의 기사가 쇼아라를 떠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배웅하는 것은 고귀한 남자가 들고 있는 와인잔과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별의 슬픔으로 적시는 베갯잇이었다.

※※※※

도브레치티.

중부에서도 북쪽에 속해 있는 이곳은 달마티아 가문이 지배하는 땅으로서 추운 기후를 이용한 보리농사와 임업(林業)을 주로 하는 영지였다.

“또또또! 또 이 사달이 났단 말이냐!”

그리고 보리농사와 임업을 주로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보리 종자만 심어놓으면 기다렸다는 듯 헤집는 놈들은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냔 말이다!”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산업이 없는 가난한 영지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곳 도브레치티는 그 사정에 알맞게 이름을 내세울 만한 도시 하나 없는 빈궁한 영지이기도 했다.

“병사들을 세워 밤새 경비를 시켜놓았는데도 어느새 아침만 되면······.”

“내 앞에서 변명 따위 지껄이지 마라!”

실패했다는 말을 길게 늘여 말하는 기사단장.

그 모습을 보던 달마티아 남작은 열이 올라오는지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올라오는 분노를 삭일 뿐이었다.

“······너희도 알 거 아니냐. 지금 시기에 파종조차 못 한다면 우리는 다가올 봄에 다 굶어 죽고 말 거라는 걸.”

“그렇습니다. 영주님.”

“그걸 아는 놈들이 그래!”

기름지지 못한 땅과 추운 기후.

기댈 곳이라고는 빽빽이 들어서 있는 나무들과 보리농사가 전부인 도브레치티로서는 지금의 변고를 그저 무시하고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병사들만으로는······.”

“병력이 모자라면 영지민들한테 쇠고랑이라도 들려! 당장 굶어 죽게 생겼는데 그게 대수냐!”

퉁퉁한 볼을 부들부들 떨던 달마티아 남작은 주변에 집히는 것들을 마구 내던지며 보고를 하러 온 기사단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어느 영주라도 사건 앞에서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기사를 본다면 그처럼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고 머리야······.”

하지만 어쩌겠는가.

달마티아 가문은 이런 기사밖에 모으지 못하는 가난한 가문이었으니.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아서 보리밭을 지켜라! 분명 숲에 있는 몬스터들이 하는 짓일 거 아니냐!”

“알겠습니다. 영주님.”

겨울은 인간들만 굶주리는 계절이 아니다.

나무에 열리는 열매도, 씹을만한 풀도 사라지는 겨울은 몬스터들 또한 먹을 것이 없어지는 계절이었다.

굳이 밭에 뿌린 종자들만 골라 먹는 이유까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이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거 용병이라도 고용해야 하나······.”

아무도 없는 집무실에서 달마티아 남작은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창가로 다가선 달마티아 남작의 눈에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영지를 빽빽이 둘러싸고 있는 도브레치티의 숲.

자신이 영주가 된 후 개간을 위해 많이 넓혀놓은 곳이긴 했으나 달마티아 가문이 세워지기 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숲은 한낮이었음에도 여전히 어둠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

“······후추, 소금, 육포, 이건 뭐야?”

“순례자의 증서.”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어두운 숲.

그 숲에서 쪼그려 앉아 열심히 나뭇가지를 비비대던 블라드는 고트가 꺼내든 종이를 보며 심드렁히 대답했다.

“아무 교회나 가서 등록만 하면 돼. 안드레아 사제님이 써주신 거야.”

“왜 쇼아라에서 안 하고?”

고트의 물음에 나뭇가지를 비비던 블라드의 손이 뚝 하니 멈췄다.

“아, 아아. 그랬지. 미안.”

쇼아라의 교회에서 이 증서를 제출했다면 굳이 여기까지 들고 올 필요가 없었겠지만, 문제는 블라드가 교회와 감히 말을 섞을 수 없을 정도로 척을 지고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래. 알았어. 그래. 이거는 내가 알겠어.”

블라드의 매서운 눈빛을 피해 다시금 짐가방을 뒤지던 고트는 여전히 자신이 찾던 물건이 보이지 않자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그런데 이런 귀하고 비싼 것들은 빠지지 않고 챙겨왔으면서 어떻게 부싯돌 하나를 안 가져올 수 있지?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되네.”

“······.”

분노가 담긴 고트의 말에 잠시 멈춰두고 있던 블라드의 두 손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밤에는 이래저래 바빴어.”

당연히 바빴겠지.

원래 잘나가는 놈들은 밤에 더 바쁜 법이니까.

“그러는 너도 허접한 부싯돌밖에 안 챙겨왔잖아.”

“나는 적어도 챙겨는 왔잖아!”

고트는 역정을 내며 블라드 주위에 있는 잔해들을 가리켰다.

산산이 부서진 채 굴러다니는 부싯돌의 잔해.

그것들 모두 다 고트가 가져온 것들이었다.

“힘도 좋지. 그걸 다 부숴 먹으셨네.”

블라드라는 사람이 불 하나 붙이지 못할 정도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험하게 살아왔기에 이런 일에는 더욱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재수도 더럽게 없지. 그게 다 불량이냐.”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트가 가져온 부싯돌들은 다 부숴 먹고 말았고 정작 자신은 야영에 필수라 할 수 있는 부싯돌 하나 챙겨오지 못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잘못이 명확했으니 이런 경우에는 조용히 앉아 불씨를 지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에이씨.”

“왜 멈춰? 불 안 피울 거야?”

갑자기 비비던 나뭇가지를 내던지는 블라드를 보며 고트가 도끼눈을 떴지만 이미 블라드는 나뭇가지 대신 검집을 집어 들었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왜 그러는데.”

아무리 인연이 깊다고 한들 블라드는 기사였다.

검을 잡고 있는 블라드의 기세는 아까 나뭇가지를 비비던 때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살살 떨리고 있는 고트의 목소리가 그 증거였다.

“내가 비빌게. 대장.”

“됐어.”

거칠게 눈 바닥에 침을 내뱉은 블라드는 조용히 검집을 들고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장 내가 미안······.”

“불씨 빌려올게.”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말에 고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겨울의 숲.

그 숲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의 낄낄거림이 들려왔다.

“어이구 도련님께서 귀가 밝으신 모양이네.”

“알아챘으면 냉큼 도망치셨어야지. 뭣 하러 뻗대고 있었는가?”

얼추 스무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

겨울의 여행길은 추위와 몬스터만 조심하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곱상하게 생긴 것이 아무 데나 팔아도 제값은 받겠어.”

“어디서 나오신 도련님이신가? 부모를 말하면 우리가 적당한 값에 넘겨줄 수도 있겠는데.”

달랑 두 명만이 움직이는 일행.

그중 하나는 이제야 갓 솜털을 벗은 것 같은 애송이었으니 산적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만한 사냥감도 없을 것이다.

“형씨들. 불 좀 빌립시다.”

“응?”

그러나 산적을 맞이하고 있는 금발의 청년은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환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 미친놈이 지금 뭐라······.”

황당한 표정과 함께 흉험한 기세로 무기를 치켜든 산적들이었으나 블라드의 망토 속에 비치는 물건을 보고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반짝이는 판금 갑옷.

일개 애송이가 입고 다니기에는 버거운 물건이 그곳에 있었다.

“불씨 좀 빌리고. 그리고.”

물론 잘 사는 집의 도련님이라면 입고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저 철없는 도련님이라고 하기에는 푸른 눈동자에서부터 퍼져 나오기 시작하는 존재감이 심상치 않았다.

“가진 거 다 내놔. 새끼들아.”

블라드의 얼굴에 사나운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예전의 블라드는 굶주려 있었고 항상 갈망하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선 금발의 청년은 소년이었을 때만큼이나 굶주려 있었다.

“모가지는 내가 따줄 테니까.”

쇼아라를 떠나며 결심한 것 하나.

그것은 초심을 찾기로 한 것이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4화 14

보리밭의 파수꾼 (2)

요제프는 언제나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은혜든, 원한이든 상관없이.

“살려······살려주십시오. 기사님.”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줘야 한다.

나를 해하고자 했던 사람을 고이 돌려보낼 줄 정도로 블라드는 무르게 살아오지 않았다.

“너희도 남들이 살려달라고 하면 살려줬었나?”

때마침 비치는 달빛이 살려달라 비는 산적을 비추고 있었다.

그의 목덜미에 매달려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들이 너무나 가련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살려줬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이 세상은 자격 없는 자들이 너무 많다.

자격이 없음에도 남들보다 많이 가져가고, 더 높게 일어서고.

그리고 자신들보다 약한 세계를 너무 쉽게 뭉개고 있다.

“지랄하지 마.”

그리고 자격 없는 자들이 가지는 공통점 하나.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 것.

“목에 단 손가락뼈들이나 치우고 말해. 이 쓰레기 새끼들아.”

고트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에서부터 시작되어 검 끝까지 흐르는 달빛을.

다른 이가 부른 달빛을 보며 감탄하던 소년은 이제 이곳에 없다.

지금 이곳에 있는 자는 스스로의 세계를 갖춘 사람이었다.

블라드가 불러낸 매끈한 달빛이 새빨간 핏물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자격 있는 자가 휘두르는 검격 아래서 거짓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감히 정당한 기사를 모욕한 값.

그것은 목숨으로 갚아도 모자란 것이었다.

※※※※

한적한 시골 영지인 도브레치티.

오가는 상인들조차 모두 낯익은 사람들일 뿐인 한적한 마을이었지만 지금 목책 앞에 서 있는 경비병들은 빳빳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요근래 영지를 흉흉하게 도는 소문들이 그들을 날카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뭐지?”

“음?”

그런 그들의 눈에 보이는 수상한 일행이 있었다.

저 멀리 눈 덮인 언덕에서부터 말을 타고 오는 두 명의 사내들.

“저건 뭐야?”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끌려오는 사내들까지.

추운 겨울이었음에도 장화조차 신지 못한 채 줄에 묶여 끌려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평범한 일행은 아니었다.

“정지! 앞에 있는 자는 정지하라!”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낯선 사내들을 향해 미늘창을 앞으로 겨눈 경비병들.

그러나 가장 앞서 있는 남자는 경비병들의 날 선 제지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올 뿐이었다.

“누구······.”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새까만 말 위에 타고 있는 금발의 청년.

화려한 머리 색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들 모두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청년은 누가 보아도 어딘가의 귀족 같아 보이게 하는 기품을 보이고 있었다.

“이 근방을 어지럽히는 산적들을 잡아 왔다.”

“산적, 산적 말씀이십니까?”

아직 제대로 된 신분증도 확인하지 못했지만, 경비병은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로 블라드를 대하고 말았다.

단순히 풍겨오는 기세가 귀족 같아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청년의 뒤에 밧줄로 묶여 따라온 사내들.

그들은 하나같이 바짝 얼어있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검집을 치켜들어 경비병에게 보여주었다.

블라드가 내민 검 손잡이 중앙에는 거대한 성벽 위에 휘날리는 깃발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북부의 명문 바예지드를 가리키는 문장이었다.

※※※※

“환영합니다! 도브레치티에 오신 것을!”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갔던 경비병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블라드를 공손히 마을 안으로 들였다.

블라드가 평범한 상인이나 여행자가 아닌 무장한 기사였으니 본인들의 결정만으로는 쉽게 진입을 허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주님께서 기사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십니다!”

“······영주님이?”

블라드는 영주가 갑작스레 자신을 보고자 한다는 말에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본래는 책임자를 만나 산적들을 넘기고 적당한 사례금 정도나 받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현상금이라도 걸려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좋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경비병은 블라드의 대답에 재빨리 누아르의 고삐를 잡으려고 했지만 성질 나쁜 말은 마치 늑대처럼 하얀 이빨을 들이밀며 으르렁댈 뿐이었다.

“······고삐는 잡지 말고.”

“네, 넵!”

쇼아라에서의 생활 덕분에 누아르는 더이상 사람들을 꺼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지랄 같은 성격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었다.

블라드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안면이 있는 고트 정도나 누아르의 고삐를 잡고 안장을 얹을 수 있을 것이다.

“영주관까지 안내하겠습니다.”

안내를 하겠노라 말하며 앞장선 경비병을 따라 말을 타고 걷는 블라드와 고트.

그리고 그들의 뒤를 터덜터덜 끌려오는 산적들까지.

굉장히 특색 있는 조합을 지닌 일행이었으나 정작 이들을 보는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좀 달랐다.

“대장. 여기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한데?”

“······그러게.”

이곳이 쇼아라였다면 오랜만에 보는 색다른 구경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브레치티의 마을 주민들은 마치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보듯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그고 아이들을 뒤로 숨길 뿐이었다.

전직 소매치기와 사기꾼.

분위기를 살피는 것에 능숙한 두 명은 도브레치티의 분위기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음?”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짐작해보려 했던 블라드였으나 그것 또한 녹록지 않았다.

도브레치티는 블라드가 생각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곳이었으니까.

“이 앞이 달마티아 영주님께서 기거하시는 영주관입니다.”

“······,”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경비병이 가리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3층으로 세워진 목재 건물.

나쁘지는 않아 보였으나 영주가 있다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건물이었다.

‘너무 작은데?’

비록 뒷골목에서 생활하기는 했으나 블라드는 엄연히 도시민 출신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높은 성문과 교회, 그리고 영주들이 사는 으리으리한 저택을 보아왔던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작은 건물에 귀족이 살고 있다니 하니 조금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님.”

“그래. 안내해다오.”

귀족이 가진 권위는 가문이 가진 역사나 높은 작위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달마티아 남작은 권위를 갖추는 데 실패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블라드가 생각한 달마티아 가문에 대한 첫인상은 산적들에 대한 사례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이었으니까.

“오오. 우리 영지에 스스로를 증명한 기사가 찾아오다니!”

자신만의 깃발을 들고 온 기사를 알아본 달마티아 남작은 직접 영주관 바깥으로 나와 블라드를 맞이했다.

일개 방랑하는 기사를 맞이하는 것 치고는 과한 환대였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아닐세. 근방에서 골치를 썩이던 놈들까지 잡아 왔는데 주인 된 입장에서 자네를 환영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나!”

달마티아 남작은 자신에게 깍듯한 자세로 인사하는 블라드를 보며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완벽히 체득하지는 못했지만, 옥사나 백작부인이 때려 넣다시피 한 블라드의 예의는 지금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네.”

달마티아 남작을 따라 응접실로 들어선 블라드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

“······.”

영주관까지 걸어오면서 봤던 마을의 풍경.

그리고 도브레치티에서 가장 화려해야 할 응접실까지.

블라드와 고트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일이 글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 영지는 빈털터리였다.

“그래. 잡아 온 산적들이 모두 9명이라던데?”

“목만 들려온 녀석들까지 합치면 그럴 겁니다.”

블라드는 자신에게 위협과 모욕을 준 산적들에게 정당한 값을 받아내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받지 못한 나머지 값은 눈앞에 있는 영주가 지불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주변 치안을 위협하는 산적들을 잡았으니 주인 된 자로서 그만한 보상을 치러줘야 할 테니까.

“흠흠. 쇼아라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이 험했을 테니 피곤하겠구만. 내 점심을 미리 준비시켜놓았네.”

그러나 달마티아 남작은 보상에 관한 이야기는 미룬 채 살살 블라드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블라드를 오래 붙잡아 두고 싶었으니까.

‘혼자서 15명이라니!’

생포한 산적은 다섯, 죽인 자는 넷.

그리고 혼자인 몸이기에 미처 잡아내지 못한 자가 여섯 정도라 했다.

증거를 직접 끌고 왔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기사 중 그 누구도 이만한 성과를 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깃발을 들고 온 기사니 자신을 증명할 일을 찾고 있겠군.”

“그렇습니다. 남작님.”

블라드는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직접 자신을 맞이하러 나온 영주에게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동안 귀족들에게 저질러왔던 실수들이 블라드에게 지금의 판단력을 갖추게 했다.

“마침 그런 자네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일이 있네. 명예를 좇는 진짜배기 기사인 자네이니 하는 말일세.”

처음에는 거절할 생각이었다.

블라드는 명예를 증명하기보다는 목소리의 흔적을 찾는 데 목적을 두고 있었으니까.

“요근래, 우리 영지에서 괴이한 일이 발생하고 있네.”

“무슨 일입니까?”

그러나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블라드에게 달마티아 남작은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지금 시기는 한참 보리를 파종해야 하는 시기지. 그래서 우리 영지도 그동안 보관해왔던 종자들을 밭에 뿌리고 있는데 말일세.”

달마티아 남작은 통통한 볼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갈한 차로 입을 축이고 나서는 입을 열었다.

“밭에 종자들을 뿌리기만 하면 사라지고 있어.”

“······씨앗들이 사라진다는 겁니까?”

“그래. 병사들을 세워놓고 밤새 감시해 봐도 그러네.”

언뜻 들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병사들을 세워놓았는데도 밭에 뿌려놓은 보리 씨앗들이 사라진다니.

쥐 같은 동물들이나 몬스터들의 소행이라면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니까.

“마을의 몇몇 노인네들은 숲에 사는 정령들의 짓이라고 말하기는 하네만······.”

“정령들 말씀이십니까?”

달마티아 남작의 말속에서 블라드의 관심을 잡아끄는 단어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이 숲에는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져오고 있거든. 물론 나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그런 것들을 믿지는 않지만 말이지.”

제국과 세워짐과 함께 새롭게 만들어진 질서들은 정령들과 같은 오래된 옛것들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특히 교회 같은 경우는 신의 이름 아래 서 있지 않은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으니 지금에 와서 정령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살아왔던 노인들 정도일 것이다.

‘정령, 정령······.’

그러나 블라드는 이 세상에 정령이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보았고 느꼈으며 가호까지 받은 사람이었으니까.

설명하기 힘든 기이한 일에 정령이라는 단어까지 흘러나오니 블라드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자네가 한 번 우리 영지의 보리밭을 지켜봐 줄 수는 없겠나? 자네같이 훌륭한 기사의 눈이라면 분명 다른 게 보일지도 모르니.”

별것 아닌 임무였지만 그 일을 부탁하는 달마티아 영주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그로서는 이번 파종에 실패한다면 밀이 추수될 내년 가을까지 버틸 수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가문의 존속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남작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오오. 정말 고맙네! 아직 이 시대에도 기사도를 따르는 진정한 기사가 남아있을 줄이야!”

그저 노인들이 내뱉는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겠으나 블라드는 승낙하기로 했다.

정령에 대한 단서를 찾고 있던 블라드에게는 지금 같은 단서도 감지덕지한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보리밭만 지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으니 크게 발목 잡힐 일도 없을 거라는 판단도 있었다.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도록 하게! 산적들에 대한 보상도 내 최대한 신경을 써드리지!”

“감사합니다. 남작님.”

자신의 일과 관련이 있고 임무마저 간단한 것이라면 달마티아 남작에게 좋은 인상을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기사에게 있어 명예라는 가치는 많이 챙겨둘수록 좋은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장. 우리 보상금은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를 마치고 남작의 응접실에서 나온 블라드는 자그맣지만 다급하게 외치는 고트의 목소리를 들었다.

“돈을 받아야 할 거 아냐. 돈을! 누아르 그놈이 요즘 삶은 여물만 처먹는단 말이야. 여물값이며 장작값이며······”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뭐?”

큰일과 작은 일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요제프가 검도 쓰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사인 보르단을 항상 데리고 다닌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일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 그러라고 데리고 나온 거니까.”

“오······.”

보르단과 고트.

협잡꾼과 사기꾼.

산적들에 대한 협상권을 넘겨받은 고트가 눈을 반짝이며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산딸기, 산딸기가 어디 있지?”

이제야 막 열 살은 되었을까.

발그레한 볼에 바구니 하나를 들고 온 소녀가 숲 언저리를 향해 걷고 있었다.

궁색한 사정을 보여주듯 옷차림은 초라했으나 반듯하게 땋아 올린 머리는 이 아이가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기 있다.”

저 앞, 하얗게 눈이 덮인 넝쿨 위에 본연의 색을 내미는 작은 열매들이 보였다.

겨울 산딸기.

지금처럼 궁핍한 계절에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열매 중 하나였다.

산딸기의 선명한 색깔에 이끌려 넝쿨로 다가간 소녀.

하나 정도는 입에 집어넣을 만도 했지만, 집에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서둘러 산딸기들을 바구니로 집어넣던 소녀에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오오아아와-

“······?”

저 먼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은 괴이한 소리.

마치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에 소녀는 산딸기를 따던 손을 멈추고 숲속 깊은 곳을 바라보았다.

숲의 어둠은 살아있다.

도브레치티의 숲은 오래된 만큼 그 안에 수많은 전설과 기담들을 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소녀가 숲을 바라본 순간.

“꺄아아악!”

숲 또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가 있던 자리.

그곳에는 뒹굴고 있는 바구니와 어지러이 흩어진 산딸기들.

그리고 소녀를 집어삼킨 구덩이 하나가 어두운 입을 벌리고 있을 뿐이었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5화 17

보리밭의 파수꾼 (3)

어두운 밤, 블라드는 병사들과 함께 야트막한 언덕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꼴이 좀 우습기는 했지만, 저 앞에 있는 보리밭에 누가 오가는지를 보려면 지금처럼 잠복하는 것이 최선이었으니까.

“이번에 실종되었다는 아이가 사실 이곳 근처에서 사라졌는데 말이지요”

“······.”

잠복의 기본은 은밀함.

이곳에 있는 듯 없는 듯 바짝 숨어있는 것이 상식이겠으나 블라드의 옆에서 계속 조잘거리는 기사단장의 머릿속에는 그러한 개념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이가 사라진 곳 바로 옆에 엄청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고 하더군요.”

왜 이렇게 친한 척하며 옆에 달라붙어 있는지를 안다.

싼 맛에 부릴 수 있는 기사이니 최대한 써먹어 보고 싶겠지.

아마 달마티아 남작은 자신에게 오늘 아침에 실종되었다던 아이의 일까지 떠맡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럴 수는 없지.’

아이가 실종된 일은 안타깝지만 그렇다 해서 도브레치티의 모든 일을 떠맡을 수는 없다.

이번 보리밭을 지키는 임무도 엄연히 정령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받아들인 것이었으니까.

이번 보리밭을 지키는 파수꾼의 임무도 엄연히 정령과 관련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고 계집아이가 참 되 바른 아이였는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도 어미가 영주관에 찾아와 울고불고······.”

“잠깐.”

기사단장은 블라드가 다급하게 내미는 손에 그만 입이 틀어막히고 말았다.

블라드가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입안 가득 들어오는 흙덩이 때문에 단장의 얼굴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있었다.

“안 들립니까?”

“퉤, 퉷. 그게 무슨······.”

어둠 속에서 블라드의 귀가 기민하게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밀반입을 하기 위해 훈련되었던 청각이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었다.

“이런.”

방금까지만 해도 내뱉는 숨소리조차 숨기려 들던 블라드였으나 지금은 마치 늑대가 사냥감을 향해 달려가듯 쏜살같이 언덕을 뛰쳐 내려가고 있었다.

“따라, 따라가라! 블라드 경을 따라가!”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같이 잠복하고 있던 병사들이 허둥지둥하며 뒤를 따랐으나 다들 어두운 언덕에서 부딪히고 넘어지며 데굴데굴 굴러다닐 뿐이었다.

오히려 달빛 하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랜 몸놀림을 보이는 블라드가 기이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허억, 헉. 블라드 경. 왜 갑자기.”

그러나 겨우겨우 언덕을 내려간 병사들이 본 광경은 허탈한 표정으로 보리밭을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뿐이었다.

“털렸습니다.”

“네?”

블라드의 말에 서둘러 횃불을 밝혀 본 보리밭에는 과연 낮에 뿌려놓았다던 종자들이 감쪽같이 증발한 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 이게 어찌.”

달마티아의 기사단장은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아무리 어둡다 한들 분명 자신들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삽 가져왔나?”

“네. 여기.”

단장과 병사들 모두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지만 블라드만큼은 옆에 서 있는 병사에게 삽을 건네받고는 보리밭을 파내기 시작했다.

일은 막지 못했으나 단서라도 찾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봐야만 했으니까.

‘분명히 들렸는데.’

분명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러나 지금 근처에는 어떠한 발자국도 남아있지 않았고 언덕 위에서 날카롭게 감각을 세우고 있던 자신의 시야에서도 움직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단장님. 아까 말한 아이가 실종된 곳이 여기서 얼마나 멉니까?”

“얼마 안 되지요. 저 언덕만 올라가면 금방입니다.”

마침내 삽질을 마친 블라드.

자신이 파낸 구멍을 뚫어지듯 내려다보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런데 그곳은 왜······.”

“횃불.”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병사에게 횃불을 받아든 블라드는 자신이 파놓은 곳을 비춰보았다.

“이게 무슨······.”

“허어.”

마침내 마주 본 보리밭의 저 아래.

단장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을 보며 놀람을 금하지 못했다.

횃불을 들어 마주한 그곳에는 블라드가 파내지 않았음에도 이미 뚫려있는 깊은 구덩이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아이가 실종된 장소에 구덩이가 뚫려있었다고 했었습니까?”

보리밭 아래에 깊이 파인 구덩이 하나.

비록 크기는 작았으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구덩이는 횃불의 빛으로도 그 밑을 살펴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 가봐야겠군요. 그곳에.”

도저히 사람이 파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구덩이를 보며 감히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무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도브레치티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었으니까.

어두운 밤, 홀로 밝혀 있는 횃불 아래 서 있던 블라드는 새까만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 있었다.

※※※※

짐승이나 몬스터가 한 짓이라기에는 너무 기이하다.

숲속에 있는 배고픈 것들이 내려왔다면 굳이 바로 앞에 있는 민가와 가축들을 내버려 두고 씨앗만을 파내갈 필요가 있을까.

그것도 번거롭게 구덩이를 파내가면서 말이다.

“그래서 지금 블라드 경은 무엇을 하고 있다 하던가?”

어젯밤 블라드와 같이 보리밭을 지키던 기사단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달마티아 남작에게 보고했다.

영지에 있는 기사는 단 두 명뿐이었으니 단장이자 기사이며 조언자인 그는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쳐야만 했다.

“저와 함께 아이가 실종된 장소에 다녀오고는······지금은 마을의 노인들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노인들을? 도대체 왜?”

비록 부탁한 일이기는 했지만, 너무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그래도 이제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블라드라는 기사의 뒤에는 바예지드라는 거대한 뒷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서 그의 수사권을 제한이라도 했다가는 큰 모욕을 주는 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나중에 지금보다 더 곤란한 일이 발생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노인들에게 예전 일들을 물어보려 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 일들을?”

달마티아 남작은 단장에게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조금은 언짢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중부 외각에 있는 산골 영지.

교회의 영향권 밖에 있는 이곳에는 아직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옛 전통들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노인네들이 별 이상한 말을 하지는 않겠지?”

“나이가 든 만큼 현명해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낯선 기사 앞에서 교회가 꼬투리 잡을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단장의 대답에 달마티아 남작은 관자놀이를 어루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저 어느 몬스터 하나 잡으면 될 일이라 생각했건만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옆에 사람을 붙여라. 괜히 이상한 일까지 캐묻지 않도록.”

“알겠습니다.”

그래도 블라드라는 존재가 이 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사람임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지금 눈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기사단장보다 그의 검이 더 날카로울 것은 분명했으니까.

※※※※

“어르신들. 실종된 소녀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주시는 단서 하나가 그 아이를 살릴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현명하나 그렇다고 모든 일에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바로 앞에서 사기꾼이 주절대고 있다면 말이다.

“지금도 어느 구덩이에 박혀 울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모시는 기사님은 여러분을 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일을 위해서 열정을 불태우시는 것뿐!”

모아놓은 노인들 앞에서 고트가 쉴 새 없이 혀를 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블라드는 마치 약장수가 약을 파는 모습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정말 뭔가 짚이시는 일들이 없습니까? 이 모두가······.”

“······있긴 있었지.”

블라드에 대한 신뢰, 실종된 아이에 대한 동정심. 그리고 위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위협까지.

“아이고 어르신. 드디어.”

협박과 회유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기꾼의 혀끝에 드디어 노인 한 명이 홀리기 시작했다.

“보리가 없어지는 일은 예전부터 있긴 했지.”

“우리가 어렸을 때는 제사를 지내고는 했는데.”

“교회가 와서는 그거 하지 말라고 하지 뭐야.”

사기꾼의 현혹에 한 명이 넘어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증언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노인들도 지금의 사태에 나름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사라진 적은 없었지.”

“늑대에 물려간 적은 있었어도 구덩이에 빨려 들어간 적은 없었지. 암 그럼”

노인들의 말을 듣던 달마티아의 기사가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블라드가 내보이는 미소는 짙고 의미심장했으니까.

“제사는 뭐에 대한 제사입니까?”

“······.”

갑자기 들려오는 질문에 고개를 돌린 노인들은 푸르게 빛나는 블라드의 눈을 보며 다시금 입을 닫기 시작했다.

“무슨 제사예요? 어르신들. 이거 말 안 해주시면 애 못 구해요.”

“땅 귀신. 숲에는 땅 귀신이 있어.”

“그렇게 나쁜 녀석은 아니고 제사만 지내주면 땅도 비옥하게 해주는 그런 녀석인데.”

“그런데 요즘에는 땅을 개간한다고 숲을 불태워서리.”

고트는 노인들의 말을 들으며 뒤에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매서운 눈초리에 반짝이는 갑옷까지 입은 블라드로서는 도저히 끌어낼 수 없는 반응이었다.

“땅 귀신이 뭔지 알아 와봐. 밖에 있을 테니까.”

“알았어.”

블라드는 자신이 방해밖에 안된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조용히 고트에게 속삭이고는 밖으로 나왔다.

역시 사람은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법이었고 고트는 마구간지기보다는 사기꾼에 더 알맞은 인재였다.

“블라드 경. 제사라는 게 이상한 것이 아니고.”

“저도 압니다.”

기사의 변명에 방금까지만 해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던 블라드의 얼굴에 어느새 기품있는 미소가 서리기 시작했다.

옥사나 백작부인이 여자들 앞에서는 이렇게 지으라 가르쳤던 미소였다.

“오랫동안 살아오신 만큼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는 규율들도 있는 법이지요. 이해합니다.”

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지내는 제사는 우상 숭배나 다름없었다.

비록 도브레치티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오래된 존재들에 대한 대우가 남아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교회가 금지하는 행위였다.

만약 들통이 나게 된다면 큰 경을 칠 수도 있는 일이었기에 지금 기사가 쩔쩔매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실종된 아이와 보리 도둑을 찾는 데에만 신경 쓰겠다고 신께 맹세하겠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그 일을 모른 척 넘어 가주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니 달마티아의 기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블라드 경.”

안에서는 사기꾼이 밖에서는 소매치기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예전과는 다르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도브레치티에서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일 것이다.

깃발과 함께 하는 블라드와 고트는 더는 범죄자가 아닌 기사와 종자였으니까.

※※※※

“일종의 정령같은 느낌인데. 예전에는 그들에 대해 제사를 지냈었다고 하더라고.”

“으음. 좋아.”

아직 옛 관습이 남아있는 촌구석이어서 다행이었다.

정말로 도브레치티에는 정령과 관련된 풍습이 남아있었으니까.

“지금은 영주가 밭을 늘려보겠다고 숲을 불태우고 개간했다고 하더라고. 안 그래도 제사 지내던 곳이 그때 대장이 땅을 팠던 보리밭이었대. 소름 돋지 않아?”

고트는 자신의 한 말임에도 닭살이 돋는다는 듯 양손으로 어깨를 감싸 쥐었다.

고트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을씨년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제사를 지내고 공물을 바치다니.

그러나 정작 듣고 있는 블라드의 입장에서는 마치 마른 사막에서 물을 찾은 것과 같은 기분이었다.

“땅 귀신은 뭐야.”

“땅 귀신은 이제 농사에 관련된 이야기인데.”

도브레치티에서 예전부터 모시던 존재는 땅과 관련된 존재였다.

척박한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영지민들의 입장에서는 땅과 관련된 정령만큼 의지할 대상이 없었으리라.

“제사를 지내면 땅이 비옥해지고 그랬다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을 깊게 파야 하거든. 땅 귀신이 그런 걸 해줬다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말이 왜 안 되나.

나무에 사는 뱀도 있는데.

심지어 그 뱀은 날씨를 따뜻하게 해주는 능력까지 가진 녀석이었다.

추운 북부에서 레몬까지 자라게 해주는 하얀 뱀과 비교한다면 땅 좀 비옥하게 해주는 것쯤은 간단한 일일 것이다.

“······어쨌든 보리를 좋아하고 땅속에서 사는 녀석인 것 같은데.”

블라드는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밤이 오고 있었다.

“어두운 곳도 좋아하는 것 같고.”

보리들은 언제나 밤에 사라지고는 했었다.

땅속에 사는 녀석들이라면 당연히 햇빛보다는 어두운 곳을 좋아할 것이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날씨였으니 실종된 소녀까지 찾기 위해서는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가서 보리 좀 얻어와.”

“보리?”

요제프는 언제나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을 좋아했다.

판을 짜고 예측하고 그렇게 결과를 만들어내는 남자였다.

“그래. 보리.”

아직 정확한 정체는 몰랐으나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은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짙은 눈그늘의 남자를 보고 배워온 것이 있었으니까.

밤이 오고 있었다.

※※※※

새까만 밤.

블라드와 고트.

푸르르륵-

그리고 누아르만 있는 어두운 산길.

“대장 이걸로 되겠어?”

고트는 의문스럽다는 얼굴로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밤새 가져온 보리들을 산길 여기저기에 흩뿌려놓았지만 이것만으로 보리 도둑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런데 굳이 바위 위에다가 놓으라는 이유가 뭐야.”

“쉿.”

그래도 블라드는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땅을 파는 녀석인 것은 알겠으나 바위까지는 깨지 못했었으니까.

삽질을 하며 느낀 단단한 돌의 감촉이 그 사실을 증언해주었다.

“보인다.”

그렇다면 보리를 가지러 오기 위해서는 바위 위로 올라오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어두운 밤. 흩뿌려놓은 보리 종자의 냄새를 맡은 무언가가 땅을 파고 올라오고 있었다.

축축한 코로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땅 위를 올라와 바위 위로.

뀨이이익-

목소리의 잔재와 하얀 뱀의 가호와 알리시아의 호박석. 그리고 일각수의 피를 이은 검은 말까지.

정령과 관련된 모든 것을 짊어지고 나온 블라드는 마침내 바위 위로 기어 올라온 존재를 보며 살며시 왼쪽 눈을 감았다.

“두더지잖아.”

“그냥 두더지가 아니야.”

달빛 아래 비친 자그마한 두더지 한 마리.

목소리의 잔재와 함께 본 그 두더지는 어두운 밤임에도 희미한 노란색 빛을 띠고 있었다.

“빛나는 두더지지.”

교회가 하나 이름아래 신의 뜻을 널리 퍼트리고 있는 지금에도 도브레치티의 숲은 여전히 신비를 품고 있었다.

그 신비의 이름은 빛나는 두더지였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6화 12

두더지는 함부로 건들지 마라 (1)

고트는 갑작스레 생긴 구덩이를 보고는 그만 허망한 목소리를 내뱉고야 말았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범해 보이는 두더지가 이런 사태를 만들어낼 거라고는.

보리로 꾀어내겠다는 생각도 좋았고 벼락같이 뛰쳐나가 두더지를 낚아챈 블라드의 판단도 좋았었다.

그러나 블라드가 두더지를 움켜잡자마자 순식간에 바닥이 움푹 꺼질 거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못 한 일이었다.

“······잡으면 안 되는 거였나?”

마치 잡아채지듯 깜깜한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가 버린 블라드.

그렇게 블라드는 고트의 눈앞에서 외마디 비명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대장! 괜찮아!”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고트는 블라드가 빨려 들어간 구덩이를 향해 크게 외쳐보았지만 들려오는 것은 그저 공허한 바람 소리뿐.

새까만 밤 아래 누아르와 함께 남겨져 버리고만 고트는 어찌해야 할지 당황할 뿐이었다.

※※※※

“으아······.”

블라드는 끝없을 것만 같은 추락이 끝나자마자 검을 빼 들고는 사방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여기가 어디야?”

바닥이 무너지며 끌려들어 왔으니 이곳이 땅속이라는 것은 알겠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냐고 이 자식아!”

뀨이이익-!

블라드는 마치 화풀이를 하듯 두더지를 잡고 흔들어대었지만, 손안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녀석이 사람의 말로 대답할 리가 없었다.

분명 이 사태를 만든 원흉이겠으나 그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은 여전히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녀석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빌어먹을 정령 같은 놈만 아니었어도.”

입으로는 투덜거렸지만, 행동만큼은 기민하게 가져간 블라드는 오러를 일으키고는 새까만 어둠에 눈을 동화시키려 노력했다.

낮보다는 밤에 활동했던 쇼아라에서의 경험이 이럴 때 도움이 되고 있었다.

뀨익?

“닥쳐.”

블라드의 오러를 느낀 두더지가 놀란 듯 소리를 내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대답뿐.

그러나 두더지는 블라드의 차가운 대답과는 다르게 적잖이 안심하는 중이었다.

오러가 흐름과 동시에 갑옷과 호박석에서 느껴지는 정령들의 가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네.”

오러를 통해 시야를 어느 정도 확보한 블라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굴러떨어졌던 구멍을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아무리 살펴봐도 이곳으로 다시 올라가는 것은 요원해 보였다.

‘음,’

그다음으로 한 일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에 대한 탐색.

완벽히 시야를 확보한 것은 아니었지만 손끝과 발끝 감각까지 동원한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통로 같은 곳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인 자신도 조금만 허리만 굽히면 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통로.

자그마한 몸체를 가진 두더지들이 만들었다기에는 기이하게 넓은 곳이었다.

‘일단은 나가야겠는데.’

어쨌거나 지금 손안에서 바둥거리고 있는 녀석도 밖으로 나가 보리를 훔쳐 왔으니 분명 자신이 나갈 길도 있을 것이다.

블라드는 손가락 끝에 침을 묻히고는 혹시라도 바람이 통하고 있는지를 확인해보았다.

“있네.”

희미하지만 느껴지는 바람이 있었다.

작든 크든 분명 밖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오늘 안에 여기서 못 나가면 너는 내일의 아침밥이 되는 거야.”

꾸우우우--

혹시나 싶은 마음에 두더지에게 협박해놓은 블라드는 찾아낸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길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

“이걸 어쩌지 이걸······.”

목청이 터져라 구덩이를 향해 소리지르던 고트는 더는 혼자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구덩이를 파내든지 아니면 다른 길을 찾든지 간에 일단은 사람이 더 필요할 것이다.

푸르르륵-

“응?”

서둘러 고삐를 붙잡고는 마을로 내려가려던 찰나, 고트는 오히려 자신이 누아르의 움직임에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 가냐? 임마 어디가?”

가만히 블라드가 빠진 구덩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누아르는 이쪽이라는 듯한 발걸음으로 마을이 아닌 깜깜한 숲을 향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마치 블라드가 어느 곳에 있다는 건지 알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미치겠네.”

누아르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자 당황한 고트였으나 적어도 이 녀석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럴 녀석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야만인들도 신성시하던 말이며 어떨 때는 사람보다 더 머리 좋아 보이는 녀석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가보자.”

블라드의 세계와 맞닿아 있던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누아르 또한 맞닿은 경계를 통해 세계를 공유해 본 존재이기에 땅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블라드의 움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때로는 동물들이 사람보다도 더 날카롭게 반응하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하던데.”

깜깜한 숲으로 들어서던 고트는 문득 마을 주민들이 말했던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소녀가 사라진 날, 몇몇 마을 주민들은 숲속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이 처음 듣는 소리였음에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그런 느낌이었다고 했다.

※※※※

“······나무 같은 데 이거.”

빛나는 두더지를 손에 쥔 채 어둠 속을 걷던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바닥이 흙바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땅속으로 빨려들어 왔으니 밟고 있는 것은 흙바닥이어야 할 터.

그러나 지금 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은 부드러운 흙이 아닌 딱딱한 나무뿌리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바짝 말라 있는 그런 나무뿌리 말이다.

‘나가보면 알겠지.’

좁고 어두운 땅굴에서 혼자 길을 상태였으나 블라드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대담한 성정 때문이기도 했지만 쇼아라에서 개구멍을 헤집던 때보다는 지금의 상황이 그나마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점점 바람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점은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뀨이익- 뀨익.

바람이 가까워지고 공기가 신선해질수록 블라드의 얼굴에는 미소가 맺혀갔지만 정작 붙들려 있는 빛나는 두더지의 발버둥만큼은 심해지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뀨이이익-!

양팔을 크게 벌리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애초에 타고난 종(種)이 다르니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어쩌면 목소리가 지금 있었다면 통역 정도는 해주지 않았을까?

“일단은 나가고 보자고.”

문제는 차근히 하나씩 해결해야 한다.

두더지 놈이 발버둥을 치든 말든 일단 가장 우선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이곳에서 벗어나는 일일 것이다.

평생을 땅굴 속에서 헤매며 살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음?’

점점 밖으로 나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 무렵, 블라드의 귓가에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가 있었다.

터엉-! 텅-!

마치 무언가에 강하게 부딪히는 것만 같은 소리.

블라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방향과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울려 퍼지는 느낌으로 보아 지금 자신이 있는 땅굴이 아닌 밖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조용히.”

뀨-

블라드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얌전해진 빛나는 두더지.

블라드는 재빨리 갑옷 속 주머니에 두더지를 욱여넣고는 양손으로 검을 든 채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터엉-! 터엉-!

앞으로 나아갈수록 소리는 커지고 이제는 바닥을 밟고 있는 나무뿌리를 통해 진동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에 있는 흙더미까지 부서지며 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모르긴 몰라도 가공할 만한 힘으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것만 같았다.

‘보인다.’

알 수 없는 소리와 진동 속을 헤매던 블라드는 마침내 통로 한가운데서 자그맣게 내리쬐는 달빛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사람 하나는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천장이 뚫려있었고 그곳을 통해 오늘의 달이 비치고 있었다.

‘좋아.’

확실한 길을 찾았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다.

블라드는 검을 집어넣고는 조심스레 도약하며 달빛을 향해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빛나는 두더지도 지금만큼은 상황을 확실히 인식했는지 블라드의 품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터엉-!

부서지는 천장의 흙더미 속으로 손가락을 꽂아가며 기어오르던 블라드는 올라갈수록 선명해지는 파공성에 숨을 죽이고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도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나름의 각오가 필요할 것 같았다.

‘도대체 쉬운 일 하나가 없네. 없어.’

그러나 후회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설사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았다 할지라도 두더지를 향해 손을 뻗었을 테니까.

블라드는 나름의 각오를 하고는 심호흡을 크게 한 채 손가락 끝에 힘을 주었다.

‘흡!’

그렇게 단단한 각오와 함께 밖을 향해 빼꼼히 내민 고개.

고개만 내민 블라드의 모습은 마치 자신이 잡아놓은 두더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모습은 우스웠을지라도 그렇게 한 판단 자체는 훌륭한 것이었다.

‘······저게 도대체 뭐야.’

달빛 아래 보이는 광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치 푸른 평원의 잔디처럼 쫙 깔린 이끼들의 무리.

그리고 그 무리 가운데 고개를 들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던 하이날의 나무처럼, 알리시아의 호박석에서 보았던 단풍나무처럼 한 눈으로 보아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참나무였다.

터엉-!

그아아아아!

그리고 참나무 앞에서 흉포한 기세로 도끼를 휘두르는 존재.

두 발로 서 있었으나 사람이라 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몬스터가 쉴 새 없이 소리를 치며 들고 있던 도끼로 참나무를 마구 내려치고 있었다.

두더지는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블라드의 품속에서 떨고 있던 것이었다.

지금 보이는 정체 모를 몬스터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빌어먹을······.’

사태를 파악한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는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피아의 식별일 것이다.

무슨 연유로 정체 모를 몬스터가 나무를 내리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자신과 연관이 없다면 굳이 상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다시 한번 고개를 내민 블라드는 이번에는 왼쪽 눈을 감고는 세계를 통해 나무와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참나무와 검은 그림자에 휩싸여 있는 듯한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노란색이네.’

그리고 블라드의 세계에 남아있는 목소리의 잔재는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나무가 노란색 빛을 띠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령으로 의심되는 두더지와 같은 색을 띠는 빛이었다.

‘여기서 쫓겨난 거였군.’

블라드는 자신의 품에서 떨고 있는 두더지를 느끼며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으나 녀석은 저 미쳐있는 몬스터 때문에 쫓겨나 마을까지 떠밀려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해야겠네.”

뀨우?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거나 정령의 본원(本院)은 찾았다.

비록 선객이 있는 모양이지만 블라드 또한 그 못지않게 급한 사람이었으니 먼저 양보를 받아도 괜찮을 것이다.

“후우.”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 있다.

자신의 빠른 발이라면 기습이라는 형태의 의외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천천히 심호흡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떠올리기 시작하는 블라드.

진하게 떠오르는 오러를 통해 라문드의 강체술로 각력을 높이고 목소리의 잔재를 검에 담았다.

그리고 아직 색을 갖지 못한 자신의 세계는 눈동자에 담아내었다.

터어엉-!

그아아아아!

‘지금!’

몬스터가 나무를 내려찍고 함성과 함께 도끼를 들어 올린 그 순간.

자그마한 구멍 속에서 폭발과도 같은 돌격과 함께 하얀색 벼락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그아?

뀨우-!

몬스터가 예상치 못한 각도와 빛나는 두더지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흐아압!”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을 통해 의외성을 완성시킨 블라드의 일격이 몬스터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서걱-

하얀색으로 물든 블라드의 검이 미처 눈동자도 돌리지 못한 몬스터의 목을 그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홀로 설 수 있는 기사의 혼신의 일격을 담은 검이었다.

굴러떨어지는 목.

허물어지는 육체.

그리고 고통에 찬 비명을 멈추고는 놀랐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보는 참나무 한 그루.

블라드의 검 아래 모든 것이 고요해진 달빛 아래 풍경이 있었다.

“이런 씨발······.”

그러나 정작 고요함을 만들어 낸 블라드는 서둘러 다시금 검을 치켜들었을 뿐이었다.

아직 색을 정하지 못한 블라드의 세계가 검을 향해 거칠게 뻗쳐 나오기 시작했다.

베어냈으나 베어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베어내었던 목은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기에.

“또 너희들이냐.”

으르렁거리는 블라드의 목소리와 함께 허물어져 있던 몬스터의 육체가 다시금 일어서기 시작했다.

저 멀리 떨어져 나간 목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이.

거대한 몸체, 베어졌으나 이미 매끈하게 닫혀버린 단면.

북부에서 활동하는 몬스터가 아니기에 블라드는 몰랐으나 중부에서는 이 몬스터를 향해 공포와 경의를 담아 트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바닥에서 구르던 있던 목에서부터 거대한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이 들었다던 소름 끼치던 함성이었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7화 12

두더지는 함부로 건들지 마라 (2)

세계를 통해 본 푸른색의 참나무는 울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는 부당한 폭력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프다 외치며 몸부림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

블라드는 크게 벌어진 나무의 상처 속에서 반짝이는 구슬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지금 검 손잡이에 달아 놓은 노란색 호박석과도 유사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 반짝임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옳은 곳에 찾아왔다는 것을.

“네가 뭘 하려고 했던 건지는 알 것 같은데 말이야.”

트롤은 도끼를 들었고 나무는 울고 있었다.

아이들의 숨결은 종탑 위에 매달려 있었고 부모들은 울고 있었다.

아무리 빛나는 것을 들고 있다 할지라도 지킬 힘이 없다면 빼앗길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는 그런 빼앗긴 눈물들을 깔고 앉은 자들이 가득하다.

“나도 이 나무한테 볼일이 있거든.”

블라드는 눈물을 흘리는 나무를 대신해 검을 치켜들었다.

자신을 지킬 방도가 없는 존재를 대신해 검을 들어주는 것.

“그러니까 건들지 마라.”

소드마스터의 규율은 그것을 기사라 말한다.

※※※※

콰앙-!

블라드는 터져나가는 지면을 뒤로 한 채 재빨리 트롤의 다리 사이를 굴러 지나갔다.

위험을 무릅쓴 전진, 그로 인해 얻은 찰나의 순간.

비록 자세는 엉망이었으나 블라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흡!”

반짝이는 검빛과 함께 터져나가는 핏물.

그아아아아!

날카롭게 베인 오금 사이로 덜렁이는 트롤의 근육이 보였다.

“됐······.”

쓰러질 듯 휘청이는 트롤을 보며 서둘러 후속타를 날리려던 블라드였으나 순간 서늘하게 다가오는 감각에 재빨리 검을 치켜들었다.

까앙-!

“크윽!”

평범한 공격이 아니다.

마치 도끼에 서려 있는 질척한 악의가 달라붙는 것만 같았으니까.

비록 검을 들어 막아내긴 했으나 미처 흘려내지 못한 힘은 블라드를 사정없이 바닥을 구르게 했다.

“······어이가 없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트롤의 목이 당황하는 블라드를 보며 크게 웃음 짓기 시작했다.

어느새 말끔히 회복된 검상.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근육이 덜렁거리고 있었으나 지금은 검이 스쳐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회복력 한 번 지랄 같네.’

트롤은 북부에서 활동하는 몬스터가 아니다.

그렇다고 중부라 해서 쉽게 볼 수 있는 녀석은 아니었으니 트롤을 처음 본 블라드가 당황할 만도 했다.

그르르르.

어느새 자신의 머리를 집어 목에 끼워 넣은 트롤은 핏발 선 눈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죽음을 담아넣은 트롤의 눈에는 감히 바라보기 힘들 정도의 살기가 감돌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침을 내뱉고는 태연히 마주설 뿐이었다.

“새끼. 더럽게 못생겼네.”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다만 더럽게 뛰어난 회복력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그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는 목 말고도 다른 것이 떨어져 나가도 죽지 않는지를 확인해 볼 차례다.

“이래도 안 죽나 보자.”

각오를 마친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부터 차마 검에 담지 못한 오러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껏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트롤조차도 정색을 할 만큼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닌 오러였다.

※※※※

뀨우.

두더지는 더는 빛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아무리 특별한 존재라 할지라도 누구도 알아봐 주지 못한다면 그저 평범한 두더지일 뿐이다.

그러나 금색 빛을 가진 인간은 달랐다.

입고 있는 갑옷과 들고 있는 검에서 자신과 같은 동류의 냄새를 풍기는 사람.

그는 비록 희미한 시선이었으나 자신을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안 죽잖아. 이거!”

아무리 단단한 세계가 있다 한들 저 앞에 있는 녀석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떤 뛰어난 공격이라도 격이 다르다면 닿지 못할 테니까.

아직 이 인간의 수준은 불사의 저주를 깨뜨릴 만큼은 되지 않았다.

뀨!

그렇다면 조금은 도와줘야겠다.

어떤 인간은 밭을 넓히기 위해 숲을 불태우고 나무를 잘라내지만, 또 어떤 인간은 배고픈 와중에도 한 움큼의 산딸기를 내어주기도 하니까.

부디 금색 빛을 가진 기사가 격을 높여도 될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

팔도 자르고 다리도 자르고 허리도 베어내 보고.

심장도 꿰뚫고 폐도 터트리고 내장도 꺼내 헤집어 보았다.

블라드의 사투는 이미 피로 인해 새빨갛게 물든 금발이 증언해주고 있었다.

“······이거 미친놈 아냐.”

점점 진흙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대결 속에서 블라드는 점점 초조해질 뿐이었다.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지쳐 쓰러지기 전에.

‘목소리는 했다고 했는데.’

희미한 기억이었지만 자신의 몸을 빌린 목소리가 목 없는 사내를 쓰러뜨린 것은 알고 있었다.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 시간만 있었다면 끝장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내 세계가 얕아서 그런가.’

블라드는 어느새 회복해 제 모습을 갖춘 트롤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이제야 한 단계 올라왔다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에는 자신이 모르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어째서 요제프가 쇼아라에서 자신을 추방했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은 블라드였다.

“쪼개지마. 새끼야.”

그래도 해야만 한다.

아직 지키지 못한 계약이 있다.

블라드는 이름조차 부르지 못한 채 목소리와 이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휘두름은 저 뒤에서 울고 있는 나무가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다.

“······!”

베어내도 안 되고 찔러도 안 된다면 이번에는 아예 사지를 절단해서 저 멀리에 흩뿌려주마.

각오를 마친 블라드가 사납게 이빨을 깨문 순간 저 멀리 숲에부터 반짝이는 빛무리가 비치기 시작했다.

‘뭐지?’

멀리 있기에 알아보지 못한 빛.

괴이한 트롤을 앞에 둔 블라드는 또다시 이상한 존재가 나오는 가 싶어 서둘러 경계 자세를 취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히이이이힝-

거침없이 질주하는 초원의 영혼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죽지 않는 트롤이라 할 지라도.

“누아르?”

콰아앙!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달려나온 누아르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트롤의 옆구리를 들이박았다.

둘이 맞부딪히는 충격에 블라드도 잠시 눈을 감아야 할 정도였다.

그아아아아!

가공할 만한 속도, 도약해온 거리, 그리고 이마 위에 맺힌 새하얀 뿔까지.

잔뜩 힘을 모아온 누아르의 돌격에 이번만큼은 트롤도 사정 없이 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너와 나의 세계는 맞닿음으로써 더 완벽해진다.

좀 더 완벽한 자신을 찾기 위해 숲을 건너온 누아르는 마침내 금빛의 기사를 찾아내었다.

히이이이힝!

“이 자식 어떻게 왔어!”

반가움을 감추지 않은 채 재빨리 누아르에 올라탄 블라드는 서둘러거리를 벌리며 트롤을 바라보았다.

트롤은 자신을 상대했을 때와는 다르게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옆구리에 튀어나온 흉측한 내장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왜지?’

아직 내장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뜻은 제대로 회복이 되고 있지 않았다는 뜻.

누아르의 뿔에 당한 공격은 자신과는 다르게 트롤에게 확실히 유효타를 준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누아르가 가진 정령의 피가 먹혀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블라드는 누아르의 고삐를 쥐고는 트롤의 주위를 세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히이이힝!

누아르의 등장으로 주도권을 잡은 지금, 억지로 틈을 만들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달려드는 둘을 향해 서둘러 도끼를 내려찍는 트롤이었지만 누아르의 위에는 블라드가 있었다.

까앙!

퍼억!

기사의 검으로 받아치고 정령의 뿔로 들이받는다.

말의 무게까지 더한 속도에 트롤은 죽을 것만 같은 고통을 느끼며 땅을 나뒹굴고 말았다.

‘된다!’

꿰뚫린 복부가 이번에도 닫히지 않고 있다.

이건 통하는 공격이다.

“다시!”

블라드가 도약 거리를 벌리기 위해 다시 뒤로 물러선 순간 트롤도 재빨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자신이 내려찍던 나무.

트롤은 재빨리 뛰어가 나무를 등지고 서서는 양팔을 벌려 누아르를 붙잡을 준비를 했다.

그르르르······,

피할 수 없다면 붙잡으면 된다.

비록 크게 꿰뚫릴지 몰라도 저 새까만 말의 돌격만 막으면 위에 있는 기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테니까.

“······!”

트롤을 향해 달려가던 블라드는 양팔을 벌린 녀석을 보고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범상치 않은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몬스터가 생각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판단이었다.

“······?”

달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블라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이 조금은 무거워진 느낌을 받았다.

“뭐야. 이 자식.”

어느새 갑옷 안에서 기어 나온 빛나는 두더지.

알리시아가 준 호박석에 매달린 녀석은 자신을 내려보는 블라드를 향해 한쪽 손을 흔들어대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마치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이해할 수 없는 돌발행동을 보이는 두더지를 서둘러 손잡이에서 떼어내려던 찰나, 블라드는 들고 있던 검에서부터 이상한 울림이 퍼져오는 것을 느꼈다.

‘뭐?’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느낌.

하이날의 하얀 뱀이 자신을 감싸 안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블라드의 오른손을 뒤흔들고 있었다.

알리시아의 호박석이 빛나고 있었다.

어느 세계는 맞닿을 때마다 서로를 찔러대지만, 또 어떤 세계는 서로를 넓혀준다.

누아르가 그랬고, 하얀 뱀이 그랬으며 목소리가 그랬었다.

“이건······.”

그리고 지금 빛나는 두더지 또한 마찬가지였다.

호박석에서부터 시작된 두더지의 가호가 검면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면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땅의 가호가 블라드의 검에 서리고 있었다.

땅은 세상 모든 것들을 짊어지는 근본이다.

마치 바닷속에 빠진 추처럼 심상 세계 깊숙한 곳까지 파고 내려간 땅의 가호는 블라드로 하여금 자신의 세계 깊은 곳을 바라보게 했다.

저 아래에 숨겨져 있던 자신의 근본을 잠시나마 끌어내게 했다.

“가자!”

돌진을 명하는 블라드의 말끝에 어느새 짐승 같은 으르렁거림이 섞여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만 트롤이 지금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걸레짝보다 못한 존재로 보이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그아아아아!

트롤은 점점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어느새 기세가 하늘 끝까지 솟아버린 인간.

새까만 말의 하얀 뿔도, 빛나고 있는 검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두려운 것은 지금 달려오고 있는 남자의 눈동자였다.

“이제 죽어라!”

정령들의 가호와 함께 내지른 검 속에서 트롤이 마지막 단말마를 내질렀다.

날카롭게 맞닿은 세계의 끝에서 죽음을 느낀 트롤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기사의 눈을 기억했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 안에는 차마 마주하기 힘든 세상 가장 완벽한 흉포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

후욱-

어두운 방 안.

타오르는 초들이 가득했지만 빛나지는 않는 그곳에서 홀연히 꺼지는 촛불 하나가 있었다.

“······.”

푸르게 시작했으나 검게 끝나는 머리의 여인이 방금 꺼진 촛불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도브레치티의 숲으로 보낸 트롤을 가리키는 빛이었다.

“······구석에 있는 시골 영지에 격이 높은 자가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오직 한계를 뛰어넘은 영혼만이 자신의 저주를 부술 수 있다.

그것을 알고 있던 여인은 닿지 않는 발끝을 움직이며 작은 종을 흔들어대었다.

“부르셨습니까? 라마슈트 님.”

종소리와 함께 들어온 기사.

그의 가슴팍에는 우트만 남작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확인하고 오세요.”

여인은 이미 꺼져버린 초를 남자에게 던지며 말했다.

“얼굴은 새롭게 갈아끼시고.”

“알겠습니다.”

빛나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블라드에게도 해당 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두운 방, 흔들리는 촛불들 사이에서 땅에 발이 닿지 않는 여인이 조용히 도브레치티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

자그마한 동굴 안에 앉아있는 어린 소녀.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주위에 널려 있는 산딸기들 덕분에 굶주림은 면하고 있었으나 퉁퉁 부어오른 발목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훌쩍.”

지난밤은 잠에 들 수 없었다.

숲속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에 그저 눈물만을 흘렸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때 보았던 괴이한 거인이 내지르는 소리 같았다.

착한 두더지라도 빨리 돌아와 줬으면 좋겠는데.

“대장. 여기 맞아?”

“두더지가 맞대.”

“이젠 두더지랑 대화도 하는 거야?”

“너랑도 대화하는데 뭐.”

저 멀리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소녀는 숨을 멈추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을 사람이라 확신할 수만 있다면 소리라도 질러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겠지만 이미 트롤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있던 소녀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발자국 소리는 소녀가 어디 있는지 안다는 듯 확실한 걸음걸이로 동굴의 앞까지 다다랐다.

“······!”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움켜잡은 채 공포에 질린 소녀.

마침내 그 소녀 앞에 나타난 남자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근사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소녀가 안심했던 것은 남자의 외모보다는 그의 어깨에 걸터앉아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두더지 때문이었다.

“꼬마야. 집에 가자.”

블라드도 두더지도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소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그마한 미소를 지을 힘 정도는 남아있었다.

안아 든 소녀의 몸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8화 14

두더지는 함부로 건들지 마라 (3)

불타는 건물들.

무너지는 석상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곳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는 요란했으나 정작 부수는 사람들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숨죽인 침묵만이 있었을 뿐.

도시를 바삐 뛰어다니는 드워프들의 얼굴은 본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재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의 자랑이던 수염은 열기에 의해 바짝 타들어 갔으며 평생을 갈고 닦았던 장비들은 지금 빛나는 선조들의 유산을 부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한 번의 망치질을 내려칠 때마다 그들의 눈에서는 차마 담아둘 수 없는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나는 것을 갖고 있다면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것에 실패했다.

남은 것은 오직 처참한 몰락뿐이며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하지 못할 방랑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던 드워프들의 눈물은 새까만 잿더미와 섞여 까맣게 흘러내렸다.

“······아직 이곳의 불은 꺼지지 않았군요.”

모든 것이 비통하게 무너지는 이 순간, 그래도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용광로가 하나 남아있었다.

석상처럼 굳은 채 용광로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과 함께.

“누군가 하나쯤은 마지막을 봐줘야지.”

늙은 드워프가 말하는 마지막이라는 말은 단순히 용광로만을 뜻하는 말을 아닐 것이다.

찬란히 빛났던 시대는 끝나고 있고 노인은 그 시대의 마지막을 지켜볼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이제는 끝나버릴 찬란한 문명의 끝을 보며 사내는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아서.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지금 말인가?”

쿠과가가강-!

저 멀리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광산들.

평생을 함께했던 도시의 모든 것들을 부수는 눈물 섞인 망치 소리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스스로 부수고 있는 이 비극의 순간 속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정체 모를 사내와 마지막 용광로의 주인뿐이었다.

“영원한 불꽃만이 다스릴 수 있는 금속을 가져왔습니다.”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낡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늙은 드워프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사내가 덮여있던 천을 벗기자 그곳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은색의 괴가 놓여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길 앞에서도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는 금속은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늙은 드워프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만들어 주십시오.”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인 사내의 손은 새로 생긴 상처로 가득했다.

시절이 이러해서일까.

희귀한 금속만 보면 흥분하고 마는 드워프였지만 노인은 눈앞의 은색 괴보다도 상처투성이인 사내의 손에 더욱 눈길이 가고 말았다.

“무엇을 만들어달란 말인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답을 들은 사내는 자세를 단정히 하며 늙은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사내는 이제야 자그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용을 죽일 수 있는 검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일 것이다.

지금 무너져 내리는 드워프들의 도시처럼 밑바닥에 깔린 채 울부짖는 세계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용광로의 주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두 눈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보다 뜨거웠다.

※※※※

어스름한 새벽, 영주관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 앞.

“······.”

그곳에서 블라드는 고민스러운 표정과 함께 여물 한 가닥을 빼물고는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누아르는 그런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왜 인간이 여물을 씹고 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대답을 해줘야 하는 블라드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대장이야?”

“어.”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같이 나온 고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블라드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을 좀 설쳤어.”

고트는 어느새 자신의 할 일을 미리 다 해놓은 블라드를 보며 기쁜 듯 손을 비비고는 우리에 몸을 기댔다.

“하긴 트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니까 잠을 설칠 만도 하지. 여기 영주도 트롤이라는 말에 엄청 놀라더라고.”

어젯밤 울려 퍼졌던 트롤의 강렬한 포효는 영지민들의 심령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멀고도 깊은 숲에서 울려 퍼진 소리였지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트롤의 포효는 달마티아 남작으로 하여금 몇 안 되는 병사들까지 소집해놓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조금 아쉬운 건 시체까지 있었다면 더 완벽했다는 거였겠지. 트롤의 피는 비싸게 판매되는 물품이거든.”

블라드는 고트의 말을 듣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고트의 말대로 트롤의 시체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게 그렇게 타 버릴 줄 몰랐지.”

어젯밤 해치웠던 트롤의 시체는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타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장작을 높게 쌓아도 그렇게 태울 수는 없을 만큼 깔끔하고 흔적 없게.

누가 보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일 만큼 노골적인 뒤처리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요제프 님께 보고를 해야겠는데.”

오직 새까만 재만이 남은 트롤의 흔적을 보며 블라드는 우트만 남작령에서의 일이 떠올렸다.

수상했고 불길했으며 익숙한 느낌이 드는 도브레치티의 목 없는 트롤은 분명 요제프에게 보고해야 하는 사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마법사가 없잖아. 파발로 보낼 생각이야?”

“아니.”

파발로는 안 된다.

지금은 움직이기 힘든 겨울이었던데다 사태가 심히 수상해 보이니 가능한 한 빨리 알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동쪽에 있는 도시 중에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야.”

“도시라······. 어디 보자.”

블라드의 마음을 헤아린 고트는 달마티아 남작에게 받은 지도를 펼친 뒤 재빨리 다음 목적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있을 만한 가장 가까운 도시는 타노보야. 비츠카야 백작령에 있는 도시인데. 지도만 보면 일주일은 걸리겠어.”

“좋아.”

마법사들이란 세계의 신비를 다루는 자들이다.

비록 그들은 교회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같이 전보를 통해 빠르게 소식을 전한다던가 또는 각종 잡학다식한 지식을 통해 영주들에게 조언해주고는 하였으니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꼭 한 명씩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타노보로 하자. 길 좀 알아놔 봐.”

“알았어.”

달마티아 남작은 가난한 영지의 주인답게 마법사는커녕 순례자의 표식을 증명해 줄 변변한 사제조차 초빙하지 못한 영주였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이곳보다는 더 큰 도시로 나가 그곳의 영주에게 마법사를 빌려볼 생각이었다.

비록 다른 가문에 속해있지만, 자신은 신분이 확실한 기사였으니 여차하면 지금처럼 무언가 일이라도 하나 도와주면 될 것이다.

길을 알아보겠다는 말과 함께 고트가 마구간에서 떠나가자 블라드는 또다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마구간으로 나온 이유는 어제 힘을 써줬던 누아르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쉽사리 다시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러나 잠을 뒤척이게 했던 강렬한 꿈은 지금 신기하게도 신기루처럼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련히 들려왔던 망치 소리와 흩날리는 잿더미들. 그리고 결연히 내뱉었던 사내의 마지막 한마디뿐.

“용을 잡는다라.”

블라드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꿈속에서 들려왔던 사내의 마지막 말은 분명 그동안 익숙히 들어왔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이 꾸었던 꿈은 꿈이 아니라 목소리의 잔재가 남겨두었던 기억의 파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웠던 겨울의 새벽은 가고.

저 멀리서 산등성이에서부터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밝아오는 아침만큼이나 빛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검 끝.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더 명확해진 블라드의 오러 주위에서 반짝이는 하얀색 번개들이 있었다.

그것들 모두가 블라드의 세계 주위를 떠돌고 있던 목소리의 잔재들이었다.

그날 목소리는 블라드에게 좀 더 깊은 세계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고 블라드는 오늘의 오러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좀 더 깊은 세계를 향해 기사는 그렇게 왼쪽 눈을 감았다.

※※※※

“왜 벌써 가려고 하나? 눈이라도 멈춘 다음에 가지 그러나?”

추운 날씨였음에도 직접 영주관 앞까지 배웅하러 나온 달마티아 남작은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흉흉한 사건이 있었으니 당분간은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으나 남작의 얼굴 한구석에서는 어서 빨리 떠났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 또한 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특히나 뒤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고트를 볼 때는 더욱.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남작님.”

손에서 떠난 금화만큼이나 남작의 얼굴도 어두워졌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직 소매치기와 사기꾼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산적 토벌, 보리 도둑 찾기, 트롤 사냥, 거기에 실종된 소녀까지.

그래도 악랄하게 뽑아내지는 않았으니 지금과 같은 배웅을 받는 것일 테다.

“부디 어제 제가 한 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 내 새겨듣도록 하겠네.”

“이것은 그분에 대한 제 성의라 생각하십시오.”

블라드는 빛나는 두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신 여러 가지 말들을 영주에게 당부해두었다.

“자네의 말대로 앞으로 보리밭을 넓히려 숲을 불태운다던가, 함부로 나무를 베지 않겠네.”

아무리 시골구석에 박힌 영지라 할지라도 대놓고 정령의 존재나 신령스러운 참나무를 말하기에는 어려운 시기였다.

지금은 오직 하나뿐인 신만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숲에 소소한 공물을 바치는 것도 좋을 겁니다. 분명 어젯밤 저는 숲에서 흐르는 그분의 뜻을 느꼈으니까요.”

그렇기에 블라드는 정령이라는 이름 대신 신의 존재를 빌려 두더지를 위한 배려를 해놓았다.

더는 굶주린 두더지가 보리 종자를 훔치지 않게 말이다.

“알겠네! 그렇게 해서 보리밭만 지킬 수 있다면!”

“여기 저의 승리를 축복해주신 신께 드리는 저의 공물입니다.”

블라드는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달마티아 남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성의를 표시했는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 북쪽에서 온 기사는 신실하기까지 하군!”

조금이나마 돈을 돌려받게 된 가난한 남작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정확히 금화 한 닢의 반짝인 만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달마티아 남작을 본 블라드는 저 멀리 보이는 도브레치티의 숲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마을 사람들의 인사와 함께 떠나는 블라드의 안장 뒤에는 작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달마티아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속.

트롤이 도끼로 후려갈긴 참나무에는 여전히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날 밤과 같은 참혹한 모습은 아니었다.

누군가 엉성한 솜씨로 상처 구석구석에 푸른 이끼들을 발라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상처 입은 나무에 효과가 있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참나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를 가지런히 떨 뿐이었다.

뀨우!

조용히 흔들리던 참나무 밑에서 자그마한 바구니에 고개를 처박고는 뒷발을 바둥거리는 두더지가 있었다.

새빨간 산딸기가 가득한 바구니.

그 바구니에 있는 산딸기는 자신을 구해준 두더지를 위해 소녀가 마련한 것이었다.

정령은 실존하는 육체가 없기에 굳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존재감.

자신들을 생각해주는 누군가의 기억, 또는 감정 같은 것들이 정령들을 이 땅 위에 존재하게 한다.

그렇기에 오늘 두더지는 실로 오랜만에 굶주렸던 존재감을 채울 수 있었다.

산딸기 안에 담겨 있던 소녀의 감정은 참으로 따뜻했다.

뀨우?

한참 산딸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두더지는 저 멀리에 있는 기척을 감지하고는 코를 쫑긋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도끼나 곡괭이가 아닌 자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오는 사람들.

그들은 비록 신에게 바칠 공물을 들고 오고 있었지만, 숲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두더지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기억,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뀨뀨!

이제는 잊혀지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더지는 기분이 좋다는 듯 웃으며 자그마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가락이 치켜진 방향.

그곳은 떠나가는 블라드가 있는 방향이었다.

오늘의 공물로써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땅의 정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숲을 떠나는 기사를 향해 작은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오늘, 도브레치티의 숲으로 신의 이름 아래 잊혀 있던 빛나는 노란 별 하나가 돌아왔다.

하이날의 레몬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도브체리티의 참나무도 조금은 푸른색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09화 7

북쪽보다 차가운 곳 (1)

한겨울의 끝자락.

요제프는 평소 앉아있던 의자를 창가로 돌려놓고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을 통해 보이는 쇼아라의 성문에는 교회의 사제들이 잔뜩 모여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알아봤나?”

자야르는 창을 바라보고 있는 요제프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다가오는 태풍을 보는 것만 같은 긴장된 눈초리였다.

“드라굴리아 공작의 친아들이라고 합니다. 용살 기사단장인 미르셰아와는 이복형제라고 하더군요.”

자야르의 보고가 끝남과 동시에 저 밖에 보이는 사제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고 있었다.

용의 목을 긋는 짙은 선 하나.

용살 기사단을 뜻하는 깃발 아래서 기사들이 쇼아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름은 라두라고 합니다. 젊은 나이이지만 이미 수차례 용을 살해한 전적이 있는 기사입니다.”

요제프는 귀는 자야르에게 집중하고 있었으나 눈은 성문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깃발 아래서 들어오고 있는 기사는 모두 셋.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앞장서 있는 남자가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멀리 있는 집무실에서 보아도 당당함이 전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용혈공의 아들, 라두 드라굴리아라······.”

바예지드 가문 또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중앙의 드라굴리아 가문만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은 헛되이 전해지는 전승이 아닌 실제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용의 피를 이은 가문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피에르 주교의 정중한 초대와 함께 용의 피를 이은 기사가 쇼아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자야르가 이번에는 말이 아닌 작은 쪽지를 건네며 요제프에게 보고했다.

“바예지드의 눈들이 북부 곳곳에서 수상한 동향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

자야르가 건네준 쪽지를 받아든 요제프는 조심히 펼쳐 그 안에 적혀 있는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음.”

참으려 하였으나 어찌할 수 없는 침음.

그저 짧은 문장만이 적혀 있는 쪽지였으나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요제프의 미간은 좁혀들어갈 뿐이었다.

지금 들고 있는 쪽지는 사태에 대한 설명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페테르가 조용히 말해주는 경고이기도 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야.”

“네?”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검을 다루지 못했기에 날카로운 눈과 깊은 생각을 단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치열하게 단련했다 할지라도 평생을 논리의 전장 속에서 살아온 이단심문관에게는 아직 모자랐던 모양이다.

“피에르 주교의 목표는 블라드가 아니었어.”

분명 요제프와 피에르 주교는 쇼아라의 주도권을 놓고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요제프에게는 목적이자 목표였던 쇼아라의 권력은 피에르 주교에게 있어서는 그저 언제든지 내버릴 수 있는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피에르 주교는 요제프보다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교황청에 속한 북부의 교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깃발을 들어 올린 자는 쇼아라의 주교 피에르였으며 교회의 병사들이 모여들고 있는 곳은 오랫동안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영지 중 한 곳.

우트만 남작령의 도시.

모시암이었다.

※※※※

빛나는 두더지의 축복은 실로 강력했다.

블라드와 고트는 도브레치티의 숲을 빠져나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나 짐승들의 습격을 받아본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는 나아가는 발걸음마저 가벼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순조롭다 못해 매끈하게 진행된 여행은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둘을 도브레치티의 숲을 빠져나오게 만들었고 바로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거참. 천천히들 드시지. 아무도 안 뺏어 먹습니다.”

눈으로 인해 하얗게 물든 나무 아래서 피어오르는 모닥불 하나.

따뜻한 열기와 함께 솟아오르는 연기 아래서 허겁지겁 스프를 퍼먹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바로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무언가 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블라드와 고트에게 말했다.

따뜻한 스프를 입에 대었음에도 아직도 새파랗게 질려있는 둘의 입술이 그동안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군요.”

먹을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 한다.

소매치기가 되기 이전 어린 동냥꾼이었던 블라드는 따뜻한 스프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신을 구해준 용병들을 향해 진심을 다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오······.”

“······이것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그러나 정작 블라드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용병들은 오히려 눈을 크게 뜬 채 놀라움을 표할 뿐이었다.

갑작스레 어색해지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자신이 무언가 실수라도 한 건 아닌가 하며 재빨리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뒷골목에서 배운 처세술이 숨 쉬듯 자연스레 나오고 있었다.

“기사님은 아무래도 중부 출신이 아니신가 봅니다?”

그러나 용병대장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저 실실 웃으며 잘라낸 육포를 건네줄 뿐이었다.

감사하다 말한 블라드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었다.

“중부 출신은 아닙니다. 북부에서 왔죠.”

“오. 그래서 그러셨군.”

추위와 배고픔에서 벗어나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블라드는 자신을 신기하듯 쳐다보는 용병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제가 뭐 실수한 것이라도 있습니까?”

“아니오, 아니지요. 기사님. 하하!”

곱슬머리의 사내는 블라드의 물음에 크게 웃으며 스프 한 그릇을 더 떠주었다.

“우리 같은 밑바닥 놈들이 기사님 같은 분들께 고맙단 말을 들은 건 처음이라 그렇습니다.”

자신들을 밑바닥 인생이라 칭하는 용병들을 보며 블라드는 미묘한 어색함을 느꼈다.

정작 밑바닥에서 살아왔던 것은 용병들이 아닌 블라드였으나 새로운 땅에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그저 한 명의 젊은 기사로 보일 뿐인 모양이었다.

‘내가 너무 예의를 차렸나 보네.’

아무래도 중부는 북부보다 계급 간의 상하 관계가 더욱 철저한 모양이었다.

지역 간의 특색에 따라 이런저런 차이점들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블라드는 앞으로 이런 점들을 유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사님은 어디까지 가시는 길이십니까?”

“타노보로 가는 도중이었지요. 비츠카야 백작령의 도시 말입니다.”

그 말과 함께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빤히 곱슬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용병대장은 수프 그릇을 들며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고는 그만 웃음 짓고 말았다.

입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눈 속에 들어 있는 의도가 너무나 빤했으니까.

“이것 참 인연이군요. 마침 저희도 타노보로 가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오오.”

블라드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고트가 먼저 속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행이다. 대장. 저 사람들만 따라가면 타노보에 도착할 수 있겠어.”

“닥쳐.”

블라드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고 말았다.

떠나기 전에는 자신만 믿으라며 가슴을 땅땅 치던 녀석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이 사단을 만들고 말았으니 블라드는 결국은 사기꾼을 믿어버린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는 수밖에 없었다.

“쇼아라의 블라드입니다. 아니, 블라드요.”

“가시나무 용병단의 슈테판입니다. 기사님.”

블라드는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으며 웃는 얼굴로 용병대장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

맞잡은 손과 함께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블라드는 슈테판의 푸른 눈이 곱슬곱슬한 주황색 머리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처음 보는 중부의 도시.

도브레치티처럼 구석진 영지가 아닌 제대로 된 도시인 타노보는 보이는 광경만으로도 평생을 쇼아라에서 살아왔던 블라드의 견문을 넓히고 있었다.

“중부의 도시는 처음인데.”

“그렇다면 이곳이 나쁘지 않을 겁니다.”

경험상 촌뜨기처럼 보이면 범죄의 대상이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 접하는 도시의 정취는 블라드의 마음을 새삼 들뜨게 했다.

“동쪽에 있는 엘프들과의 무역 거점지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도시입니다. 그래서 상인과 용병들이 많이 들리는 곳이기도 하죠.”

슈테판은 경험 없어 보이는 기사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어려 보인다고 할지라도 기사는 기사.

고작 수프 몇 그릇과 친절한 말 몇 마디로 기사와 인연을 터놓을 수만 있다면 분명 수지맞는 장사일 것이다.

“어떻게 여관도 알아봐 드릴까요? 몇몇 쓸만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음. 여관은 추천만 해줬으면 하는데. 먼저 이곳의 영주님을 뵐 생각이라.”

“오. 그러시군요.”

당당히 비츠카야 백작을 만나겠다고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슈테판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기사라 하더라도 모두가 가치 있는 자들은 아니다.

기사랍시고 고개를 들고 다니는 자 중에는 자신들 같은 용병보다 더 너저분한 자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애송이 기사는 귀티 나는 모습부터 범상치 않았던데다 지금은 백작을 찾아뵙겠다고 당당히 말하고 있었으니 슈테판의 눈이 빛날 수밖에 없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찾아주십시오. 저희는 저 앞 사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며칠 묵을 예정이니까요.”

“그러시죠, 아니 그렇게 하지.”

갑작스레 하대로 대하는 블라드였지만 슈테판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렇게 하는 거라는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고마웠네.”

“별말씀을요. 기사님.”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하대를 하기란 의외로 어려웠다.

그러나 블라드는 이제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언제나 앞에서 권위를 증명해주던 요제프나 선임 기사들이 없었으니 이제는 스스로가 자신을 드러내 보여야만 했으니까.

“백작님의 저택이야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건물을 찾아가면 될 겁니다.”

애써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블라드를 보고 있던 슈테판은 다 이해한다는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떠나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용병들의 무리가 조심스레 블라드에게 고개를 숙이며 거리 속으로 사라져갔다.

“진짜 나중에 한 번 찾아가서 술이라도 사줘야겠는데.”

받은 것이 있다면 돌려줘야 한다.

슈테판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차디찬 겨울의 숲을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르니 적어도 확실히 감사 정도는 표하는 게 좋을 것이다.

“술을 사주려면 좀 비싼 걸 사주는 게 좋을걸. 대장.”

“왜?”

슈테판의 용병들과 함께 뒤에서 걸어오던 고트는 블라드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잘 나가는 용병단인가봐. 차고 있는 장비들도 그렇고 아까 성문에서 검문도 금방 빠져나가는 걸 보면 적어도 이름은 알려진 용병단이야.”

“그래?”

떠나가는 슈테판을 보던 블라드의 눈 또한 빛나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관계에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은 오직 슈테판뿐만이 아니었다.

※※※※

북부의 저택은 실용적인 측면이 강했다.

확실한 용도를 가진 시설들과 높게 세워진 벽들.

어찌 보면 자그마한 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삭막한 것이 바로 북부의 저택이 가지는 특징이었지만 중부의 양식은 달랐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저택을 둘러싸고 있는 새하얀 외벽들.

그리고 벽 사이사이 새겨져 있는 조각들은 블라드로 하여금 잠시 말문을 막히게 할 정도였다.

“나는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이곳의 영주님께 특별히 부탁할 청이 있어 찾아왔다.”

“무슨 일이라고 전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처음 보는 쓸모없는 유려함에 잠시 당황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할 일을 잊지는 않았다.

“나의 주군께 급히 전한 일이 있어 마법사의 전보를 빌리고자 한다. 부디 곤경에 처한 기사에게 비츠카야 백작님의 선량한 도움이 있기를 바란다고 전해주게.”

약속도 없이 급히 찾아온 길이었지만 전보 정도야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을 것이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군주라면 자그마한 호의만으로 체면을 살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대장. 여관은 나중에 잡을까? 혹시 초대를 받을지도 모르잖아.”

“그래.”

뒤에서 넌지시 말하는 고트의 질문에 블라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에서는 찾아오는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 있었다.

만약 이곳에도 그런 비슷한 관습이 있다면 어쩌면 저녁 정도는 얻어먹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1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고.

주위가 깜깜해지는 시간까지도 블라드를 부르는 소리는 없었다.

“······.”

요제프가 블라드를 내보낸 것은 혹시라도 모를 교황청의 트집에서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는 의도가 담겨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요제프의 의도는 지금 확실히 성공하고 있는 셈이었다.

“대답은 언제쯤 오겠나.”

“잘 모르겠습니다.”

“된다 안 된다 정도만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기다리셔야 합니다.”

차가운 무시.

중간중간 들려오는 낮은 비웃음까지.

블라드는 오랜만에 느끼는 차가움에 분노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얼마든지 참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어째서 신분도 확실히 증명한 자신에게 이런 대접을 보여주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언제까지?”

“······.”

대륙의 중심은 중앙에 있으며 중부의 영주들은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믿었다.

마른 흙이나 퍼먹는 서부 놈들이나, 야만인들의 피가 섞인 북부 놈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함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은 것이다.

“백작님이 찾으실 때까지 기다리셔야 합니다.”

“······.”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넓기만 할 거라 믿었던 세상은 또 다른 벽들로 가득할 뿐이었다.

세계의 중심은 북부인들을 이렇게 차별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굳건히 닫혀 있는 백작의 문 앞에서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0화 8

북쪽보다 차가운 곳 (2)

창살 위에 쌓여 있는 눈송이들.

움직인 적도 없고 움직일 생각도 없는 저택의 문을 블라드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굳게 닫힌 문을 보는 것은 사실 익숙한 일이었다.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준 곳은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우습나?”

“네? 아니······그것이 아니라.”

북부에서 온 뜨내기 기사를 바라보는 문지기들의 반응이 차갑다.

감히 기사를 업신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비츠카야 백작가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그 위세를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알아봤어야 했고 미처 몰라본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답을 바라는 것이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되어야 할 것이다.

블라드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짐에서부터 자그마한 깃발을 꺼내고서는 단숨에 땅에다 박아넣었다.

까앙-!

자그맣게 튀어 오르는 불꽃.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서 마치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시는······.”

블라드는 방금의 행동으로 자신의 수준을 내보였다.

그 모습을 본 문지기들은 이제야 블라드가 여태껏 보아왔던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백작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러 온 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개 기사라 할지라도 백작님의 대답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북부에서부터 시작된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땅에 꽂혀있는 깃발의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블라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했다.

흩날리는 깃발 속 새겨져 있는 가문과 단체들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 가운데서 문지기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식이 하나 있었다.

“용······살자.”

“이런······.”

문지기들이 북부 가문의 문장 모두를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의 깃발 안에는 그들의 눈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표식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대륙 어디에 있다 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 대답을 기다리겠다.”

불을 뿜고 있는 용의 고개 아래로 짙게 그어진 선 하나.

용살자의 표식.

그 표식을 알아본 문지기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비츠카야 백작령 안에서 자그마한 북부의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유 없는 무시와 차별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증명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택 앞에 서 있는 기사는 가장 완벽했던 피로 스스로를 증명한 사람이었다.

깃발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기사의 푸른 눈동자는 굳건할 뿐이었다.

※※※※

쟁반 가득 쌓여 있는 야채와 과일들.

그 위에 듬뿍 뿌려진 소스가 형편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이가 몇이라고?”

“올해로 18살입니다.”

한참 식사를 하던 중이었던지 비츠카야 백작의 앞에는 산더미 같은 샐러드들이 쌓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으로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꾸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8살인데 용을 잡았다고?”

“그때 당시에는 17살이었습니다.”

“······허.”

가장 빠른 북부의 용. 린드부름.

비츠카야 백작은 자신의 앞에 있는 어린 기사가 그것을 잡아냈다는 것에 깊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표식은 진짜인데.’

명성은 헛된 것이나 명예는 어디서나 그 빛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애송이 기사가 들고 온 깃발에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명예로운 표식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저 표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살 기사단의 허락이 있어야만 할 터.

“그 표식의 사용을 누가 허락했는가?”

블라드는 들려오는 물음에 자신을 바라보는 중부의 영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깃발에 새겨져 있던 문장과 표식은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백작은 끊임없이 용살자의 표식에 관해 물어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북부의 영향력은 이곳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용살 기사단장인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경입니다.”

그리고 용살 기사단의 위용이 중부를 아우르고 있다는 것까지.

“미르셰아······용살 기사단장.”

블라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하나에 백작뿐만 아니라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 말이 거짓일 경우 너는 여기서 죽는다.”

미르셰아의 이름을 들은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드에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감히 북부의 뜨내기 주제에 드라굴리아 가문과 용살 기사단을 거론하다니.

감히 사칭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이름이 들려오자 비츠카야 백작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 안에 깃든 귀족의 푸른 피가 블라드를 사정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백작님. 저는 분명 린드부름을 죽였고 그 모습을 미르셰아 경이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백작의 날카로운 경고조차도 태연히 받아넘길 뿐이었다.

거만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블라드의 자세는 비츠카야 백작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누가 키웠는지는 몰라도 물건을 만들어놨군.’

백작이라는 작위가 가지는 압박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애송이 기사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설령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인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 마법사를 빌리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쇼아라에 있을 저의 주군께 급한 소식 하나를 전하고 싶습니다.”

임무 중 전보를 빌리러 오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있는 일이기는 했다.

만약 블라드가 북부가 아닌 중부의 기사였다면 백작은 흔쾌히 수정구를 빌려주었을 것이다.

“무슨 일로 전보를 쓰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꽤나 급한 일 같아서 말이지.”

“······.”

그러나 북부의 기사가 중부, 그것도 동쪽 부근에 자리 잡은 영지까지 내려와 전보를 빌린 일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비츠카야 백작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군주로서의 의무 때문에라도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가 무슨 소식을 전하려 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자가 전하고자 하는 급한 소식은 분명 중요한 일일 테니까.

“······며칠 전 도브레치티의 숲에서 사특한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트롤의 형상이었고 죽여도 죽지 않았습니다.”

내막을 말하라는 백작의 말에 블라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굳이 여기서 말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알려진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일 것이다.

악하고 사특한 존재를 경계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죽여도 죽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북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정체 모를 것이 서서히 기지개를 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웅성거리던 로비가 사특한 존재를 설명하는 블라드의 말에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만큼 흑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죽지 않는 놈이 어디 있었다고?”

“달마티아 가문의 영지인 도브레치티입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바로 이곳 타노보이죠.”

나의 일도 있지만, 너희에게도 경고해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비츠카야 백작은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북부에서 온 손님에게 수정구를 빌려주어라!”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의 눈빛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백작은 재빨리 블라드의 신분을 북부의 불청객에서 귀한 손님으로 격상시켰다.

일개 기사에게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백작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남자였다.

“감사합니다.”

“밖에 세워둔 것은 미안하게 되었네. 요즘은 자리를 구하러 오는 기사들이 많아서 말이지. 자네도 그런 기사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었네.”

백작의 신분이었지만 직접 사과를 구하는 태도를 보며 블라드 또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빠른 태도 전환이었으니까.

“이해합니다. 백작님.”

“그래. 어서 보고하러 가보게.”

깔끔한 인사, 교육받은 자세.

북부에서 왔으나 중부의 태도가 깃든 블라드를 보며 백작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백작은 그렇게 블라드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눈에 새겨두고 있었다.

“당장 알아봐라.”

“네. 지금 당장 도브레치티에 사람을······.”

“그거 말고!”

블라드가 나가고 어느새 조용해진 로비.

그 위에서 비츠카야 백작의 작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문밖에도 없을 블라드를 의식하는 백작의 목소리가 긴박했다.

“저 자식이 진짜 용살자인지. 바예지드의 기사인지 알아내란 말이다!”

“네, 넵!”

일의 우선순위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단장.

그 모습을 보는 백작의 눈빛이 매서웠다.

“다들 나가봐!”

어서 알아보라는 듯 손짓까지 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백작의 모습에 로비에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빠릿한 모습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비츠카야 백작의 성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하!”

이제야 혼자가 된 백작은 앞에 놓여 있던 샐러드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건방진 데다가 당당하기까지 하군.”

갑작스러운 불청객 때문에 이제야 늦은 식사 자리에 앉은 백작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할 만한 실력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백작이 들고 있는 은수저 위로 하나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백작의 뇌리에는 깃발에 새겨져 있던 용살자의 표식이 선명했다.

※※※※

“엄청 비싸네······.”

난생처음 보내보는 전보였다.

마법적인 술식을 이용해 먼 곳으로 소식을 보내는 전서는 분명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얼마나 비싼데 그래?”

“한 글자당 1골드라던데. 멀면 더 비싸고.”

“······몇 글자를 썼는데?”

고트는 블라드의 설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달마티아 백작에게 갖은 수단을 다해 뜯어낸 비용이 겨우 10골드 남짓.

그러나 방금 블라드의 말대로라면 겨우 열 글자나 보내면 홀랑 날아가는 돈이라는 말이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말라던데.”

“아이고······다행이다.”

비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백작의 마법사는 전보를 특정 장소에 보내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해당하는 파장 번호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난생처음 시도하는 전보에 대해 블라드가 알고 있을 리가 만무.

결국, 백작의 마법사는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이 직접 쇼아라에 해당하는 번호를 알아보아야만 했다.

“그냥 아무 마법사만 찾아갔으면 손 놓고 있을 뻔했네.”

“······.”

고트의 말에 머쓱한 기분이 든 블라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저택의 복도를 걸어갔다.

곳곳에 새겨져 있는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무슨 기사야 기사는.’

그냥 무턱대고 전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알아야 하는 지식과 상식들이 있었다.

아마 쇼아라에 가만히 붙어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기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검만 다룰 줄 안다고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여기에서의 시작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백작님과 안면을 터놓은 건 잘한 거 같아.”

자책과 상념에 빠져 점점 굳어져 가는 블라드의 얼굴을 보며 고트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려 애썼다.

직접 검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이었기에 이런 역할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고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잠시 생각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방금의 말에 대해 되물었지만 고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위에 있는 장식물들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게 뭔데.”

깊은 생각에 빠져 여태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저택의 조각과 장식품들.

비록 이런 사치품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문외한인 블라드가 보기에도 상당히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장식들이었다.

“엘프들이 선물한 거라고 하더라고.”

블라드가 백작을 만나는 동안 고트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기꾼은 언제나 주위 동향에 민감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여기 시종들한테 물어보니까 엘프들은 아무나 자신들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는다던데.”

중부에서도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영지 비츠카야 백작령.

예전에는 도브레치티만큼이나 시골 영지나 다름없던 곳이었지만 이번 영주 대에 들어서 평범한 무역의 거점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백작님만큼은 어떻게 교역로를 뚫어냈다는 거 아냐. 다시 말해 엘프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거지.”

“······.”

블라드는 들려오는 고트의 말에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으나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벽에 새겨진 벽화 중 한 곳을 만져보았을 뿐이었다.

블라드의 손이 닿은 곳.

그곳에는 평범한 인간이라 하기에는 귀가 너무 기다란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1화 10

안개 속의 남자 (1)

목소리의 세계는 색이 진한 세계.

그 세계를 통해 보았던 알리시아의 호박석 안에는 가을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너른 밀밭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

블라드는 붉은 황혼 속으로 떨어지던 낙엽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강렬했으며 아름다웠고 또한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던 풍경이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보이네.”

블라드는 왼쪽 눈을 감고는 손잡이 끝에 박혀 있는 호박석을 바라보았다.

비록 목소리의 세계에서만큼 진하고 명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나무의 모습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어느새 혼잣말이 입에 붙어버린 블라드는 침대 위에 앉아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이제 더는 그의 말에 대답해주는 존재는 없었다.

오직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푸른 달빛만이 블라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을 뿐이었다.

빠직-

감고 있던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 자그마한 번개가 튀어 올랐다.

블라드는 목소리가 좀 더 깊은 세계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차마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어본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좀 더 깊고 넓은 세계에서 다시 만나자고.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방, 블라드의 눈에는 하얗게 내리치는 번개 한 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어떠한가?”

야채와 과일이 가득한 상을 물린 비츠카야 백작은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엘프들이나 먹을 건강한 식단과 함께하는 그였지만 정작 식사를 마친 그의 얼굴에는 잔뜩 찌푸린 주름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블라드라는 기사가 용살자인 것은 확실했습니다.”

일에 대한 확인은 두 번 세 번해도 모자라다.

특히 수상한 인물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면 더욱더.

“그리고?”

“······실력 또한 확인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던 저희의 기사 중 블라드라는 기사에게 대적할만한 기사는 없었습니다.”

대련을 가장해 블라드에게 들이민 기사만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중 셋은 당분간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고 말았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목이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자네라면 어떠한가?”

기사단장은 마치 도발하듯 물어오는 백작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십중팔구는 제가 승리할 겁니다.”

“······열 번 싸우면 한두 번은 질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비츠카야 백작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기사가 얼마만큼의 황금을 받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18살짜리가······.’

젊었을 적, 나름 명성을 날리던 자신의 기사단장도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오러도 쓰지 못하는 쭉정이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경비병들 목이라도 매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네?”

진짜배기 기사였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차가운 밖에다 세워뒀을 정도로 첫인상은 처참했으니 쉽게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좀 깨어있는 놈이라면 좋을 텐데······.”

기사란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

자신이 한 행동은 분명 무례했으나 아직 기회는 있을 터였다.

백작은 그 어린놈의 기사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블라드는 자신의 앞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리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영롱한 초록의 빛.

찻잔의 밑바닥까지 비쳐보이는 차(茶)의 색깔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무엇을 우려냈는지는 몰라도 짙은 풀잎의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와 눈까지 시원해지게 했다.

“북쪽에서는 이렇게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뭇잎 우려낸 걸 마실 바에야 술병을 집어들겠죠.”

말은 퉁명스럽게 했어도 시선만은 차에서 떼지 못하는 블라드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미개한 북부인이라 할지라도 이 차를 본 순간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프들의 차(茶)일세. 동쪽 끝에 있는 숲에서 따와 특별히 가공한 물건이지.”

“엘프······.”

블라드는 백작의 입에서 엘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혀로 입술을 쓸어내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거래를 하는 도중에는 원하는 것을 내비쳐서는 안 될 것이다.

쇼아라의 장미, 마르셀라가 그렇게 말해주었었다.

“우리 영지의 주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엘프들의 특산품을 다루는 일이지. 아무래도 중앙에 계신 분들은 엘프들에 관련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셔서들 말이야.”

그동안은 시골의 한미한 가문이나 다름없었던 비츠카야 백작 가문이었으나 현 비츠카야 백작이 작위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는 몰락해가는 가문을 위해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엘프들과 인간들을 연결해주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자네 앞에 있는 차는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싸게 취급받고 있지.”

“······.”

엘프들은 장수하는 종족이며, 그들의 신비로운 생태는 중앙 귀족들에게 충분히 호기심을 끌어낼 만하였다.

당장 블라드 앞에 놓여있는 차만 하더라도 수명을 늘려준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까.

“황금이라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겁니까?”

“정말 수명을 늘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에 좋은 것은 확실하지. 특히 기침에는 특효약이랄까.”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엘프들의 차는 수명을 늘려주는 신비한 약초가 아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금발의 기사는 엘프들의 차와는 달리 소문대로 정말 용을 죽인 기사였으니 진짜를 대하는 백작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챙겨드릴까?”

블라드는 백작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몸에 좋을뿐더러 기침에는 특효라는 말에 잠시 딴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제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겠습니까?”

블라드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백작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백작이 자신을 부르고, 호의를 보여주려 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연 북부의 기사들은 호탕하기 그지없군! 내 그것이 마음에 드네!”

백작은 블라드가 자신의 제안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북쪽에서 왔다고 하길래 꽉 막힌 놈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용까지 잡았다는 자네의 실력을 높이 사네. 그래서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수작은 얄팍하고 행동은 변덕스럽다.

그러나 서로가 내어줄 것이 있다면 손을 잡는 것을 거리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근래 교역로에 숨어 나의 물건을 약탈하는 놈이 있어. 참 골치 아프지.”

“산적입니까?”

블라드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맛이 없었다.

“아마 산적은 아닐걸세.”

비츠카야 백작은 찻잔을 든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부의 기사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실로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상행을 호위하던 내 기사들이 다 나가떨어졌거든.”

어쩌면 치부일 수도 있겠으나 백작의 말에는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무시하던 기사에게도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사들까지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골치가 아프다고 하는 걸세.”

기사들까지 어찌 할 수 없었다는 말에 블라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련을 통해 가늠해봤던 비츠카야 기사들의 실력은 분명 크게 대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의 대련을 통해 바예지드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실감하게 될 정도였으니까.

“백작님의 기사들도 감당하지 못했는데 저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블라드는 앓는 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눈앞의 백작과 마찬가지로 뒷골목 출신 기사는 자신의 값을 높이기 위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백작은 미소 한 번으로 블라드의 허튼 수를 잘라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리고 린드부름의 살해자.”

“······.”

“산 로지노뿐만 아니라 북부 여러 가문의 인정을 받은 자네라면 충분히 해줄 거라고 나는 믿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자그마한 검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일부러 조금 열어놓은 주머니 안에는 반짝이는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체 모를 약탈자를 물리쳐만 준다면 더한 것도 내어주지.”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네.”

비츠카야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마르지 않는 황금줄이 있지만, 정체 모를 약탈자는 바로 그 줄을 틀어막고 있었다.

지금이야 버틸 만하지만, 이 줄이 계속해서 틀어막힌다면 결국은 자신의 목줄까지 쥐어잡히게 될 것이다.

“잠시만이라도 쫓아만 준다면 만족하네.”

눈앞의 애송이가 아무리 용살자라 한들 중부에는 이만한 실력을 갖춘 기사는 여럿 있다.

완전히 해결해준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어차피 싼 맛에 쓰는 것이니 진짜 고명한 기사를 초빙해올 때까지 버텨만 주어도 좋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블라드는 이제야 본심을 비춘 백작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대신 저는 금화보다는 다른 것을 받고 싶습니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열려있는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만을 꺼내고는 조용히 백작에게 되돌려주었다.

“······나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나?”

가치란 상대적인 것이다.

백작에게 있어 금화란 넘치도록 많은 것이지만 블라드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방랑하는 기사로써 넓은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뒷골목 진창에 서 있을 때도 블라드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더러운 시궁창에 적셔지더라도 소년의 영혼만큼은 밝은 것을 바라보고자 노력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엘프들의 도시에 한 번 안 들어가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에게 이름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저 앞에 있는 금화 주머니보다도 무거운 것이었다.

“몸에 좋다는 엘프들의 차도 한 상자 주시면 좋구요.”

지금도 쇼아라에서는 데운 와인으로 기침을 억누르는 사내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의를 바치겠다 맹세한 사람이었다.

요제프의 가녀린 기침 소리는 언제나 블라드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었다.

“······엘프들의 도시에 들어가고 싶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요구하는 블라드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었다.

역시 흔들리지 않는 진짜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반짝이는 황금으로는 유혹되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 조건이라면 단순히 정체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백작은 곤란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록 블라드는 쉽게 말하고 있었지만 고작 사람 하나 넣어주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엘프들과의 교류는 가문의 미래와 자신의 평생을 걸쳐 뚫어낸 작은 구멍이었고 그렇기에 블라드가 요구한 보상은 백작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엘프들의 도시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 지금, 백작에게서 어떻게든 협조를 얻어내야만 했다.

“그 정체 모를 약탈자가 다시는 백작님의 교역로를 탐내지 않게 말입니다.”

중부의 백작과 북부의 기사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서로가 내어줄 것만 있다면야 쓴 차를 마셔도 웃을 수 있고 무시하는 대상 앞에서도 호의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좋네.”

그것이 바로 거래이니까.

맞잡은 둘의 손이 금화 주머니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

어두운 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

숨 쉬는 것만으로 축축한 짙은 안개 속에서 마부는 몸을 떨었다.

마부가 몸을 떠는 이유는 단순히 분위기가 으스스해서만은 아니었다.

“으, 으으······.”

바로 앞에서 마치 죽은 듯 다리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들.

그들 사이로 꺾여져 있는 비츠카야의 깃발이 나뒹굴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모두가 백작이 골라 보냈던 기사들이었다.

“엘프들의 물건이 안에 담겨 있나?”

“히, 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빛 두건을 뒤집어 쓴 정체 모를 남자.

마치 쇠를 긁는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거부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맞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마부는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짙게 깔린 안개가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으니까.

끼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마부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두건을 뒤집어 쓴 남자와 마주칠까봐서.

짙은 안개 속 가느다란 돌다리 위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와 함께.

희미한 불빛마저도 다리 위에서 사라지자 곧 돌다리 위에는 다시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2화 13

안개 속의 남자 (2)

2대의 마차, 30명은 넘는 인원.

짐을 싣고 내릴 짐꾼들보다도 검을 찬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상행은 누가 보아도 기이한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기사들의 흉흉한 눈빛까지 합한다면 차라리 어딘가를 쳐들어가는 모습이나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이러려고 저를 데려오신 겁니까?”

“······뭐 이래저래, 겸사겸사.”

따가운 뒤통수를 긁던 슈테판은 블라드의 성의 없는 대답에 그만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의뢰비를 크게 제시하더라니, 이런 함정이 숨어 있었다.

“저희가 이 도시에 자리 잡은 지 이제야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눈 밖에 나겠군요.”

“백작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겠다고 말씀하셨네.”

“그렇다 해도 위의 분들이 살펴보지 못하는 그런 영역이 있기 마련이죠.”

그 말과 함께 슈테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블라드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 비츠카야의 기사들이 있었다.

“한탕 크게 하고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용병들의 생리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맞는 말을 틀린 상황에서 말씀하시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슈테판은 이제 자신이 투덜거려도 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이 어수룩한 기사는 이미 비츠카야의 기사들과 크게 한판 벌인 뒤였고, 자신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블라드에게 고용된 뒤였다.

다시 말해 블라드가 만들어 놓은 원한을 같이 덤터기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내 몫도 조금 떼어줄 테니까 잘해보자고. 앞으로도 이만한 건수는 별로 없을 거야.”

“······미치겠구만.”

블라드는 일부러 슈테판의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체하였다.

그가 내뱉는 불평불만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슈테판은 충분히 그만한 값을 하는 사내였다.

‘데려오길 잘했네.’

실력 있는 용병들답게 능숙하게 상행을 통제하는 가시나무 용병단.

마치 군인처럼 빠릿하게 움직이는 그들 덕분에 블라드는 수월하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역시 비협조적일 비츠카야의 기사들을 억지로 다루기보다는 차라리 용병들을 고용하겠다는 생각은 옳은 선택이었다.

“이 상태라면 3일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좋아.”

블라드는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버릇처럼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어루만졌다.

목소리가 남겨준 유일한 단서.

그 안에 새겨진 풍경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정령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엘프들뿐일 것이다.

‘······3일 후라.’

신비에 감춰져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인 엘프라는 종족.

블라드는 앞으로 3일 후면 그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가슴이 뛰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심장의 떨림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시작은 목소리의 이름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의 여정은 분명 블라드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었다.

※※※※

3일이라는 여정의 마지막 날.

빽빽이 들어선 나무 때문인지 들이마시는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없어지는 길 때문에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블라드 경, 지금부터는 저희가 인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기사가 보내는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블라드는 어디까지나 정체 모를 약탈자를 막기 위해 따라왔고, 이곳까지 무사히 상행을 인솔해왔으니 임무의 절반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셈이었다.

“역시 들은 대로 차를 실은 마차만 습격하는 모양이야.”

“음.”

자연스레 빠져나와 행렬의 뒤로 자리 잡은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고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의 말대로 여태까지의 여정 중 단 한 번도 무언가의 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찻값을 지불할 은괴들이 실려있는 마차였음에도 말이다.

‘경계하는 건가?’

어쩌면 많은 무장인원이 부담되어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약탈자는 차가 실려있는 마차가 있을 때만 나타난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길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군요.”

생각을 마친 블라드는 슈테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숲속, 그 사이를 헤치듯 세워진 작은 건물들 몇 개가 있었다.

마치 벌목꾼들이 기거하는 캠프같이 생긴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들이 꽤 견고해 보였다.

“저기가 거래할 장소인가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거래는 허락하지만 우리들의 숲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엘프들은 인간들에게 쉽사리 자신들의 영역을 내어주지 않았고 비츠카야 백작은 배타적인 엘프들의 태도에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비록 지금 보이는 건물은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백작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엘프들이 먼저 와 있는 모양이군요. 블라드 경은 잠시 짐을 지켜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비츠카야의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블라드와 엘프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이해할만한 행동이기도 했다.

엘프들과의 인맥은 비츠카야 가문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귀중한 일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판단일 것이다.

물론 블라드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엘프라는 거 한번 보고 싶었는데······.”

블라드는 고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탔다.

춥다기보다는 시원한 바람이 블라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별수 있나. 지켜야지. 다들 경계해.”

기사가 좋은 점은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

고트와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린 블라드는 다리를 꼬고는 지붕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사람이 가득한 도시에서 살아온 블라드에게 있어서 지금 같은 청량한 공기는 처음이었다.

북부의 평원에서도, 칸노르 가문의 목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던 그런 공기였다.

※※※※

자그마한 통나무 집 안,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둔 남자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지급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쳐지는 상자 하나.

상자 안의 얄팍함을 알아차린 사내의 귀가 날카롭게 세워졌다.

“약속이 다르군.”

작았지만 크게 울리는 목소리.

비츠카야의 기사는 그만 절로 침을 삼키고 말았다.

감히 가늠하기 힘든 깊은 울림이 그 목소리 안에 있었으니까.

“투존의 잎을 차로 만드는 과정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한둘의 노동력이 들어가는 게 아니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디스 님. 하지만······.”

바로 앞에 의자가 놓여 있었으나 기어이 서 있는 엘프들.

최대한 빨리 지금의 대화를 마치고 싶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비츠카야의 기사는 지금 자신들의 교역로를 틀어막고 있는 정체불명의 습격자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대금의 지불이 조금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함께.

“······차는 잘 팔리고 있나?”

협상이 엎어질 수도 있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엘프들이었으니 나름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차가 잘 팔리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충분히 대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겁니다.”

“중앙 말고도 다른 지역들은 어떻지? 그쪽도 우리들의 차를 좋아하나?”

“중앙의 귀족들 사이에서 충분히 화제가 되고 있으니 분명히 다른 곳의 귀족들도 좋아할 겁니다. 유행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바라디스라 불린 엘프는 기사의 설명을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의 지급이 늦어서 역정을 낼 줄만 알았더니만 엘프들도 지금의 사업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디 우리가 다른 영주를 찾게 하는 수고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얼마든지 달리 거래할 영주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협박과도 같은 바라디스의 마지막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있던 상자가 엘프들 쪽으로 건네졌다.

비록 평소의 반밖에 되지 않는 대금이었으나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말씀하시지요.”

이제야 협상이 끝났나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기사는 어느새 저 밖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바라디스를 보았다.

나무로 막힌 벽이었으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마치 밖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지금 자네들과 같이 온 녀석은 뭐지?”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마차 위에 누워있는 녀석 말이야.”

“······지금 마차 위에 누가 누워있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에게 차갑게 시선을 돌린 바라디스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밖에서부터 전해지는 기이한 기운을 느껴보았다.

무어라고 확실히 말하기 힘든 어지러운 기운은 분명 자신의 감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들었을 텐데 내가 차 한 잔 대접하지.”

“네?”

“따로 대금을 청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비츠카야의 기사는 갑자기 살갑게 자신을 대하는 바라디스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엘프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기사가 아닌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밖에 있는 자들도 불러와서 같이 마시지.”

낯설지만 낯익은 기운.

숲의 수호자는 무언가가 잔뜩 섞여 있는 저 수상한 기운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잠들진 않았지만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흩날리는 낙엽들의 색깔이 진했다.

“······뭐야. 이거.”

차가운 겨울에 눈을 감았으나 가을의 잔 숨결이 느껴지는 언덕 위에서 눈을 뜬 블라드는 당황하고 말았다.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풍경 속에서 블라드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흔들리는 밀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닌 거 같은데.”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자각했다.

이제는 기억으로밖에 의지할 수 없는 호박석 안의 풍경.

목소리가 가본 적이 있다던 풍경이 있는 곳이었다.

블라드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듯 굳건히 서 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꽃?”

그 나무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단풍나무에는 필 리가 없는 꽃이었으나 분명히 꽃들이 가득했다.

저물어 가는 낙엽들 사이로 자신들의 모습을 숨긴 색색의 꽃들이.

흔들리는 바람을 따라 그곳에 있던 꽃 중 하나가 낙엽과 함께 블라드에게로 떨어져 내려왔다.

새하얀 백금색을 가진 꽃송이였다.

“······미치겠네.”

떨어질 때는 꽃이었으나 내려올 때는 나비가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블라드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하늘 노을을 타고 내려오는 나비의 날갯짓이 잔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저물어 가는 풍경 속에서 오직 한 송이의 나비만이 제 빛을 갖춘 채 그렇게 블라드의 콧잔등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날개를 접는 나비를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았다.

심상을 퍼 올릴 때는 왼쪽 눈으로.

현실을 떠올릴 때는 오른쪽 눈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세계의 새겨진 규칙을 이해한 블라드는 천천히 감은 눈을 통해 자신이 눈을 감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대장······대장!”

마치 꿈을 꾸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고트의 목소리.

물결치듯 여전히 흔들리는 잔상 속에서 마침내 현실로 발을 디딘 블라드.

“······.”

감은 눈을 뜬 블라드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산 너머로 넘어가는 황혼의 마지막 숨결이 소녀의 백금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거 뭐야?”

하얀 뱀의 가호가 깃든 갑옷,

“이거랑.”

두더지의 가호가 깃든 알리시아의 호박석.

“그리고 이거.”

그리고 자신의 콧잔등을 가만히 누르는 하얀 손가락.

쫑긋거리는 귀와 함께 금색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뜬 이곳에서도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녔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3화 10

안개 속의 남자 (3)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테이블 위.

바로 앞에서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금색의 눈동자가 부담스럽다.

아까와는 달리 얼굴은 무표정하였으나 소녀의 반짝이는 눈만은 환상 속에서 날아다녔던 나비와 같이 빛나고 있었다.

‘왜 그러는데.’

그 눈동자와는 반대로 냉막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엘프 사내.

바라디스라 불린 엘프의 눈빛은 소녀와는 정반대로 어딘가가 매섭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될 것을 건드린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당신은 또 왜 그러는데.’

온도가 확연히 다른 두 엘프의 시선을 마주하며 블라드는 담담한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둘 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여태껏 상상했던 엘프들의 모습이 조금씩 깨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차는 언제 나오는 거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기사와 엘프들.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블라드는 차라리 맛대가리 없는 차라도 빨리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쏠리는 시선을 받아넘기기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이들의 숨결을 지킨 기사.”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바라디스였다.

“이게 무슨 뜻이지?”

바라디스의 남색 눈동자가 블라드의 갑옷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 끝에 매달려 있는 호박석도 함께.

비록 입으로는 갑옷에 새겨진 글귀를 물어보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분명 그 이면에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북부 교구 산 로지노가 새겨준 것입니다.”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반응을 보며 테이블 밑에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까 소녀와 마찬가지로 바라디스라는 엘프 또한 정령이 깃든 물건들을 알아보고 있었으니까.

정령과 호박석에 관해 엘프들에게 물어보겠다는 생각은 과연 틀리지 않았다.

“사특한 존재와 싸우던 임무 중에 나름의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희열과는 다르게 블라드의 목소리는 차분할 뿐이었다.

고작 하나의 성과로 일희일비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 이 자리에 요제프가 있었다면 분명히 이렇게 했을 것이다.

“사특한 존재와 싸웠다라······. 훌륭하군.”

두 명의 엘프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겉모습은 전혀 닮지 않았으나 하는 행동만큼은 비슷한 바라디스와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둘이 오랫동안 같이 움직였던 사이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침 차가 준비되었군.”

오두막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향긋한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엘프 병사들이 들고 오는 찻잔에서부터 나는 향기였다.

“종족을 떠나 사특한 존재와 대적했던 기사에게 경의를 표하네.”

“감사합니다.”

표정은 여전히 냉정했으나 보이는 호의만큼은 확실했다.

은괴를 받고 넘길 정도로 귀한 차를 대접할 정도라면 적어도 밉보이지는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잘하면 되겠는데.’

블라드는 이곳까지 따라온 목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비츠카야 백작의 일을 도와 이곳까지 온 이유는 어디까지나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기 위함.

지금 같은 좋은 분위기가 계속 이어만 진다면 어쩌면 백작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초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향이 좋군요.”

블라드는 청명한 녹색 빛을 내는 차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비록 입에는 맞지 않는 차였지만 지금의 한 모금으로 좋은 인상을 남길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그랬어야만 했다.

“안돼.”

그러나 블라드는 찻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너는 마시면 안 돼.”

블라드가 잡은 찻잔을 다급히 잡아채는 하얀 손가락.

간격이 넓은 테이블 때문에 아예 엎드리다시피 한 소녀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

“······.”

갑작스러운 소녀의 돌발 행동에 오두막 안의 공기가 멈추고 말았다.

엘프들은 물론이거니와 비츠카야의 기사들도 지금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만 돌같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왜?”

얼마 남지 않은 폐의 공기를 끌어내어 간신히 내뱉은 블라드의 한 마디.

그러나 소녀는 얼굴을 파묻은 채 애써 시선을 피하고는 조용히 블라드의 찻잔을 끌어올 뿐이었다.

테이블 끝에서 바둥거리는 소녀의 양발이 애처로워 보였다.

※※※※

티타임은 끝났다.

태어나 처음 겪어본 엘프들과의 만남은 혀끝에 맴도는 맛만큼이나 썼고 블라드는 그 충격에 지금도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대장, 진정해.”

“나는 잘못한 게 없거든.”

멍해진 블라드의 눈빛을 보며 고트가 진정시키려 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공허할 뿐이었다.

“그래도 정신 차려야 해. 엘프들이 아직도 대장만 보고 있잖아.”

기이한 분위기였다.

엘프들은 블라드를 경계하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마치 신기한 짐승을 바라보는듯한 눈빛이었다.

“게다가 저 꼬맹이는 아무래도 신분이 높은 아이인 것 같아. 아까 마차 위에 올라탈 때도 옆에서 시중들던 엘프들이 있었단 말이야.”

그중에서도 블라드를 가장 열렬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소녀가 있었다.

바라디스라는 엘프의 허리춤을 붙잡고는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 소녀.

눈빛은 무언가 간절했지만 정작 하는 행동은 자신을 밀어내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한숨을 푹 쉬고 말았다.

“어쨌거나 엘프들의 숲에 들어가는 건 그른 것 같다.”

비록 자신이 한 실수는 아니었지만 블라드는 방금의 만남에서 무언가 삐끗하고 말았다.

가뜩이나 인간들을 거부하는 엘프들이니 지금의 상황을 좋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갑시다. 너무 늦기 전에 출발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절벽을 건너야 한다는 비츠카야 기사들의 말에 블라드는 힘없이 누아르의 위로 올랐다.

“잠깐.”

이제 돌아가려 하는 일행의 뒤로 바라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녀와 고개 숙인 채 듣고 있는 바라디스.

소녀의 말을 듣고 있던 바라디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를 멈춰 세웠다.

“자네를 이렇게 보내기가 미안하군.”

웃는 것인지 화내는 것인지 모를 바라디스의 기묘한 표정.

블라드는 차라리 아까의 냉막한 인상이 더 나은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의······귀하신 분이 자네에게 저지른 실수를 부디 용서해 주시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아까 마차에서도 무언가 일이 있었다고 들었네.”

“······.”

무언으로 긍정하는 블라드를 본 바라디스는 피곤함이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블라드에게 악수를 건넸다.

“조만간 한 번 다시 봤으면 좋겠군. 오늘의 무례도 사과할 겸.”

블라드는 가만히 자신에게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엘프들에게도 악수가 같은 의미인가?

“엘프들만의 초대 방식이지. 우리들은 인간들과는 달리 쉽사리 악수를 청하지는 않거든.”

“그렇군요.”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비츠카야 기사들의 숨죽인 경악성이 들려왔다.

자신들은 오랫동안 공들여 행한 일을 단 하루 만에 허락받은 블라드를 보며 놀라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저를 초대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저 멀리서 조그맣게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자고 있던 사람의 위로 올라타 환상 속으로 빠뜨렸다.

차를 음미하려던 사람에게서 찻잔을 빼앗았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다음에 보자며 엘프들의 숲으로 초대를 하고 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여태껏 보았던 여자 중 가장 변덕스러운 소녀의 행동을 보며 블라드는 잠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소녀의 행동이 수상하다 할지라도 내밀어져 있는 손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견문을 넓힐 소중한 기회가 되겠군요. 꼭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꼭 한번 와주었으면 좋겠군.”

붙잡은 손 위에서 두 남자의 시선이 마주치고 있었다.

바라디스의 악수를 보며 잠시 주저하던 블라드의 모습에 긴장하던 비츠카야의 기사들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꼭 그 호박석도 가지고 오게.”

“네?”

“우리의 귀하신 분이 그것에 관심이 많으시네.”

손을 놓은 바라디스는 다시금 냉막한 인상을 지은 채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자네에게도 그렇고 말이지.”

“······.”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말을 들으며 저 멀리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등 뒤에 숨어 빼꼼히 내민 고개 사이로 흔들고 있는 손이 마치 다음에 보자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결국, 이름도 못 물어봤네.”

블라드는 흔들리는 누아르의 등 위에서 이제야 떠올랐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우당탕탕 굴러가는 시간이었기에 마땅히 물어봐야 할 것을 물어보지 못했다.

“이름은 왜?”

“나중에 볼 때 뭐라고 부르기는 해야 할 거 아냐.”

“하긴 엘프답게 이쁘기는 하더라. 조금만 더 크면 쳐다보기도 힘들겠던데.”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는 고트의 말을 들으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애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고 싶어?”

“그러는 대장은 도대체 몇 살인데?”

블라드는 받아치듯 물어보는 고트의 질문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이제 성인이 된 지 몇 달 안 된 사람이었다.

“······어쨌든 나는 어른이잖아.”

“걔도 어른일 수도 있지. 제미나보다는 성숙해 보이던데.”

치사하게 진실로 반박하는 고트의 말에 블라드는 가만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제미나를 예시로 드는 것은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엘프들은 애초에 나이 짐작이 안 된다고. 그렇게 보여도 어쩌면 백 살은 넘었을지도 몰라.”

장수족인 엘프이기에 감히 나이를 추측하기는 힘들었으나 블라드는 분명 금색 눈동자의 소녀가 어른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간간이 보였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은 분명 성숙한 인격체라 하기에는 모자라 보였으니까.

“이 부근입니다.”

일부러 다물어버린 입으로 대화를 끝낸 사이 비츠카야의 기사가 조심스레 다가와 보고하고 있었다.

‘두들겨 패는 것보다 효과가 좋네.’

어제까지만 해도 북부에서 온 뜨내기라 은근히 무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바라디스의 초대는 분명 그만한 효과가 있었다.

“여기서부터 절벽을 건너는 다리까지가 위험 지역입니다. 주로 이 부근에서부터 약탈자 녀석이 튀어나왔죠.”

블라드는 기사의 설명에 재빨리 지도를 펼쳐 들고는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스투르마에서 배웠던 지도 읽는 법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오면서 보았던 돌다리가 제일 위험해 보이기는 하더군요.”

“실제로 그곳에서 많은 마차를 잃었었습니다.”

블라드는 점점 떨어지는 해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제 곧 해가 떨어질 테니 가능하다면 자리를 잡고 싶었다.

“여기서 밤을 지새우고 떠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은 불가합니다.”

비츠카야의 기사는 이것만큼은 안된다는 듯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엘프들의 영역과는 다르게 이곳의 숲은 너무나 춥습니다. 최대한 빨리 타노보로 도착하지 않으면 찻잎이 얼어붙고 말 겁니다.”

엘프들은 투존이라는 차의 잎을 따서 말리기만 했을 뿐 그 외의 공정은 일절 진행하지 않았다.

그러니 빨리 타노보로 돌아가 찻잎들을 가루로 만들고 압축하여 한 덩어리로 만들지 않는 이상 투존의 잎들은 빠르게 얼어붙고 말 것이다.

“지금부터는 자는 시간까지 줄여서라도 움직여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각오했던 일이지만 올 때와 돌아갈 때의 조건이 너무나 달랐다.

그래도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 제안한 것이었지만 기사들의 반발이 너무 거셌다.

자칫하면 여태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상황이었으니 그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만은 했다.

“갑시다. 슈테판은 후미로.”

“알겠습니다. 기사님.”

자신은 가장 선두로, 가시나무 용병단은 행렬의 후미로.

비츠카야의 기사들은 마차의 양옆을 둘러싸게 만들어 진형을 갖춰놓은 블라드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기사만 6명인 지금의 행렬을 건드릴 간 큰 산적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온다면 분명 다른 목적이 있는 사람이야.’

아무리 엘프들의 차가 비싸다 할지라도 모든 일에는 치러야 할 비용이라는 것이 있다.

기사 여섯에 용병 열 명을 뚫고 차를 탈취하겠다는 사람은 분명 돈보다는 다른 것을 목적에 둔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점점 어두워지는 숲을 보며 블라드는 가만히 앞을 바라보았다.

저 앞, 절벽 사이에 걸쳐진 돌다리.

어둑해지는 하늘 사이에서 보니 더욱 앙상해 보이는 돌다리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처음에는 별빛인 줄 알았다.

어두운 밤이었고 절벽지대라 경사가 급격하다 보니 하늘과 땅의 경계가 분명치 않았으니까.

“크악!”

그러나 그 별빛이 빠르게 다가오는 순간, 블라드는 그 빛이 하늘에서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습격이다!”

“약탈자다! 약탈자가 찾아왔다!”

세차게 흔들리는 횃불, 울부짖는 말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행렬 속에서 블라드는 어느새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츠카야의 기사를 바라보았다.

‘······보지도 못했는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기사의 흉갑이 얼마만큼의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일단은 방진을······.”

“모두 달려라! 지금부터 다리를 빠져나간다!”

사방이 뚫려 있는 다리 위.

자연스레 진형을 갖추려는 기사들을 보며 블라드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블라드 경!”

“내 말을 따르시오!”

쓰러진 기사를 재빨리 안장 위에 얹은 블라드가 으르렁거리며 대답했다.

“여기서 멈춰서면 놈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니까!”

포식자를 이해하는 것은 오직 같은 포식자일 뿐.

굳이 기사 하나를 쓰러뜨려 경고를 보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행동일 것이다.

“달려! 다리를 빠져나간다!”

“다들 고삐 잡아!”

어두운 다리 위, 큰 소리로 블라드의 명을 반복하는 슈테판과 고트.

그리고 삽시간에 변해버린 블라드의 기세에 눌려버린 비츠카야의 기사들은 서둘러 말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었다.

퍼억!

파악!

“돌멩이가 날아옵니다!”

“횃대가 부서지고 있습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다리를 돌파하려는 블라드의 판단에 당황했는지 어둠 속의 약탈자는 서둘러 횃불을 꺼트리고 있었다.

검을 든 기사라면 능히 위협에 맞설 줄 알아야 하거늘.

그러나 뒷골목 출신의 기사는 도망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다.

“상관 말고 달려라!”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고는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나를 따라오면 된다!”

검 사이로 맺히는 블라드의 오러.

어두운 다리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빛을 따라 마차들이 삐걱대기 시작했다.

까앙!

‘어딜!’

이번에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돌멩이를 내려친 블라드는 재빨리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부르르 떨리는 검 끝이 방금 날아온 돌멩이의 위력을 짐작하게 했다.

‘한 명이야!’

여러 곳에서 날아와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었지만 분명 한 사람이 던진 것이 분명했다.

예민한 블라드의 귀는 어둠 속에서 바삐 움직이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잡아내었다.

‘온다!’

블라드는 이를 악물고는 다리의 끝을 바라보았다.

분명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체 모를 약탈자는 지금 자신들이 나아가려는 길목 앞에 서서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이대로 돌진한다!”

마치 성난 황소처럼 달려나가는 일행들.

가장 앞장서 있던 누아르의 이마 위로 자그마한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뚫는다!’

블라드는 이 기세 그대로 약탈자를 밟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지금 일행을 가로막고 있는 자는 분명 고수였으니 지금의 기세를 잃게 된다면 다시는 다리 위를 지나칠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기사들! 모두 습격에 준비······.”

블라드는 크게 외쳤지만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끝에서부터 마치 새벽의 빛을 받은 것처럼 밝아져 오고 있었으니까.

‘젠장!’

블라드는 순식간에 돌변한 약탈자의 기세를 느끼고는 재빨리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켰다.

오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러뿐.

이곳에서 오러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누아르!”

히이이힝-!

블라드의 외침에 트롤조차 꿰뚫어 버린 초원의 영혼이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그리고 의외성을 갖추기 쉬운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속도.

오직 예상을 벗어난 속도만이 지금 저 앞에 있는 남자의 일격을 틀어막을 수 있다.

“지금!”

여태껏 행렬과 열을 맞추던 블라드와 누아르가 기묘한 엇박자를 타고서는 재빨리 앞으로 뛰쳐나갔다.

여태까지 달려온 속도보다 서너 배는 더 빠른 속도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체 모를 사내의 눈이 커지고 있었다.

“뚫어!”

일격에 끝낸다.

목소리가 알려준 그 방법 그대로.

애써 감고 있는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부터 차마 담아내지 못한 하얀 번개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콰직-!

콰지지직-!

새벽의 빛과 하얀 번개.

서로 같은 색깔을 지니고 있던 빛들이 한 번의 맞부딪힘과 함께 다리 위에서 커다란 굉음을 만들어내었다.

※※※※

“······검의 길은 옳고 곧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뻗어나가야 한다.”

반쯤 찢어진 회색 두건.

그 사이로 보이는 하얀 머리와 주름 사이에서 붉은 피가 튀어 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을 여는 것은 의외성에 기반한 망설임 없는 일격뿐.”

“······쿨럭.”

블라드는 희미해지는 정신 사이로 저 멀리 떨어져 있는 검을 집기 위해 조금씩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윽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일격필살의 묘리다.”

“······뭐?”

멈춰선 마차들.

쓰러진 누아르.

그리고 땅바닥에 누워 정체 모를 사내를 바라보고 있는 블라드.

“너는 누구냐?”

새하얀 눈썹 사이로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는 누군데 황실의 검술을 쓰고 있는 거냐?”

빛과 빛이 사라진 어두운 절벽 위에서 안개가 자욱이 끼고 있었다.

같은 길을 걷고 있지만 서로를 모르는 두 사내의 시선이 어지러이 얽혀들어 갔다.

2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4화 21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1)

귀가 먹먹하다.

아무래도 처음의 부딪힘에서 무언가 잘못된 듯싶었다.

“누, 누아르······.”

가물거리는 시야를 잡고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는 누아르를 향해 걸어갔다.

히이이이힝-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검은 말.

다행히 기력은 쇠해 보였어도 어딘가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젠장.”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고 선 블라드는 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내려앉은 앙상한 돌다리 위.

이제 막 부서져 가는 갑옷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편들 사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좀 더 누워있지 그랬나.”

그리고 돌다리 위에 서 있는 한 사람.

마침내 남은 기사까지 쓰러뜨려 버린 정체 모를 남자는 블라드의 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블라드가 갈라버린 두건 사이에서 남자의 백발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물어볼 것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지.”

정체 모를 사내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었다.

단 한 번의 내지름을 위해 극단적으로 검을 잡아당긴 자세.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화살과도 같은 블라드의 자세를 본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

달빛 아래서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같은 듯 다른 검을 치켜든 채로.

※※※※

“수고했네.”

환한 빛이 내리쬐는 집무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화초들이 창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태양 빛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려운 일인데 잘해주었군. 정말 고맙네.”

블라드는 백작의 말을 들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명한 초록빛을 내는 엘프들의 차.

이 한 모금을 얻기 위해 일주일이 넘는 거리를 걸어왔다.

“쉽지 않았던 대결이라 들었네. 놈의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아쉽군.”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백작을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얼굴 위로 주름이 깊게 새겨진 남자.

본래의 나이보다 열 살은 늙어 보이는 몸뚱이에서 제 나이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뿐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운도 좋았던 거겠지.”

백작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과 함께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목을 기대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내가 그놈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를.”

백작은 마치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여태껏 도시의 주 산업이 정체 모를 한 명에게 위협받고 있었으니 그의 고충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백작을 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차가울 뿐이었다.

“제가 실패했다면 누구를 불러오실 생각이었습니까?”

“음?”

백작은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질문에 감았던 눈을 떴다.

“수준이 매우 높은 자였습니다. 붙여주신 백작님의 기사들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죠.”

블라드는 찻잔의 주둥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맑디맑은 찻잔 위로 자그마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겸손의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블라드의 찻잔으로 붉은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전투 속에서 수없이 얻어낸 상처 중 하나가 블라드의 손가락 속에 숨어있었다.

각오했던 일이었으나 다리 위에서 만난 사내는 백작이 말한 것보다 훨씬 터무니없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작의 의뢰는 시작부터 블라드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래서 기사단장을 파견하지 않으셨군요.”

백작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빼어난 실력을 가진 자신의 기사단장조차도 정체 모를 약탈자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언가를 책임지는 사람은 언제나 뒷일을 생각해놓아야만 하지.”

백작은 대답과 함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의 얼굴, 퉁퉁 부어오른 한쪽 눈.

그러나 초라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인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아마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덕분일 것이다.

“수도에 있는 용살 기사단의 기사들을 요청하고 있었네.”

백작의 대답에 찻잔을 어루만지던 블라드의 손가락이 멈췄다.

“우리의 전력만으로는 그놈을 밀어낼 수는 없었을 거야. 지금까지 파악한 그자의 실력은 그러했네.”

수도에 있는 용살 기사단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합당한 근거가 필요하다.

용이 나타났다거나, 아니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적이 나타났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

만약 블라드가 이번 일에 실패했다면 그 또한 하나의 근거가 되어 백작의 보고서에 적혔을 것이다.

이 만큼의 기사도 대적하지 못하는 상대니 부디 용살 기사단을 파견해 달라는 근거로 말이다.

“그래도 자네가 일을 해결해주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네. 용살 기사단의 기사들은 정말 비싸거든.”

백작은 그 말과 함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약속한 것보다 더 넣었네. 어쨌거나 마차를 무사히 끌고 와주었으니까.”

“······.”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그러나 그 주머니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미 엘프들의 초대까지 받았으니 내 추천서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그것에 대한 값도 들어있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있더라도 상관없다.

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금화만으로는 자신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 없을 테니까.

어젯밤 블라드는 돌다리 위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백작님.”

그럼에도 블라드는 백작이 내어주는 금화를 받아들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정확한 액수를 알아야만 나중에 백작에게 더 청구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을 기만한 대가를 말이다.

“북쪽에서 썩기는 아깝지 않은가?”

집무실의 손잡이를 붙잡은 블라드의 등 뒤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것 없는 북부보다야 이곳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나? 물론 값은 더 쳐주겠네.”

자신을 등용하고 싶다 말하는 비츠카야 백작.

그의 목소리가 뱀처럼 블라드의 목덜미를 차갑게 타고 올라왔다.

“도시에서 추방당했다고 들었네. 자네를 버린 주군보다야 알아주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나?”

자신을 버려진 개 취급하는 백작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찻잔을 들어 올리는 백작의 모습이 있었다.

“저는 신뢰할 수 있는 주군을 원합니다. 백작님.”

귀족의 피는 푸른색이다.

블라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참 아쉽게 됐군.”

어깨를 으쓱하는 백작을 뒤로 한 채 블라드는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직 김이 오르는 블라드의 찻잔은 조금도 줄어들어 있지 않았다.

※※※※

백작의 저택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조용히 도시 외곽을 향해 걸어갔다.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

쇼아라의 뒷골목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블라드가 걷는 골목은 충분히 빈민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너저분했고 어지러웠다.

블라드는 재빨리 망토로 갑옷을 감추고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뒷골목을 걸어갔다.

반듯한 기사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엉망인 불한당의 모습으로 변한 블라드를 보며 어둠 속의 누군가가 놀랐다는 듯 웃고 말았다.

툭-

약속한 장소에서 멈춰선 블라드는 곧 자신의 장화로 날아오는 작은 돌멩이를 느낄 수 있었다.

“······.”

보이지도 않았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날아오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을 뿐.

자그마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자신이 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번의 결투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툭-

투둑-

그렇게 블라드는 돌멩이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타노보의 빈민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어두운 곳.

각 도시의 정경은 모두가 달랐으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비슷해 보였다.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회색빛이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킬 줄 아는군.”

회색빛 사람들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어딘가의 막다른 골목.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듣기 싫은 쇳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빈민가, 어둠, 그리고 듣기 싫은 목소리.

그 누구라도 압박을 받을만할 요소들이었으나 정작 블라드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의미 없는 위협은 블라드에게 큰 감흥이 없었다.

코끝으로 와닿는 빈민가의 익숙한 냄새가 기사의 안에서 어느새 소년의 반항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이상한 소리 좀 그만 내시죠.”

“······그래?”

골목 끝 그림자 사이에서 멋쩍은 듯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아까 들려왔던 쇳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이게 다리 위에서는 잘 먹혔었는데 말이지.”

블라드의 핀잔과 함께 마침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

그는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정체 모를 약탈자였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그러려고 온 겁니다.”

검을 얹고 있는 손 모양까지도 비슷한 두 사람.

엉망인 얼굴의 기사와 얼기설기 꿰매놓은 회색 두건의 사내가 서로가 남긴 흔적을 보며 마주 서 있었다.

※※※※

“왜 내 이름을 안 물어보나?”

“물어봐도 안 알려줄 것 같아서요.”

블라드는 빈민가라면 으레 있는 노상 점포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했다.

엉망인 얼굴에 걸맞게 사나운 기세를 흘리고 다니는 양아치 하나.

어느새 뒷골목의 어둠에 동화되어 있는 블라드를 보며 회색 두건의 사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 어디 빈민가 출신이라도 되나 보지?”

“물어봐도 말 안 해줄 건데요.”

“······.”

주문받은 음식들을 받아든 블라드는 근처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꼬치를 집어 들었다.

“은퇴한 기사들은 대개 자기 이름을 말 안 해주더라고요.”

“정확히는 가장 낮은 자가 된 사람만 그렇지.”

“대부분 돈도 없고.”

“······.”

블라드는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사내에게서 라문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범상치 않은 실력과 오직 경험 많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모습까지.

그날, 자신이 벗겨내었던 두건의 안에는 라문드와 마찬가지로 백발이 된 사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은퇴한 기사가 왜 거기서 산적질을 하고 있었어요?”

“······은퇴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거든.”

회색 두건의 사내는 이제 되었다는 듯 두건을 걷고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누구나 명예로운 은퇴를 꿈꾼다.

그러나 끝맺음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너는 나한테 목숨을 빚졌다. 맞지?”

“대충은요.”

“대충은 뭐야.”

“끝까지 붙어봤다면 몰랐을 거란 이야기죠.”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옆에서 같이 꼬치를 뜯고 있는 사내는 기사 5명에 용명 10명, 거기에 잡부들까지 후식으로 해치우고는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댄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여태까지 검을 맞대본 사람 중 가장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개소리 말고.”

은퇴한 기사는 블라드의 손에서 꼬치를 빼앗아 들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어쨌거나 물어볼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당분간은 나를 도와줘야겠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아요?”

블라드의 질문에 회색 두건의 사내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엘프들의 찻잎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엘프들의 찻잎이잖아요. 이게 왜요?”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투존의 잎.

블라드는 아직도 눈앞의 사내가 왜 백작의 마차를 약탈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게 차로 보이나?”

블라드는 무심히 술잔을 들이키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스스로가 쌓아온 이름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가 된 은퇴한 기사들.

그들은 순례와도 같은 여행을 떠나면서 그동안 땅바닥에 흘러왔던 자신의 명예들을 주워 담는 사람들이었다.

“그거 차 아니야.”

그리고 지금, 블라드의 앞에서 담담히 술잔을 기울이는 이름 모를 은퇴 기사.

“마약이지.”

그는 흔들리는 찻잎들 사이로 자신의 명예를 흘리고 만 사람이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5화 14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2)

압실론.

엘프들의 차(茶)라는 뜻의 제국어.

그러나 이제는 엘프들의 차라기보다는 제국의 차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지 오래였다.

“젊은 귀족 자제들의 자살이 부쩍 늘기 시작했지.”

퍼져오는 향기는 숲을 떠올릴 정도로 청량하며 입안에 닿는 맛은 눈을 밝게 만들 정도로 알싸하다.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실용적인 용도로도 효용이 뛰어난 압실론은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부터 입소문이 퍼져나갔었다.

“그러나 이게 원인인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회색 두건의 사내는 손안에 들려있는 주머니를 내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살이라니, 압실론이라는 차가 무슨 환각 같은 거라도 보여주나 보죠?”

“아니.”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그런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면 진작에 알아챘을거다.”

마약이라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착란은 물론이고 각종 육체적 악영향을 유발시켜 도저히 사회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불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약이다.

“그럼 압실론의 부작용이 뭔데요.”

심각한 부작용이 없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당연한 물음에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높은 의존성,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각성효과, 그리고 우울감.”

“뭘 겨우 그것 가지고.”

블라드는 압실론의 부작용을 듣고는 그만 웃음 짓고 말았다.

이 정도의 부작용 가지고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했단 말인가.

그러나 대수롭지 않아 하는 블라드의 반응과는 다르게 회색 두건의 사내는 진중할 뿐이었다.

“어미가 보는 앞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야 할 정도의 우울감이지.”

“······음.”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블라드는 그만 턱하고 막히는 숨과 함께 입을 닫고 말았다.

들려오는 대답의 무게는 감히 비웃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으니까.

“요즘 젊은 녀석들은 항상 우울해하고는 했어. 시절이 그러니까 말이야.”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 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알아채 주지 못한 거야.”

초대 건국왕 프라우센.

그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국은 초대왕의 의지와는 달리 더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헐거워지는 제국의 상황은 미래의 동량들을 계속해서 위험한 전장으로 내몰고 있었으며 이미 자리를 차지해버린 자들은 더는 젊은이들에게 영광된 자리를 남겨주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모두가 우울한 시절이었다.

“그럼 법으로 금지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법이라는 것은 잘 몰랐지만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라면 어쨌거나 금지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순진한 물음에 그만 한숨 같은 웃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봐라, 여기 순진한 젊은이를.

이 세상에 깊게 뻗어있는 어두운 거미줄을 몰라보는 아이를.

“······누군가의 불행은 곧 누군가의 행복이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주머니의 입구를 열고는 엘프들의 찻잎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찻잎들.

마치 잿가루 같이 흩날리는 엘프들의 찻잎들이 천천히 뒷골목 더러운 진창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미 압실론의 이권은 제국 깊숙한 곳까지 뿌리 깊게 박혀있다. 몇몇 녀석들의 죽음만으로는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압실론은 돈이 된다.

그리고 돈은 권력이 된다.

이 시대의 권력자들은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빛나는 황금을 사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멈추고 싶다.”

정체 모를 약탈자.

초라한 두건을 뒤집어 쓴 은퇴자.

그러나 그는 약탈한 찻잎의 무게만큼이나 누군가를 살려낸 사람이었다.

그날 돌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사내의 검은 감히 블라드가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것이었다.

※※※※

어두운 밤.

블라드는 혼자서 조용히 도시 어귀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곳.

그곳에서 도시 타노보를 내려다보던 블라드는 회색 두건의 사내가 하던 말이 맞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네.”

어느 도시에서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있기 마련이었다.

빈민가의 유무는 통치자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현상이었으니까.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어.”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빈민가의 중심과 외곽 사이에 마치 선처럼 구분된 경계.

천천히 쌓이고 쌓여 같은 색깔로 물들어진 것이 아닌 갑작스레 색이 달라진 외곽의 빈민가가 블라드의 눈에 띄었다.

“······.”

갑작스레 빈민가의 크기가 커진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딛고 있는 땅에서 밀려날 때는 그만한 사연들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던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빈민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인데도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4층짜리 건물.

건물 위에 달린 굴뚝 위에서 우울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나 다 똑같네.”

도시 타노보는 시간이 갈수록 부유해지고 비츠카야 가문은 새로운 중부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혜택을 같이 누려야 할 영지민들은 점점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 마약을 만드는 데나 동원되고 있었다.

어디서나 힘없는 자들은 거대한 세계에 깔려 허우적댈 뿐이었다.

블라드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씁쓸한 기운을 땅바닥에 뱉어내며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하긴 해야겠는데.”

돌다리 위에서 목숨을 빚졌다.

목소리에 대한 단서도 그에게 있다.

그리고 비츠카야 백작에게는 갚아야 할 개인적인 빚도 있다.

회색 두건의 사내가 건넨 제안을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용도 잡고, 황실의 검도 사용하고, 여기저기 정령들이랑도 안면도 터놓고.’

그러나 블라드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야?’

정령과 관련 있으며 용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황실의 검을 사용하는 사람.

블라드는 목소리에 대한 단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단할 것이 분명한 사람이 어쩌다 검은 번개를 타고 나에게로 꽂혀 들어왔을까.

블라드는 이제 목소리의 정체보다도 그가 이렇게 된 이유가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

겨울이었음에도 푸르게 우거진 숲속.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차마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나무 아래로 빼곡히 들어찬 집들이 있었다.

아니, 집처럼 생긴 나무들이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리나.

세계수가 내려다보는 그곳에서 지금 바쁘게 움직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라디스 님! 신녀님께서······.”

“······나도 안다.”

평소의 냉막한 인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지금도 그의 감색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문을 열어라.”

“네.”

부하들의 호위와 함께 세계수 아래 가장 큰 나무로 들어선 바라디스.

인간들의 건물로 따지자면 10층은 넘어 보일 듯한 거대한 나무 안에는 누가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집의 형상을 갖춘 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왔는가. 바라디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세계수에 가장 가까운 곳.

나무의 가장 높은 장소까지 뛰듯이 달려온 바라디스는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로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계시입니까?”

“그렇다고 보네.”

장로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자.

마치 나무 고목처럼 갈라진 늙은 엘프가 지팡이를 짚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오래된 세월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있었을지라도 어찌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어려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받는 계시로군.”

고난과 시련의 역사.

인간들에게는 영광으로 가득 찬 시대였겠으나 점점 대륙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만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치욕의 세월이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세계수의 계시는 손에 꼽을 만큼밖에 내려오지 않았으니, 그동안 엘프들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망망대해를 헤쳐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러나 기대하고 있는 장로들과는 달리 바라디스는 얼굴에 한껏 걱정을 여미고는 장로들의 벽을 헤치고 안으로 걸어갔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향들.

그 향들 사이사이에서 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

그 가운데 누워있는 소녀는 지금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신녀로 임명되고 나서 처음 받는 세계수의 계시야. 아무래도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을걸세.”

바라디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조심히 땀에 절어있는 소녀의 백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바들거리는 손과 발. 그리고 동공 없이 하얗게 돌아가 있는 두 눈까지.

“······.”

바라디스는 마치 간질이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떨며 세계수의 기운을 버거워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위해 두 손을 꽉 붙잡아주었다.

마주 잡은 소녀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온······다.”

소녀는 이제야 바라디스의 온기를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과 함께 주위에 있는 촛불과 향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조용히 해라.”

가장 오래된 장로의 말 대로 숨조차 조심히 내쉬는 장로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곳곳에 꽂혀 있던 촛불들이 터질 듯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계시였다.

“용이······온다.”

바라디스는 소녀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듯 잔뜩 찌푸려져 있는 소녀의 인상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용이 봤어. 어떡해.”

내뱉을 때마다 달라지는 목소리.

세계수의 계시와 소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오는 가운데 점점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보여줘라.”

헐떡이며 말하는 소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대장로 님.”

점점 안색이 창백해져 가는 소녀를 보며 바라디스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대장로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들고 있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아직 이번 신녀는 어리고 경험 없으니 그렇기에 아껴줘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오래된 이는 가장 어린 소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세계를 열어 계시를 나눠 들기로 했다.

“무······엇을. 무엇을 보여주면 되겠습니까······.”

질문을 통해 세계수의 계시를 이끌어내는 대장로.

기도하듯 모은 두 손 위로 땀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미처 소녀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 못한 계시들이 가장 오래된 장로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윽!”

대장로의 뇌리로 선명한 장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뿌리 아래.

축축한 동굴, 종유석, 그곳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바위.

그 바위 위에 꽂혀 있는 검 하나.

“······이런.”

오랜 세월 속에도 빛을 잃지 않은 검.

그 검을 알아본 대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2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6화 24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3)

블라드는 백작에게 받은 주머니를 펼치고는 그 안에 든 금화를 하나하나 세어보았다.

백작에게 받은 돈, 총 20골드.

“애매하네.”

반짝이는 금화들이 앞에서 반기고 있었으나 정작 블라드는 눈썹을 찌푸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차를 호송한 대가로만 본다면 분명 큰돈이겠으나 목숨값까지 생각해본다면 지나치게 적은 돈이었다.

아마 비츠카야 백작은 모자란 값은 원한으로 대신할 모양이었다.

“고트.”

“응?”

고트는 반사적으로 자신에게 날아오는 동전들을 붙잡았다.

“봉급.”

“오······오오.”

반짝이는 금화 세 개.

평범한 소작농이라면 1년은 바짝 벌어놔야 얻을 수 있는 수입을 보며 고트가 발을 동동 굴렀다.

“뭐야! 앞으로도 3골드씩 주는 거야?”

“돈이 있으면.”

“크으!”

고트는 금화를 깨물며 생각했다.

역시 따라오기를 잘했다고.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주머니를 여는 데 인색하다면 따르기 고달플 것이다.

그러나 여기 있는 기사는 밑의 사람들을 챙기는 것에 아까워하지 않았다.

마치 뒷골목의 보스들이 호탕하게 돈을 뿌리는 것 같이.

“그리고 이건 경비.”

“또!”

무심한 말과 함께 또다시 날아오는 금화 하나.

날아오는 금화를 바라보는 고트의 표정이 새삼 행복해 보였다.

“그걸로 여관비도 내고.”

“당연하지.”

“옆방에 있는 사람 것까지 내주고.”

“당연히 옆방에 있는 사람 것까지 내줘야지. 응?”

반짝이는 금화에 한껏 들떠 있던 고트였으나 지금 들려오는 소리에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옆 방은 왜? 설마 우리 앞으로 그 사람이랑 같이 움직여?”

돌다리 위에서 회색 두건 사내의 공격을 받은 것은 블라드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시퍼렇게 물든 그의 광대뼈가 그날의 고통을 계속 상기시켜주고 있었다.

“내가 준 3골드 안에는 까라면 까라는 것에 대한 대가도 들어 있는 거야.”

“······그 사람 우리 따라올 말은 있대?”

블라드는 고트의 불만을 간단히 금화로 잠재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슈테판한테.”

사용했다면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게다가 가시나무 용병단은 블라드를 따랐기에 비츠카야의 눈 밖에 나고 말았으니 거기에 대한 대가까지 치러줘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 도망 안 쳤잖아. 그 정도면 알아둘 만하지.”

고트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업계에 몸담은 적 있던 둘로서는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는 용병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었다.

“간다.”

“다녀와. 대장.”

짧은 인사말만을 남긴 채 망토를 여미고는 차가운 밖으로 나서는 블라드.

여관의 문을 여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보며 고트는 턱을 긁어댔다.

“······이제 좀 태가 나는데.”

첫 만남에서의 블라드의 모습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나운 소년이었을 뿐이었지만 지금 밖으로 나서는 블라드의 뒷모습은 누가 보아도 무게감이 있는 기사의 모습이었다.

그때와 같은 겨울이었으나 밖으로 나서는 블라드의 어깨는 어느새 넓어져 있었다.

※※※※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

비록 북부보다는 아니었지만, 중부의 끝자락인 이곳도 춥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돈도 많이 받았다면서 왜 저녁은 이것밖에 안 되냐?”

회색 두건의 남자는 고트가 끓여놓은 솥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고기를 먹어야 힘을 쓸 것 아니냐? 기사는 먹을 것에 돈 아끼는 거 아니야.”

고트는 자신이 애써 끓여놓은 스튜를 타박하는 사내를 보며 입술을 부루퉁히 내밀고 있었다.

다만 무어라 말하지 않은 것은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의 실력을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타노보의 물가가 미쳤더라고요.”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누구 말까지 사야 하느라 돈이 더 없었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조용히 휘적이던 국자를 붙잡고는 그릇에 옮겨 담았다.

가장 낮은 곳을 헤매는 자들은 자그마한 후원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이었다.

“스승이 누군 줄 모른다고?”

“알면 진작에 말했겠죠. 그때 검이 목까지 들어왔었는데.”

회색 두건의 사내는 들고 있는 그릇 너머로 블라드를 유심히 바라보았으나 어린 기사의 눈빛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괘씸할 정도로.

“계속 말했잖아요. 나도 누군지 찾고 있다고.”

“음.”

온전한 진실은 아니었으나 블라드가 스승을 찾고 있다는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니었다.

만약 거짓으로 답했다면 아무리 뒷골목에서 영악하게 살아온 블라드라 할지라도 눈앞의 사내를 속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진실과 거짓을 간파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으니까.

“황실의 검은 절대 밖으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건데······.”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수저를 들었다.

“그런데 제가 쓰는 게 진짜 황실 기사단이 쓰는 검술이 맞아요?”

“정확히는 황실의 검이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황실 기사단에서도 몇몇만이 전수받는 거거든.”

회색 두건의 사내는 말했다.

황실의 피를 타고난 자.

혹은 그들의 최측근인 몇몇의 기사들만이 전수 받을 수 있다는 그런 검술이라고.

블라드는 자신이 여태껏 이렇게 대단한 검술을 쓰고 있었다는 것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나는 쓰면 안 되는 거죠?”

“아버지가 혹시 황제 되시니?”

“그건 아닐 것 같은데요.”

“그럼 곤란해질 수 있지.”

허가받지 않은 자이기에 쓸 수 없다.

일격필살의 묘리는 어디까지나 황실의 것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건국왕이자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프라우센의 검술이었으니 만약 황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북부 사람들이야 몰라봤겠지만, 중부 쪽으로 갈수록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다. 잘못하면 황실 모독죄로 끌려갈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해요?”

사내의 입에서 엄청난 죄목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작아지고 말았다.

평생 황실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도 없던 블라드였으니 지금의 상황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일단 내가 너의 검술을 보았을 때 말이지. 네가 쓰는 일격필살의 묘리는 꽤 예전에 유출된 것 같다.”

모든 것을 꺼내든 일격을 맞이하면서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검술을 확실히 알아보았다.

블라드의 검술은 분명 황실의 검이 맞았지만, 현재 쓰고 있는 검술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왜 그렇게 생각해요?”

“네가 쓰는 건 좀 더 원형에 가깝거든.”

사내는 국자를 들고서는 스튜가 들어 있는 솥을 살살 돌리기 시작했다.

“이 밍밍한 스튜가 현재 네가 쓰는 일격필살의 묘리라고 한다면.”

스튜 안으로 내일 쓸 소시지들이 잘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향긋한 육향과 퍼져나가는 기름방울들이 끓고 있는 스튜의 풍미를 깊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현재 황실이 쓰는 일격필살의 묘리다.”

세월은 흐르고 형태 있는 모든 것들은 변하기 마련.

제국이 세워진 지 이제 300년이었으니 그 유구한 흐름에 발맞추어 황실의 검 또한 발전을 거듭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보다 좀 더 맛있어졌지.”

“······.”

블라드는 고기 조각들이 떠다니는 스튜를 바라보았다.

회색 두건의 사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그럼.”

“일격필살의 묘리는 의외성에서 나온다.”

사내는 자신의 그릇으로 소시지들을 옮겨 담으며 말했다.

“그리고 의외성이란 정련된 규칙이 아닌 신묘막측(神妙莫測)한 발상에서 비롯하는 법이지.”

마침내 떠다니는 고기 조각들을 다 덜어낸 사내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 여기에 너만의 재료를 넣어보는 거다. 황실의 사람들이 봐도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같은 뿌리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너만의 꽃을 피워내라.

일격필살의 묘리는 그것을 추구하는 검술이니까.

“가능하겠어?”

황실의 검을 쓰는 북부의 기사.

존재 자체가 의외성이나 다름없는 어린 기사.

그런 블라드를 바라보는 전직 황실헌병대장의 얼굴에는 실로 미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

“아니······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엘프들의 장식품이 가득한 집무실.

비츠카야 백작은 갑작스레 당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허둥지둥 움직이고 있었다.

“와달라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래도.”

와달라고 말하기는 했으나 온다고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백작은 눈앞에 있는 기사를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용살 기사단장 미르셰아.

그는 그 누구도 쉽게 초빙하기 힘든 고매한 기사였으니까.

“어떻게 차라도 한 잔,”

“······엘프들의 차는 입에 맞지 않더군요.”

금발에 푸른 눈.

비츠카야 백작은 자신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미르셰아의 모습에서 자연스레 며칠 전 이 도시를 떠난 북부의 뜨내기를 떠올리고 말았다.

“네! 네 그래야죠. 귀하신 분께 내밀만한 차는 당연히 아니죠.”

그러나 같은 푸른색이라 할지라도 깊이가 다르다.

백작은 미르셰아의 날카로운 거부를 알아듣고는 재빨리 새롭게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압실론은 잘 만들어지고 있습니까? 정체 모를 습격자가 있다고 보고 받았는데.”

“해결되었습니다. 잘 해결되었지요!”

시중을 드는 백작과 주인인 양 상석에 앉아 있는 공작의 아들.

마치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듯한 모습은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둘의 지금 모습은 비츠캬야와 드라굴리아의 관계를 확연히 드러내 주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마치 미간을 꿰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

백작은 미르셰아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며 머릿속까지 차가워지는 것만 같았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만으로는 처치 불가능한 실력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그랬었지요.”

백작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애써 긴장된 표정을 지운 채 대답했다.

“북부에서 온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린놈이었는데 실력은 좋았지요.”

“······북부에서?”

백작의 보고를 듣던 미르셰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 블라드라고 하는 녀석이었는데 그래도 검은 좀 쓰더군요.”

새롭게 홍차를 데워낸 백작은 찻잔에 차를 따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역시 북부 녀석인지라 감히 제 자리를 몰라보고 버릇없이 굴긴 했지만 말입니다”

“······.”

“역시 미천한 핏줄은 어디서나 티가 나는 법이더군요. 야만족들의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

백작은 그 말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미르셰아를 바라보았다.

찻잔을 들어 올려 홍차의 향기를 맡는 그의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역시 엘프에게서 배워놓은 다도 실력은 중앙의 귀족도 만족시킬만한······.

쨍강-

깨어지는 소리.

그저 찻잔이 깨어지는 소리였으나 백작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깨어진 찻잔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붉은 찻물이 불길하게 테이블을 적셔대었다.

“정말 그렇게 보였나?”

삽시간에 집무실로 내려앉는 무거운 침묵.

찻잔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집무실의 공기에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네?

“어디서 보아도 티가 나는 핏줄.”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붙잡고 말았다.

자각은 느렸으나 본능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다닥다닥 울리는 찻잔과 접시의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자네가 알아보았다는 그 핏줄이 정말 미천해 보였느냐는 말이지.”

들려오는 질문에 비츠카야 백작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그 안에는 귀족의 푸른 피조차 감당하기 힘든 흉포한 기세가 담겨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7화 11

세계수의 꽃이 피면 (1)

저택 어딘가에서부터 퍼지는 울음소리.

슬피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처량하다.

더는 나올 숨조차 없었음에도 꺼억거리면서 우는 여인의 눈가에는 마른 눈물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눈물샘에 담겨 있던 슬픔만으로는 자식 잃은 아픔을 전부 다 흘려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오귀스트 경.”

깨어진 창문.

여기저기 널브러진 다기들.

그러나 어지러운 주위와는 달리 찻잔 안에 담겨 있는 차만큼은 영롱한 초록빛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부터 현장은 저희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의 헌병 대장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금색 양각이 새겨진 갑옷.

저 갑옷은 제국에서도 오직 황제의 근위대만이 착용할 수 있는 갑옷이었다.

“······수도에서 일어난 범죄는 우리 헌병대의 관리 소임이다.”

“물론 저도 그렇다는 걸 압니다.”

헌병 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품 안에서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 하나를 꺼내었다.

금인칙서(金印勅書).

오직 제국의 황제만이 내릴 수 있다는 황금색의 칙서를 펼쳐 든 중년의 남자는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라 저도 어쩔 수 없군요.”

“그분이 와병(臥病) 중이라는 것을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근위대의 갑옷을 입고 있던 중년 사내.

그는 오귀스트의 말을 듣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이 무슨 불경한 소리입니까. 분명 제가 오늘 아침에도 폐하를 뵙고 나온 참인데 말입니다.”

“······.”

오귀스트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황제를 지켜야 할 근위대장이 오히려 그의 이름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니.

오귀스트의 분노를 알아챈 헌병대원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지금 당장 수사권을 이양하십시오.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

그러나 살벌해지는 기세 속에서도 중년의 남자는 펼쳐진 양피지를 둘둘 말아 넣을 뿐이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지금부터 이곳의 현장은 저희 황실 근위대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검보다 무거운 명분.

고귀한 황금색을 휘두르는 근위대장의 앞에서 오귀스트는 그저 분함 감정과 함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어두운 저택 안에는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픈 울음이 가득할 뿐이었다.

※※※※

“그런데 어떻게 막을 건데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

깊은 숲속을 헤매는 일행은 말에서 내려와 고삐를 붙잡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도 블라드의 눈빛만큼은 회색 두건의 사내를 향해 있었다.

“마차만 계속 약탈한다고 차가 안 팔리겠어요? 엄청 잘나간다면서요.”

정확히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실과 관련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목소리의 검술까지 알아본 사람이었으니 블라드가 그에게 호기심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한참 경험과 지식을 갈구할만한 나이였다.

“······네 말대로 팔리는 건 못 막긴 했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블라드의 말처럼 손발이 잘려버린 헌병대로서는 제국 내에 깊게 뿌리 박힌 거미줄을 걷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냅다 후려쳐 본 거다.”

“뭐를요?”

“벌집을.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저 깊숙한 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파낼 수 없다면 끌어내야만 한다.

그것을 알고 있던 오귀스트는 스스로를 미끼 삼아 비츠카야의 마차를 약탈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백작이 용살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고 했지?”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비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끌려 나온 것은 블라드라는 애송이 기사였을 뿐이지만 그래도 눈앞의 애송이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 하나를 물어와 줬다.

벌집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몰락한 용에 대한 정보였다.

‘황실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드라굴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라······.’

지방의 영주가 버거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용살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일에서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이었고 오귀스트는 비츠카야 가문이 그 절차를 밟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용살 기사단은 왜요?”

“아니다.”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겠지만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몰락한 용이 목줄을 물어뜯는 중이라면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도 큰 화가 미치고 말 테니까.

“저기 봐 대장! 저긴가 봐!”

“······와.”

한참 오귀스트와 대화를 나누던 블라드는 고트가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커?”

숲이 있었다.

겨울임에도 녹색을 잃지 않은 숲이.

비록 내리는 눈에 의해 하얗게 물들어 있었지만, 차가운 눈조차도 어찌하지 못했던 따뜻함이 저 앞에 있는 숲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엘프들의 숲이다.”

깊은 곳에 숨어 누구에게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엘프들의 숲.

블라드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녹색의 지평선을 보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저게 세계수라는 건가요?”

“그래.”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녹색의 바다 위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햇빛이 가득한 누군가의 집무실.

온통 갈색의 나무로 뒤덮여 있는 그곳에서 소녀의 백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오빠.”

“네. 신녀님.”

의자가 있었으나 굳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백금발의 소녀는 바라디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됐네요.”

토라지듯 말했으나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차오르는 섭섭함은 어쩔 수 없었는지 자그마한 볼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갈 때 이것도 가져가.”

“네?”

바라디스는 소녀가 내민 바구니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쌓여있던 과일들을 담은 바구니.

윤기 나는 과일의 빛과 함께 소녀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배고파하는 거 같더라고.”

“······누가 배고파합니까?”

바라디스는 바구니를 받아들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엉뚱한 면이 있긴 했었지만 세계수의 신녀가 된 후부터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소녀였다.

“바라디스 님.”

“음?”

그러나 방금의 질문에 대한 답은 소녀가 아닌 다른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찰 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인간들을 발견했습니다.”

“쫓아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보고.

그러나 보고를 하러 들어온 엘프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뭐냐,”

소녀를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라진 바라디스의 표정.

어느새 바라디스의 얼굴에는 냉정한 관리자이자 통솔자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침입자들이 바라디스 님을 찾고 있습니다.”

“······뭐?”

“정확히는 바라디스 님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라디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눈앞의 보고자를 바라보았다.

말로 전하지는 않았으나 눈으로 통하는 물음을 알아본 엘프는 자신이 가져온 이름 하나를 그의 앞으로 꺼내놓았다.

“침입자는 자신을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소개했습니다.”

“······.”

부관의 말을 들은 바라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배가 고프다고 하던가?”

“네?”

바라디스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어서 가보라는 듯 발을 까닥이며 웃고 있었다.

※※※※

“엘프들도 감옥이 있네요.”

“나도 처음 들어와 봐서.”

“얘네는 못을 안 쓰나? 뭐 이어진 흔적도 없어.”

침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고트와는 달리 블라드는 여기저기를 누비며 엘프들의 감옥을 기웃거렸다.

“대장. 진짜 초대받은 거 맞아?”

“맞다니까.”

“그럼 엘프들은 초대받은 사람들한테 다짜고짜 화살을 날리는 게 예의야?”

“······그래도 맞지는 않았잖아.”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회색 두건의 사내와 고트를 보며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초대를 받았으니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정작 그들을 반기는 것은 살의 어린 화살과 차가운 감옥뿐이었다.

“네 목숨값은 아직 못 갚은 거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잖아요.”

“북부 놈들은 원래 이렇게 뻔뻔하냐?”

블라드는 들려오는 핀잔과 원망을 모른 체하며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았다.

‘이럴 거면 초대는 왜 한 거야?’

블라드는 목소리에 대한 단서를.

오귀스트는 압실론에 대한 단서를.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이곳 엘프들의 숲에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할지라도 오긴 왔어야 하는 곳이었다.

‘······미묘하게 날카롭던데.’

그러나 블라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가 아니었다.

위기에 민감해야 하는 뒷골목의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그런 낌새.

자신들을 마주했던 엘프들에게서는 그런 익숙한 낌새가 느껴졌었다.

끼이이익-

블라드는 저 앞에서부터 열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창살에 바짝 가져다 댔다.

“미안하군.”

검은색이 감도는 푸른 머리에 감청색 눈동자.

냉막한 표정의 엘프가 부관들을 동원하고는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우리들의 숲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엘프들은 환영 인사를 감옥에서 하나 보죠?”

“그래. 일단 이거라도 들지.”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블라드보다는 바라디스가 한 수 위였다.

“여기서 내보내는 줄 겁니까?”

“그거 먹으면서 하루만 기다리지. 자네들을 꺼내려면 거쳐야 할 절차가 있어서.”

하루나 더 기다리라는 말에 블라드의 눈썹이 좁아지고 말았다.

“이해해주길 바라네. 요즘은 모두가 날카로워질 시기라서 말이야. 한 번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꺼내기에는 절차가 복잡해.”

“그런데 다들 뭐가 그렇게 날카롭습니까? 오면서 보니까 근처는 조용하던데.”

지나치게 날 선 엘프들의 태도.

블라드는 그들의 차가운 태도에서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무언가를 잔뜩 경계하는 듯한 기이한 경계심을 느꼈었다.

“······용이 오고 있네.”

굳이 인간들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으나 바라디스는 차분히 설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는 세계수의 신녀가 주목하는 존재였으니까.

바라디스는 분명 지금 시기에 이들이 아우슈린에 다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세계수가 꽃을 피울 시기거든.”

“꽃?”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어루만졌다.

소녀가 보여준 호박석의 풍경 속에서 붉게 물든 단풍나무는 분명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꽃.”

하나 된 신의 이름.

그리고 제국의 야욕을 피해 간신히 뿌리 내린 어린 세계수.

그러나 어린뿌리와 향기로운 꽃을 노리는 존재는 오직 인간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날카로운 용은 언제나 세계수의 꽃들을 노려왔지.”

어린 꽃잎은 향기롭고, 젊은 뿌리는 탐스럽다.

그러나 세상 곳곳에는 향기롭고 탐스러운 것들을 탐내는 존재들이 수두룩했다.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분명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음에도.

“안 좋은 시기에 맞이하게 되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하나의 세계가 뿌리내려 안전하게 꽃을 피울 가능성은 얼마나 요원한가.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희들은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나의 규율 앞에서 맹세했다.

“말만이라도 고맙군.”

인간들의 영혼은 가볍고 입은 썩었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존재들.

그러나 지금 푸른 눈동자의 기사를 감싸고 있는 정령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 자는 지켜왔던 자라고.

갑옷 위의 하얀 뱀과 검 밑의 두더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바라디스의 눈동자로 호박석에 새겨진 나무의 기억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새빨갛게 꽃피운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세계수.

그 아래 서 있는 기사는 분명 낯익은 검을 들고 있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8화 15

세계수의 꽃이 피면 (2)

새하얀 안개가 낀듯한 탁한 눈.

그 안에서 간신히 색을 유지하고 있는 녹색 눈동자가 유심히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한 손님이셨군.”

호박석 안에 담겨 있던 풍경을 알아본 오래된 엘프의 얼굴에서 한 줄기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대장로.

그 옛날, 환란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늙은 제로니모는 블라드가 가져온 호박석을 통해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호박석은 어디서 났는가?”

“하이날의 가문의 가보라고 들었습니다.”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대장로의 눈길이 기꺼워졌다.

실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귀한 인간 손님이었다.

“하이날, 하이날이라······.”

과거의 푸르름을 떠올리는 늙은 나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노인의 쇠한 기력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기억들을 들추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소드마스터.”

그러나 아무리 세월의 무게 밑에 깔려 있던 기억이라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걸어왔던 발걸음 하나하나가 역사가 되었던 사람들.

지금의 시대는 모두 그들의 흔적 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 중 하나가 그런 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군.”

오귀스트는 블라드의 뒤에 가만히 선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숨조차 죽인 채 그렇게 가만히.

평생을 제국을 위해 헌신해 온 기사에게 있어 건국왕의 흔적을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가슴 뛰는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는 이 안에 있는 단풍나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대장로님.”

늙은 제로니모는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희뿌연 눈동자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푸른 눈빛.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는 주먹에서부터 어린 기사의 간절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단풍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반짝이는 푸른 눈이 마치 별빛과 같다.

이제야 형태를 갖춘 가능성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 안에 담겨 있는 풍경이 단풍나무인지는 어찌 알았고?”

“······네?”

그러나 아무리 반짝인다 해도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 세계를 어찌 엿보았는가.

갑작스러운 대장로의 질문에 블라드는 그만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

혹시 몰라 생각해놓았던 변명들도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늙은 엘프의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거짓을 꺼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경험도 지식도 아닌 오직 본능에서 비롯되는 경고였다.

“하긴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못하는 블라드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엘프들.

그러나 늙은 대장로만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다시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제로니모는 사소한 하나하나의 결함보다 바로 앞에 보이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안에 새겨져 있던 단풍나무는 서쪽에 있었지.”

“서쪽입니까.”

마침내 들려오는 장로의 대답.

그 대답에 블라드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그래. 서쪽. 대륙에서도 가장 푸르른 숲이 있던 곳.”

그러나 블라드는 들려오는 제로니모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았다.

“서쪽에 그런 숲이 있습니까?”

서쪽에 있는 것은 오직 기나긴 황무지뿐.

거친 흙과 메마른 바람이 가득한 제국의 서쪽에는 노인이 말한 푸르른 숲 같은 것은 없었다.

“있었었지.”

블라드의 물음에 늙은 나무의 얼굴 위로 주름 하나가 새겨져 갔다.

마치 깊게 새겨진 상처와도 같은 주름이었다.

“아주 예전에 있었던 우리들의 숲이.”

꿈에서도 그리던 풍경 하나.

그러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그 날의 기억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가득했던 밀밭이 있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고개를 뉘던 밀들이, 어디서 끝나는 것인지 모를 커다란 숲이.

붉게 물든 황혼 녘을 따라 뛰놀던 아이들이.

그리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던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그런 풍경들이 있었었다.

“용이 불태우기 전에는 말이야.”

가장 완벽했던 용.

단 한 번의 숨결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린 저주받을 존재.

이제는 불타버린 기억을 헤매는 그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찌 찾겠나.”

오래된 기억을 말하는 노인의 입에서부터 검은 잿가루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전부 다 불타버려 재가 된 지 오래인데.”

노란색 호박석에 담겨 있던 가을의 풍경.

그곳에 새겨져 있던 것들은 이제는 모두 불태워져 버린 잿더미와 같은 기억들일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찾고 있던 어린 기사의 눈동자가 쉼 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

엘프들이 내어준 방 안.

그곳에서 블라드는 창틀에 기대앉은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동쪽 끝까지 뻗어있는 초록빛은 여태껏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던 푸른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럼 나는 투존의 잎을 살펴보러 가지.”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오귀스트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압실론의 근원에 대한 면밀한 조사.

오직 피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만이 제국에서 벌어지는 광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있으라던데요?”

“있었다고 말 좀 해다오.”

블라드는 오귀스트에게 목숨을 빚졌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이라면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엘프들의 숲까지 그를 이끌었다.

그러니 오귀스트의 지금 행동은 블라드가 감히 제지할 수 없는 그의 고유한 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분위기도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던데.”

“걱정하지 마라. 왕년에는 숱하게 해본 일이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 말하던 오귀스트는 방문이 아닌 창틀을 부여잡고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네 스승은 황실과 관련된 인물인 것 같다.”

“······그런가요.”

“내가 봤을 때는 그렇다.”

블라드는 그 말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던 황실의 검.

그리고 이제는 아주 오래전에 불타버리고 만 엘프들의 숲, 엘븐하임의 풍경까지.

이제는 계약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으로도 목소리가 누군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건국왕 프라우센께서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가장 낮은 자가 되셨지.”

가장 낮은 자.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칭호를 벗어던진 채 그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못다 한 일들을 마치며 은퇴를 준비하는 기사들.

그 영광된 시초는 바로 기사들의 왕, 건국왕 프라우센이었다.

“전설의 시작답게 마지막 또한 신비롭게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지. 나는 어쩌면 네가 알려지지 않았던 프라우센 님의 마지막과 연결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건국왕 프라우센의 마지막은 바로 명예로운 은퇴였다.

그러나 가장 낮은 자 프라우센의 마지막은 소문만 무성할 뿐 그 누구도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다.

엘프들의 말을 들어본다면 지금 창틀에 기대앉아 낙심하고 있는 어린 기사가 그 영광된 끝과 이어진 흔적이지 않을까.

“그러면 뭐 해요. 여기서 단서가 끊겼는데.”

“끊기기는. 내가 보기에는 이제 시작인데.”

블라드가 앉아 있던 창틀에 발을 올린 오귀스트는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해 보이는 지면.

점점 어두워지는 주위가 오귀스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때로는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내몰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이제 시작이라뇨?”

블라드의 질문에 오귀스트가 두건을 뒤집어쓰고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만약 네 스승이 프라우센 님의 유지를 이은 자라면 그분의 흔적을 따라 가보면 될 거라는 이야기다.”

끝을 모른다면 시작부터 따라 가보면 된다.

블라드의 스승은 소드마스터의 흔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 프라우센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 가보면 결국 스승의 정체까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프라우센 님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면서요?”

“인간들은 그렇지.”

웃으며 블라드를 바라보는 오귀스트.

그의 가려진 얼굴 사이로 저물어가는 오늘의 황혼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알지도 모르지.”

그 말을 끝으로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밖을 향해 뛰어내리는 오귀스트.

블라드는 펄럭이는 두건과 함께 저 아래로 떨어지는 그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뭔 고양이도 아니고.”

전직 소매치기이자 도둑이었기에 더욱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기민한 움직임.

아무런 소리 없이 지면에 착지한 늙은 기사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걸어가 엘프들의 숲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있어 봐야겠네.”

고트도, 오귀스트도 없는 방 안에 홀로 남은 블라드.

적막해진 방 안에서 블라드는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분명 봤다고 했는데.’

목소리는 분명 호박석 안에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확신할 수 없는 불명확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목소리도 직접 본 것이 아닌 자신처럼 호박석을 통해 본 기억일 수도 있다.

애초에 직접 봤다고 하기에도 몇백 년 전 일이었으니 시간대도 맞지 않을 것이다.

“뭐하던 사람이야. 진짜.”

차라리 요제프와의 7년짜리 계약이 더 지키기 쉽겠다.

목소리의 흔적은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거대한 성벽 앞에 가로막히는 것만은 기분이었으니까.

똑똑똑.

“······?”

한참을 고민하던 블라드의 귓가로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끼이이익-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조심스레 열리는 문.

자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환히 백금발이 보였다.

자신을 환상 속으로 끌어들였던 정체 모를 소녀.

“잠깐 시간 좀 있어?”

고개만을 방안으로 빼꼼히 들이민 소녀는 블라드를 알아보자마자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 것 마냥.

※※※※

가능하다면 무시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엘프들의 경고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소녀의 말에는 무언가 거부하기 힘든 기이한 끈적거림이 있었다.

마치 엘프들의 대장로가 보여줬던 눈빛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겁니까.”

생글생글 웃는 소녀와는 달리 딱딱히 굳어있는 블라드의 표정.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도 소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명의 엘프들은 블라드를 보며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신데요?”

블라드는 최대한 행동을 조심히 하기로 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호위까지 끌고 다닐 정도라니.

지금 신난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는 소녀는 엘프들의 세계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소녀가 분명할 것이다.

“그 호박석.”

“호박석?”

“응. 그거.”

소녀는 손가락으로 블라드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거! 꼭 보여주고 싶어.”

여전히 주어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자그맣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엄마를 보고 싶대. 쟤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를 본 적이 없거든?”

“엄마?”

이해할 수 없는 말.

마치 어딘가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돈되지 않은 말이었으나 소녀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쟤가 누군데요?”

블라드의 물음에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의 끝.

그곳에는 아직 물들지 않은 푸른 잎을 가진 거대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세계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엄마를 꼭 한번 보고 싶대.”

“······.”

비록 머리로는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었으나 가슴으로는 와닿는 말.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말하는 소녀의 태도 때문인지 다시 본 세계수의 모습은 무언가 달라 보였다.

저 멀리서 보이는 푸른 단풍나무의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어서 와달라고 손짓하는 듯. 그렇게.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19화 16

세계수의 꽃이 피면 (3)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겨우 몸을 들이미는 오전의 햇빛.

그 햇빛에 의지해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자들이 있었다.

유려한 외모, 길게 솟아오른 귀.

그들은 아우슈린의 근방을 지키는 수색 대원들이었다.

“정지.”

가장 앞서 있던 대장의 지시와 함께 수색대원들이 발걸음을 멈추며 숨을 죽였다.

꽉 쥐고 있는 대장의 주먹이 그들의 앞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피 냄새······.’

청각만큼은 아니었으나 인간보다는 뛰어난 후각.

수색 대장은 새까만 숲 안에서부터 퍼져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흩어져.’

눈짓과 손짓.

서로가 정한 신호를 따라 재빨리 근방으로 흩어진 엘프들은 곧 주위와 동화되어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만 간다.’

수신호와 함께 홀로 조금씩 앞으로 나서는 수색 대장.

그의 뒤를 따르는 대원 중 몇몇이 조심스레 화살을 꺼내 시위를 먹이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가지들.

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어두운 숲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을씨년스러운 나뭇가지들의 부딪힘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누군가의 탄식과 함께 여태껏 지켜오던 침묵은 깨지고야 말았다.

마치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는 덤불 위.

그곳에 양팔을 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프가 한 명 있었다.

“복부의 관통상 확인.”

“상처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사망한 지 최소 하루는 지난 것 같습니다.”

수색 대장은 들려오는 보고를 들으며 착잡한 표정과 함께 시체에 다가갔다.

날카롭게 꿰뚫려 버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린 내장 조각들이 매달려 있었다.

“너무 늦었군.”

수색대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시체에 만들어져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커다란 구멍.

아직도 부릅뜨고 있는 두 눈이 얼마만큼의 고통이었을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니드호그.”

수색대장은 시체에 커다랗게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통로를 통해 바라본 숲의 모습.

차마 빛이 닿지 못한 그곳에는 오직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저 깊은 숲속에서부터 아련히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외침이 있었다.

마치 굶주려 있는 듯한 목소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용이 이제 곧 꽃을 피울 어린 세계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

“······.”

블라드는 지금 마치 자신이 정원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정작 본인이 서 있는 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었음에도 말이다.

‘이게 무슨 동굴이야.’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다.

축축해야 할 바닥은 마치 금방 새로 깐 짚처럼 푹신하였고 어두워야 하는 안은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는 이끼들로 인해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반딧불?’

게다가 곳곳에서 떠다니는 반딧불들까지.

마치 일행을 반긴다는 듯 주변을 떠도는 발광체들을 보며 블라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계절과 장소에 맞지 않는 분위기가 블라드의 상식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호박석을 보면 정말 좋아할 거야. 요즘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거든.”

뿌리를 향해 뚫려있는 동굴을 통해 세계수의 근원으로 향하는 일행들.

동굴이었음에도 밝고, 겨울이었음에도 따뜻한 이곳은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현실의 풍경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걔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당황해하고 있었거든.”

봄이 온다.

그리고 꽃이 핀다.

다가오는 봄에 맞추어 기지개를 켜는 어린 세계수는 이번이 태어나 처음으로 피워보는 꽃이라 했다.

하지만 세계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개화가 옳게 맞아들어가고 있는지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많이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네가 마침 이곳으로 온 거야.”

가끔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안해질 때가 있다.

자신이 가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것인지.

혹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해야 함에도 쉽게 발을 내뻗지 못하는 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주기만 해도 좋으련만 불행히도 어린 세계수에게는 그럴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랬군요.”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블라드는 소녀라는 존재를 통해 세계수가 품은 고민을 깊이 이해하는 중이었다.

나무와 기사는 서로 닿지 못할 세계에 있음에도 말이다.

“다 왔다.”

소녀의 말과 함께 길고 길었던 통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밝은 빛들.

그 빛은 푸른 이끼가 만들어내는 빛이 아닌 오늘의 태양이 비추어주는 빛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마 네가 여기까지 온 최초의 인간일 거야.”

그 말과 함께 소녀를 호위하던 엘프들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인간은 알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엘프 중에서도 몇몇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을.

그러나 세계수의 신녀는 푸른 눈의 기사를 이곳으로 인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른 눈의 기사가 이곳에 와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대한 공동(空洞).

곳곳에 자리 잡은 세계수의 뿌리들이 어지럽게 얽혀들어 가며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로 들어갑니까?”

“그럼. 얼마든지.”

마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듯 양팔을 벌리는 소녀.

블라드는 소녀의 환대와 함께 조심스레 공동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잔디들이 블라드의 발걸음을 따라 스스로 눕혀주고 있었다.

세계수의 확고한 초대이자 환영의 의사를 보며 호위하던 엘프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세계수.’

딛고 있는 발끝으로부터 자그마한 심장 박동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박동과 함께 블라드의 세계도 조금씩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맞닿은 세계가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네가 와서 기쁜가 봐.”

뒤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호위를 하러 따라온 엘프들은 공동의 입구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을 뿐.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블라드와 소녀, 그리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세계수뿐이었다.

“보여 줄 수 있지? 부디 그래 줬으면 해.”

어린 나무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세계수의 신녀.

그녀는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채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을 가지고 온 기사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부디 아이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한 번도 나아가지 못한 세계로 향해야 하는 어린 세계수를 위해서.

“알겠습니다.”

소녀의 부탁과 함께 블라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낫겠죠?”

차가운 검날은 날카롭지만 집어들 손잡이는 부드러울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는 마땅히 자신이 날카로운 쪽을 잡아 주기로 했다.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나무에는 어울리지 않는 쪽이었으니까.

-----.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발끝에서만 느껴지던 세계수의 심장 소리가 이제는 공기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천장을 통해 내려오는 빛에 알리시아의 호박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세계수는 그 빛 사이로 비치는 가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너른 들판.

넘실거리는 밀밭.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

기억 속의 단풍나무가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

“나비다.”

블라드는 자신의 주위로 날아드는 나비들을 보았다.

소녀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때의 나비들이었다.

꽃과 같은 나비들이 블라드와 소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뿌리에 닿고 있는 블라드의 발과 거꾸로 들고 있는 검을 통해 기억과 현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그 둘을 잇는 통로이자 세계가 되었음을.

“꽃이 핀다······.”

자신을 휩싸는 빛과 함께 블라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억 속의 세계수가 천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린아이를 향해 마치 이렇게 하라는 듯이.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머니를 보며 어린 세계수는 자신도 모르게 가지를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얽혀지는 가지들 사이에서 그 옛날의 가을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이 서서히 겹쳐지고 있었다.

※※※※

“······오오.”

늙은 제로니모는 떨리는 손과 함께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워진 육체였지만 그는 서둘러 옆에 있던 지팡이를 잡아 들고는 서둘러 창가로 다가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향기가 그의 눈가를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음?”

한참 집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던 바라디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어서 고개를 돌리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오직 지금만이 볼 수 있는 단 한순간이 있을 거라고.

밭을 일구던 엘프들도, 숲을 지키던 엘프들도.

마구간에 있던 누아르와 고트도, 차밭을 조사하던 오귀스트도.

인간과 엘프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새롭게 자리 잡은 그들의 땅 한가운데서 찬란히 빛나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꽃이 핀다.”

그래.

나는 이제 안다.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하는지를.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밖에 없는 어머니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잘하고 있었다고.

-----!

새하얗게 명멸하는 세계수 안에서 갖가지 가능성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구름과 가까운 가지에서는 하늘을 좇는 꽃들이.

가장 멀리 뻗어진 가지에서는 바람을 따르는 꽃들이.

가장 아래에 있는 가지에서는 땅을 향한 꽃들이.

“오······. 오오.”

“정령들이 태어난다!”

한 송이 꽃보다도 작은 어린 새가, 말이, 뱀이, 두더지가.

그동안 세계수가 품고 있던 가능성들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나의 이름 아래 잊혀 있던 어린 것들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태어나는 어린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누군가가 지켜줘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푸른 눈의 기사는 자신이 날카로운 검날을 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쉼 없이 흔들리는 검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핏물.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그 붉은색은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기사의 선물이었다.

오늘 아우슈린에는 봄이 찾아왔다.

이제는 없는 어머니의 인도와 기사의 인내 아래서.

※※※※

“······.”

터질 듯이 빛났던 세계수가 멈추고.

방금까지만 해도 어지러이 날아다니던 환상 속의 나비들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뚝뚝.

모두가 멈춰 있는 지금, 오직 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블라드의 손에서 흐르고 있는 핏방울뿐.

초록색의 잔디 위로 떨어지는 붉은색이 처량했다.

“괜찮아? 미안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소녀는 꽃을 피운 기쁨보다도 눈앞에 있는 블라드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는 어린 세계수를 위해 기억을 받쳐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꽃이 핀 겁니까?”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밖을 향해 뚫려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천천히 블라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고마워······. 고맙대.”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알리시아의 호박석까지.

하이날 가문의 가보는 오늘 자신의 효용을 다했다.

“하······.”

무언지 모를 벅찬 감정과 함께 블라드는 그제야 검에서 손을 떼어내었다.

깊게 베인 상처.

그럼에도 블라드는 세계수가 꽃을 피우는 그 순간에도 흔들리는 자신의 검을 놓지 않았었다.

맞닿은 세계를 통해 보이는 광경에는 어머니가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쓰다듬고 있었으니까.

블라드는 정말이지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음?”

지쳐버린 세계수 때문인지 조금은 어두워진 뿌리 안.

그렇기에 더욱 빛나는 오늘의 태양이 천장을 통해 한 줄기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치는 곳에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바위 하나가 있었다.

“저건 뭡니까?”

마치 이제는 보여줘도 된다는 듯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바위.

그 바위 위에는 태양 빛을 가득 담은 이름 모를 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은색 빛이 감도는 검이었다.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0화 10

이제는 너의 차례다 (1)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붉은색 단풍잎 하나.

그 단풍잎이 마침내 바위 위에 꽂혀있는 검에게로 내려앉았다.

고고하게 빛나는 은색의 검.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검은 지금도 블라드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

다만, 블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바위 위에 의연히 서 있는 은색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음을.

누군가를 지켰던 수호검이자 수많은 적을 학살한 피의 검.

그리고 가장 완벽했던 용의 심장을 꿰뚫은 용살검.

그 검이 지금 블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란 날을 세운 채로.

더는 다가오지 마라.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아이야.

내가 너를 베어버리기 전에.

※※※※

“허억!”

어두운 밤을 가르며 부릅떠진 푸른 눈동자.

이제 막 악몽에서 깨어난 블라드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끄응.”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땀이 가득한 이마를 쓸어내려 하였지만, 양손에 둘둘 감겨 있는 붕대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어 왔다.

거꾸로 날을 잡았던 어제의 상처는 지금도 블라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꿈자리 한번 사납네.’

블라드는 생생했던 방금의 악몽을 떠올리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어제의 광경.

고고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어제 보았던 은색의 검에서는 분명 꺼림칙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었다.

지금 이렇게 악몽으로 떠올릴 정도로.

“더 자지 그랬냐.”

“······오셨네요.”

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서 오귀스트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때요. 차밭은 다 조사한 건가요?”

블라드가 세계수의 꽃을 피워내는 데 도움을 주는 동안 오귀스트는 엘프들의 영역에서 투존이라는 찻잎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친 두 사람은 각자의 단서를 찾아냈음에도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밭이 나뉘어 있더군.”

“네?”

“······인간들한테 팔 찻잎과 자신들이 마실 찻잎을 구분해 놓았다는 이야기다.”

인간용과 엘프용으로 구분해 놓은 두 개의 차밭.

단순히 원활한 판매를 위해 구분해 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밭에 가까이 다가간 오귀스트는 알 수 있었다.

두 찻잎의 품종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애초에 시작부터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는 이야기지.”

“······.”

엘프들의 차. 압실론.

동쪽에서부터 시작된 초록색의 악의는 어찌 보면 제국의 원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을 향한 엘프들의 독심은 온전히 제국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세계수를 불태운 것은 가장 완벽했던 용이었으나 그들을 숲에서 밀어낸 자들은 다름 아닌 제국이었기에.

“사방이 적이로군.”

찬란히 빛나는 제국의 밑에는 수많은 이의 피와 눈물이 묻혀 있다.

제국은 그들의 세계를 짓밟고 서 있는 또 하나의 용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제국은 그동안 자신들이 흩뿌렸던 원죄의 씨들을 수확해야만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 멀리 밤하늘 아래서 지금도 스스로 빛나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점점 저물어가는 제국과는 반대로 새로이 피어나는 세계수를 보는 늙은 기사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착잡함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

“그러길래 왜 검을 거꾸로 들고 그랬어.”

“······.”

이제야 겨우 해가 떠오른 이른 아침.

소녀는 엉망으로 감겨 있는 붕대를 풀어내며 툴툴대고 있었다.

자신이 감아놓았음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붕대의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 알았다면 검집으로 들었겠죠.”

“변명하는 사람은 믿음직스럽지 못해.”

자신의 검에 상처 입은 기사.

그것도 검을 거꾸로 들고 있다 얻은 상처라면 그 누구에게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나도 처음이었단 말이야.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개화식(開花式)이었다고.”

그저 호박석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두 그루의 세계수들은 자신의 세계를 통로 삼아 기억과 현실을 오갔으니 블라드 또한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검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어.’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경고도 해주지 않은 소녀의 잘못이겠지만 블라드의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소녀의 말마따나 기사의 변명만큼 초라해 보이는 것은 없을 테니 블라드는 이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됐다.”

이제야 감겨 있던 붕대를 다 풀어낸 소녀는 환한 미소와 가져왔던 나무함을 열었다.

색색의 가루약과 액체가 담겨 있는 함.

마치 화장품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녀의 나무함 안에는 화려한 색깔들이 가득했다.

“기다려 봐. 이거랑 이거 쓰면 된다고 했거든.”

“실제로 해보신 적은 없나 보네요.”

“괜찮아 옆에서 많이 봤었어.”

블라드는 가능하다면 숙련자의 손길이 있었으면 했지만, 소녀는 그런 바람들을 무시한 채 약병들을 집어 들 뿐이었다.

“손 대.”

“······.”

막무가내인 소녀의 태도에 블라드는 하는 수 없이 양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깊게 베여 있는 블라드의 손바닥.

아직도 검붉은 피가 샘솟고 있는 기사의 손바닥을 보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고 말았다.

“아팠겠네.”

“별로요.”

비록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블라드가 다친 것을 안다.

그러나 소녀도 세계수도 개화는 처음이었으니 누군가는 뒤에서 그들의 실수를 감당해주어야만 했다.

블라드의 상처는 그런 흔적이었다.

“장로님들이 너한테 쓰라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어. 효과가 좋을 거야.”

아무리 인간들을 배척하는 엘프들이라 할지라도 귀중한 개화식을 도와준 존재이니 블라드를 섭섭지 않게 대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들고 왔던 가문의 가보까지 잃었다고 했으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의 약은 앞으로 있을 보상에 대한 작은 조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 있던 검 말인데요······.”

“응. 소드마스터의 검.”

소녀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만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오귀스트뿐만 아니라 옆에서 거들던 고트까지도.

소드마스터라는 단어는 그만큼 제국민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걔는 왜?”

“······그게 왜 거기에 꽂혀있었는지 궁금해서요.”

범상치 않은 검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소드마스터의 검일 줄은 몰랐다.

은퇴한 기사에서부터 마구간지기까지.

방 안에 있던 세 명의 인간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며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가 줬다고 들었어.”

“그 검······을 소드마스터가 줬나요? 직접?”

“응.”

블라드와 마주친 소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 치의 거짓도 깃들어 있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제국은 나쁜데 소드마스터는 착했거든. 그래서 검을 주고 간 거야.”

“······그게 무슨.”

뜬구름을 잡는 듯한 소녀의 대답에 오귀스트마저 평정을 잃고 되묻고 말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호위 엘프들의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블라드 단 한 명뿐이었다.

“거기 있는 검은 용살검이거든. 세계수를 지키는 부적.”

소녀의 눈동자가 창밖에 있는 어린 세계수를 가리켰다.

지금도 조금씩 빛을 내며 꽃을 피워내는 아우슈린의 세계수.

오귀스트와 고트는 보지 못했겠지만, 목소리의 잔재를 흡수한 블라드에게는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세계수 위에서 뛰놀고 있는 자그마한 정령들이.

“······무엇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킵니까?”

현상 속에 숨겨진 진의를 봐야 한다.

요제프는 언제나 경험 없던 소년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어째서 소드마스터는 자신의 검을 남겨두고 떠났는가.

무엇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했는가.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오직 눈앞에 있는 소녀뿐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가장 완벽한 용살검이거든.”

고고한 은색의 검.

가장 완벽한 용살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용들은 그 검을 무서워해.”

어제 보았던 검은 블라드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서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내가 너를 베어버리기 전에.

“······그렇군요.”

블라드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느꼈던 기이한 감각은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검이 블라드에게 보냈던 날카로운 경고였다.

두근-!

‘······?’

소녀의 말을 통해 어제의 검을 떠올리고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는 느껴본 적 없었던 예고 없는 심장의 울림.

심장이 뛸 때마다 블라드의 안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었다.

“신녀님.”

블라드가 갑작스러운 발작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소녀를 호위하던 엘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모시겠습니다.”

호위 엘프들에게서 귓속말로 사정을 전해 들은 소녀.

블라드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망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

아우슈린의 숲 어딘가.

엘프들의 도시와는 조금은 떨어진 어두운 숲속에서 한 무리의 엘프들이 긴장한 채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아아악!”

그러나 아무리 경계한다 할지라도 피해 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가시들.

마치 화살처럼 뿜어져 오는 날카로운 악의에 의해 방금 또 한 명의 엘프가 쓰러지고 말았다.

“진형을 갖춰라!”

“방호진이 소용없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도 바라디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숲속에 도사린 어둠이 엘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어두운 눈동자 안에는 비웃음과 함께 애타게 타오르는 굶주림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놔둘 성싶으냐.’

이 세상 모든 용은 탐욕스럽다.

그들은 언제나 완벽해지기를 갈구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스스로 완벽해지기 위해서 그 저주받을 주둥이 안으로 어떤 것이라도 처넣는 데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숲에서 나옵니다!”

“방패 들어! 마법사와 궁수들을 보호해라!”

곳곳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엘프들은 가장 날카로운 용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오직 엘프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라.’

한쪽 눈을 감은 채 시위를 당기고 있는 바라디스.

엘프 최고의 레인저가 겨누는 화살촉 끝으로 자그마한 마법진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가득 담아서.

새빨갛게 달궈진 모습으로.

크아아아아아-!

쏘아지는 가시 끝에는 악의 어린 독이 매달려 있다.

내짖는 포효 속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뒤돌아 도망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다 이 개자식아!”

“저주받을 용 같으니!”

이제 엘프들에게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금 그들의 뒤에 있는 어린나무가 이 세상 마지막 세계수였으니까.

“니드호그······.”

그렇게 단단히 전의를 다진 엘프들에게로 다가오는 숲의 어둠.

날카로운 가시로 잔뜩 뒤덮인 날렵한 몸체.

지금은 비록 추레하게 땅을 기고 있지만, 앞다리에 달린 얇은 피막이 한때는 이 용도 하늘을 꿈꿨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 큽니다!”

“일단 멈춰 세워야 한다!”

곳곳에서 떠돌고 있는 마법진들.

그들이 좌표를 고정할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저 용이 가만히 멈춰서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막아라!”

그것을 알고 있던 엘프들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니드호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악!

놈이 방향을 튼다!

마법사들을 지켜!

동료들의 비명을 듣는 바라디스의 한쪽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녀석의 날카로운 가시 끝으로 이제는 독이 아닌 엘프들의 검붉은 피가 맺히고 있었다.

“바라디—스! 지금!”

누군가가 날린 올가미로.

누군가의 방패가 틀어낸 주둥이로.

그리고 방금 소리 지른 누군가의 시체가 겨우겨우 틀어막은 전진.

그아아아아!

그리하여 마침내 멈춰선 가장 날카로운 용.

희뿌연 먼지 사이로 저주받을 용의 눈동자가 사납게 치켜 떠졌다.

“······지금!”

마침내 좌표를 잡아낸 색색의 마법진들이 사정없이 니드호그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바라디스가 내지른 한 촉의 화살과 함께.

붉은 화살촉이 바람을 담아 한 줄기의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다.

등 뒤에는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꽃들을 짊어지고서.

터져나가는 누군가의 핏물들 뒤로 저 멀리 어린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1화 16

이제는 너의 차례다 (2)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그곳에는 니드호그가 내지르는 흉악한 포성이 가득했다.

그아아아아!

니드호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도 사납게 눈을 파고든 화살촉 하나가 니드호그에게 분노와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으니까.

“바라디스······. 지금부터는 네가 지휘해라.”

중년의 엘프가 피로 물든 어깨를 부여잡고는 힘겹게 외쳤다.

이미 그의 어깨에는 니드호그의 가시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돌파당하면······안 된다.”

엘프들의 대전사이자 이번 작전의 책임자.

바라디스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와중에도 그의 입술은 점점 새까매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용의 악의가 지금도 그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부탁한다.”

점점 창백해져 가는 대전사를 보며 바라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세계수의 밑에서 태어났다던 대전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부릅뜬 채 바라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모여라! 화력을 집중하겠다!”

그리하여 이제 남아있는 지휘자는 레인저들의 대장인 바라디스.

누구도 원치 않았던 세대교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말았다.

“대장! 저 자식 너무 단단해! 오러를 사용해도 무기가 제대로 피부를 뚫지 못하고 있어!”

“저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저 용은 성장을 마친 성체(成體)인 것 같습니다. 마법에 대한 면역력이 강력합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보고에 바라디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엘프들은 니드호그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완연히 눈을 뜬 용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막아내기 버거운 것이었다.

“후퇴합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후퇴해 본진과 합류하는 방법뿐.

세계수와 함께 늙은 장로들의 힘까지 죄다 끄집어낸다면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 돼. 여기서 결말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대상을 방패로 삼은 채 싸우는 것은 어불성설.

지금도 어린 세계수의 가지 위에는 아직 날갯짓할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린 정령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이들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우리가 해야 한다.”

저 앞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니드호그와 바라디스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도 니드호그의 한쪽 눈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화살.

얕았기에 끝을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니드호그를 괴롭히고 있는 화살의 존재는 분명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번만 더 틈을 만들어다오.”

화살이 얕았다면 더 가까이서 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바라디스는 얼마든지 날카로운 악의를 향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뇌까지 꿰뚫어낼 테니까.”

각오를 마친 바라디스의 눈동자 안에서 자그마한 오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 중에서도 소수의 인원만이 가질 수 있다는 마법안(魔法眼)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우슈린의 바라디스.

분노로 달궈진 그의 세계가 니드호그만큼이나 날카롭게 세워지고 있었다.

※※※※

“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

마치 발작하듯 몸을 떨고 있는 소녀가 블라드의 소매를 붙잡고는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이 와요······.”

비록 소녀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블라드를 붙잡은 손아귀만큼은 하얗게 물들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세계수의 신녀는, 아니 어린 세계수는 그만큼 눈앞의 있는 기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과정을 뛰어넘은 저 너머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세계수는 오직 블라드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게 그러니까 지금······.”

“계시입니다.”

여태껏 입 한 번 연적 없던 호위 엘프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녀는 세계수와 엘프들을 잇는 통로.

필멸자의 한계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신령스러운 나무의 계시는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용이 온다.”

세계수와 신녀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미래에 있을 위협을, 악의에 가득 찬 용의 눈동자를.

“······용이 왔는데.”

그렇기에 엘프들은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고 수상한 것들을 배제하며 저지선을 세워냈다.

그렇기에 지금 바라디스와 엘프들은 나름의 준비를 갖춘 채 니드호그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이 아직도 보고 있어.”

용이 온다.

용이 본다.

세계수와 신녀는 앞으로 있을 미래를 최대한 읽어보았지만, 그들은 아직 어리고 경험 없는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는 오직 한 쌍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아아아아아!

순간, 마을에 가득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포효.

엘프들이 세워놓은 저지선의 반대편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용의 포효가 있었다.

“······이런.”

흉포한 포효를 들은 블라드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계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쿠과가가강!

겨우 뿌리를 내린 엘프들의 마을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계선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한 마리의 니드호그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소녀의 볼을 따라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절히 소매를 붙들고 있는 소녀의 손가락이 가련하다.

“······.”

눈가에 맺혀있는 소녀의 눈물을 본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오귀스트를 돌아보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를 보면 어떡하나.”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는 요제프도 자야르도 아니었다.

주군도 선임기사도 없는 지금. 지금 이 자리에서 블라드에게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

“네가 결정해야지.”

오직 자신뿐.

블라드라는 기사의 주인은 오직 블라드 뿐이었다.

“······맞아요.”

창가로 비치는 하얀 달빛이 블라드를 비추고 있었다.

그 달빛이 머무는 블라드의 한쪽 가슴에는 자그마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흘러내리는 소녀의 눈물을 닦아준 블라드.

달빛이 가리키는 그의 가슴에는 산 로지노가 적어준 명예로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 쇼아라의 블라드. 신녀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이들의 숨결을 지켜낸 기사.

이제는 비어버린 블라드의 폼멜이 달빛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

꺄아아아악!

용이다! 용!

모두 도망쳐!

거대하고도 날렵한 몸체는 마치 파도를 가르듯 엘프들의 집을 헤치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쏘아지는 경비병들의 화살이 있었으나 니드호그에게 있어서 그들의 공격은 간지럽지도 않을 뿐이었다.

가장 날카로운 용에게 닿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세계를 품은 검이 필요했다.

“왜 따라오세요?”

“당연히 내 마음이지.”

니드호그를 따라 달려나가는 두 명의 기사.

블라드와 오귀스트는 건물들을 뛰어넘으며 니드호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엘프들은 제국의 적이잖아요.”

“적이 어디 있고 아군이 어디 있나. 세상에는 오직 문제와 해결만이 존재할 뿐이야.”

압실론의 유통을 막는다.

그리하여 제국에 마약이 풀리는 것을 막는다.

오귀스트는 오직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블라드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은혜를 입힌 다음에 엘프용 차만 유통해달라 말해볼 생각이다. 괘씸한 잘못은 나중에 갚아도 되겠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는 일단은 터져나가는 댐의 구멍을 막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정당한 분노를 풀어놓지 못할 정도로 제국은 심약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디냐.’

니드호그를 바라보는 전 제국헌병대장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직 평생동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 온 오귀스트만이 시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약점 간파.”

그 누구라도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자신의 약한 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 한 번 찔리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치명적인 약점.

그렇기에 사람들은 거짓과 위압으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감추고는 한다.

지금의 니드호그처럼.

‘앞발······. 피막의 안쪽.’

비늘은 단단하고 세워져 있는 가시는 흉악하다.

이마에 세워진 뿔은 무엇이든지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지만 니드호그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피막 안쪽의 겨드랑이 부분이 약점인 것 같다. 그곳을 공략해라.”

하늘을 향한 욕망을 버리지 않은 동부의 용은 여전히 날개에 대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집과 아집으로 붙어있는 너저분한 피막이 바로 니드호그의 약점이었다.

오귀스트가 비춰본 눈동자의 오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까아아앙!

크아아아아!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니드호그의 전진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부서지는 건물들, 밀려 나가는 지면의 돌덩이들.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마법진이 니드호그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법이로군!”

블라드는 오귀스트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세계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세계수의 앞에 모여 있는 몇몇 엘프들이 보였다.

엘프들의 장로들이었다.

“잘 됐다. 이 틈을 살려서······.”

그아아아아아!

장로들이 만들어낸 마법진은 분명 고매한 술법에 의해 설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니드호그는 이미 성체가 된 상태.

완벽에서 떨어져 나온 용들은 세상을 속이는 마법에 현혹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뭔 놈의······.”

마치 마법진이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양 물어뜯기 시작하는 니드호그.

용의 우악스러운 치악력과 함께 마법진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젠장!”

하늘 위에서 깨어져 나가는 마법진들.

블라드는 유리 조각처럼 떨어져 내리는 마법진의 잔해를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이것이 용인가.’

성체가 되지 않았던 어린 데스웜.

이제야 막 용임을 깨달았던 린드부름.

두 마리의 용을 상대해봤던 블라드였지만 눈앞에 있는 니드호그는 그 녀석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녀석이었다.

용살 기사단은 정녕 이런 용들을 상대해왔단 말인가.

그아아아아!

1중, 2중, 3중.

깨어질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마법진들은 분명 늙은 장로들의 기력을 쥐어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그러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마법진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곳곳에서 날아드는 발사체들은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

전사들이라도 있다면 어찌 방법이라도 찾아보려만 용이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요격하겠다던 엘프들의 판단은 지금 치명적인 실수로 돌아오고 있었다.

“블라드! 달려라!”

“빌어먹을!”

거대한 몸체가 마침내 세계수의 앞에 다다랐다.

늙은 제로니모는 마지막까지 양팔을 펼쳐 니드호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그의 오래된 육체는 더는 선명한 의지를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처 삼켜내지 못한 검붉은 핏줄기가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그아아아아!

모든 방해를 떨쳐낸 잔악한 포식자.

마침내 니드호그의 발톱이 어린 세계수를 찍어눌렀다.

-----!

달빛 아래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가지들.

저 멀리서 고통스럽게 튀어 오르는 소녀의 육체.

어린나무와 신녀 모두가 용의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탐욕을 느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파멸이 내뱉는 숨소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내가 유인하마!”

“알겠어요!”

세계수의 끝에 있는 어린 정령들.

니드호그의 시선이 잠시 그곳으로 쏠려 있는 동안 블라드와 오귀스트가 재빨리 양옆으로 달려들었다.

“흐읍!”

왼쪽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킨 오귀스트.

그의 검에서부터 찬란히 빛나는 새벽의 여명이 맺히기 시작했다.

전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

그의 빛은 거짓을 밝히는 여명이었다.

“여기다!”

아무리 약점을 알아냈다 한들 그것을 들춰내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갑작스러운 오귀스트의 등장에 나무를 올라타려던 니드호그의 주둥이가 재빨리 자신의 겨드랑이를 가리고 있었다.

“고놈 참 못생겼다.”

사나운 입김을 마주한 오귀스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래도 여기서 자신이 이 녀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면 분명히 반대편에 있는 블라드에게는 빈틈이 보일 것이다.

“뭐?”

그러나 니드호그는 오귀스트를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가시들을 뿜어낸 채 서둘러 위로 올라가려 했을 뿐.

늙은 기사의 머리 위로 독을 가득 품은 빗줄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반대쪽에서 달려들던 블라드는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오귀스트를 보며 재빨리 왼쪽 눈을 감았다.

가능하다면 완벽한 기회를 포착하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저놈이 올라가기 전에······.”

시간이 없었기에 깊은 세계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목소리의 잔재만큼은 확실하게 담아내었다.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으로부터 하얀색의 번개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아!”

어느새 세계수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는 니드호그.

새까맣게 물든 발톱의 끝에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정령들이 있었다.

용은 가능성을 먹는다.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야 갓 태어난 어린 정령들은 분명 용이 탐할 만큼의 가능성의 덩어리들이었다.

“여기다! 이 새끼야!”

니드호그의 의도를 알아챈 블라드는 망설임 없이 빠른 쇄도를 통해 세계수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땅에서부터 시작된 한 줄기의 번개가 니드호그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빠르고 날카롭고 그리고 누구보다 매섭게.

“됐다!”

땅을 구르던 오귀스트마저도 손을 불끈 쥐고 만 완벽한 타이밍.

약점을 향해 내뻗는 블라드의 검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

그러나 니드호그의 움직임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민했다.

그 어떤 세계보다 민감하게 와닿았던 블라드의 세계.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아아아아!

블라드의 시선 가득히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독을 가득 품은 니드호그의 꼬리였다.

퍼억!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세계수의 아래에서 흩날리는 조각들이 가득했다.

마치 깨어진 별빛과도 같은 조각들이었다.

※※※※

세계수의 가장 깊숙한 곳.

근원이 자리 잡은 따뜻한 뿌리 안.

그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홀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은색의 기사가 있었다.

······.

자아는 없지만, 의지는 있다.

은색의 검은 밖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날카롭게 검날을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탐욕스러운 동쪽의 용.

또 하나는 차가운 북쪽의 바람을 품고 온 어린 용.

그러나 은색의 검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을 품고 온 어린 용에게는 분명 낯설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그 기운은 분명 자신과 함께 했었던 누군가의 잔재였다.

······.

나는 세계수를 지키는 부적이지만 본래는 검이다.

검은 뽑혀야만 제 검신을 드러낼 수 있는 법.

그러니 너는 나에게로 와라.

너라면 나를 뽑을 수 있을 테니까.

달빛 아래 서 있던 은색의 검이 고고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맞닿는 세계를 통해 조용히 별빛을 품은 어린 용을 부르고 있었다.

오늘의 달빛은 푸른색이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2화 15

별을 품은 푸른 눈동자

밤하늘 위로 깨어진 파편들이 요란하다.

그와 함께 요란히 빛나는 하얀 뱀의 가호.

그리고 바로 앞에서 엉망으로 금이 가 있는 마법진 하나.

‘이건······.’

어지러이 깨어진 마법진 너머로 창백한 안색의 제로니모가 팔을 뻗고 있었다.

새하얀 입술 위로 물든 그의 붉은색이 선명하다.

“블라드! 정신 차려라!”

시야가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

뜨끈한 무언가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무래도 당한 것 같다.

“젠장!”

자신을 질질 끌어내는 오귀스트의 말소리도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조금씩 돌아오는 시야로 니드호그에게 달려드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인다.

“끄으으······.”

“몇 개로 보이냐? 내 손가락 몇 개로 보여?”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또한 교활하다.

여태껏 마주했던 적 중 가장 강력한 존재.

니드호그는 블라드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이 다가왔다.

“손가락은 잘 모르겠고 일단 저 자식 발톱은 세 개였어요.”

“······좋아. 일어나.”

흔들렸으나 다시금 초점을 잡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오귀스트는 블라드를 잡아 일으켰다.

이 어린 기사는 아직 기개를 잃지 않았다.

“녀석이 위로 올라간다!”

“올가미를 던져!”

고함과 함께 곳곳에서 던져지는 올가미들.

그러나 고작 몇십 명의 엘프들만으로는 니드호그의 거친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니드호그의 포효와 함께 엘프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말았다.

목이며 발이며 이곳저곳에서 밧줄들이 얽혀들어 갔지만 굶주림에 미쳐 있던 니드호그의 기세를 틀어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던 엘프들이 사정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할 수 있겠냐?”

“······한 번 정도는요.”

오귀스트의 말에 블라드는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갑옷은 반쯤 부서졌으나 아직 하얀 뱀의 가호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길하게 흔들리는 루트거의 검은 삐걱대고 있었지만, 아직 예리함을 잃지는 않았다.

아마 한 번 정도라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무타기 좀 할 줄 아나?”

“도시 출신이라서요.”

“그러면 이번에 배워두면 좋겠군.”

오귀스트와 블라드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끔찍한 것.

저 위에서 들리는 정령들의 비명이 애처로웠다.

“지금!”

밧줄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엘프들.

그들의 사이로 늙고 어린 기사가 뛰쳐나갔다.

땅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시선은 하늘에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왼쪽 눈을 감았다.

하늘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용의 뒤로 두 개의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이놈!”

직선을 타고 먼저 도착한 오귀스트는 재빨리 니드호그의 꼬리 부근으로 뛰쳐올라가 검을 꽂아 넣었다.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위였으나 그나마 제일 약한 부분이 이곳이었다.

아마 이곳이라면 녀석의 시선을 잡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아아아아!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끔한 기운에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세로로 좁혀졌다.

“큭!”

어지럽게 다가오는 꼬리가 매섭다.

가뜩이나 한 손은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오귀스트는 최선을 다해 회피를 시도했다.

퍼어어억!

간신히 피한 니드호그의 꼬리.

그러나 쉴 새도 없이 흩날리는 나무 파편 너머로 가시들이 날아온다.

오귀스트는 이미 한 번 겪었던 니드호그의 공격을 보며 찬찬히 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안 나오나 했지.”

치켜떠진 오귀스트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약점 간파의 본래 의도는 바로 최적의 길을 찾아내는 것.

오귀스트의 눈에는 빽빽이 날아오는 가시 사이로 반짝이는 하나의 길이 보였다.

날아오는 니드호그의 가시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흡!”

악의 어린 가시들 사이로 늙은 몸이 삐걱댔다.

교묘하게 화살보다 빠른 가시들을 피해내는 오귀스트의 움직임은 이미 신기에 가까웠다.

“······!”

곡선을 타고 크게 돌아온 블라드.

니드호그의 위에 도착해 있던 블라드는 감고 있던 왼쪽 눈을 통해 오귀스트의 움직임을 보았다.

용의 울부짖음과 세계수의 떨림.

그리고 처연히 내려앉은 달빛 아래서 빛나는 그의 세계는 강렬한 한 장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블라드의 세계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지금이다! 블라드!”

“······!”

오귀스트의 잔상이 아직 남아있다.

블라드는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니드호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아아아아!

보인다.

그림자처럼 희미했지만 네 녀석에게로 닿는 길이.

부릅뜨고 있던 블라드의 오른 눈이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뭐?”

오귀스트의 당황과는 상관없이 블라드는 차분히 니드호그의 뿔을 향해 달려들었다.

까아아앙!

기어이 산산이 조각나 버리는 루트거의 검.

자신의 가시를 잃어버린 블라드를 보며 니드호그의 입술이 바짝 올라갔다.

인간을 향한 비웃음.

그러나 그 비웃음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여전히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

비록 삐걱거리고 있었지만 역시 한 번은 버텨줄 줄 알았다.

그것이 내가 본 유일한 길이었다.

“흐아아압!”

흩뿌려지는 검의 파편 사이로 블라드의 오른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손에서 시작된 하얀 번개가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또 비웃어봐라!”

날카롭게 파고드는 날붙이의 느낌.

짧았기에 강렬한 검.

어느새 뽑혀든 호르헤의 단검이 니드호그의 눈동자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마침내 니드호그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세계수 사이에서 높게 울려 퍼졌다.

푸른 눈동자의 기사가 완벽을 향하는 존재에게 기어이 흠집 하나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을 향한 블라드의 휘두름이었다.

“죽어---!”

쇼아라의 블라드도 나지만 뒷골목의 블라드 또한 나다.

블라드는 자신의 뿌리를 이루는 어두운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반짝이는 호르헤의 단검.

블라드의 손짓 한 번에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죽어 이 새끼야!

각자가 가진 상처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오늘 너를 죽인다.

죽이고 말겠다!

“이런!”

고통스러운 발버둥은 강렬하고 당황하는 몸짓은 커다랗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발산하며 발버둥치는 니드호그에 의해 오귀스트는 그만 자신의 길을 놓치고 말았다.

디딜 공간마저 빼앗겨버린 오귀스트는 더는 블라드를 도와줄 수 없었다.

“조심해라!”

외마디 경고와 함께 어린 기사에게 길을 열어준 별빛 하나가 세계수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베어낸 곳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물과 함께.

“젠장!”

블라드는 떨어져 내리는 오귀스트를 걱정할 틈도 없었다.

이제 하나 남은 적을 향해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쾅! 콰앙! 쾅! 쾅!

세계수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블라드를 떼어낼 재간이 없던 니드호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뿔과 함께 어린 세계수를 들이받고 있었다.

격렬히 흔들리는 블라드와 함께 터져나간 눈동자에서부터 피가 흩날리고 있었다.

“크으윽!”

겨우 박아넣은 호르헤의 단검을 의지한 채 깃발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블라드.

뒤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세계수의 파편이 따가웠다.

“이 개자식이!”

호르헤의 단검은 최선을 다했지만 얕았다.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검만 있다면 좋았겠으나 이것이 블라드의 최선이었다.

콰아아앙!

기어이 니드호그의 머리통이 세계수의 몸통을 뚫어내었다.

질기게 버티고 있었지만, 피로 미끄러워진 단검의 손잡이는 오래 붙들고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되던 강렬한 충격에 마침내 니드호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블라드.

“······!”

순간 아찔하게 다가오는 낙하감을 느끼며 블라드는 양손을 허우적거리고 말았다.

그때 소녀와 함께 보았던 세계수의 안은 비어있었다.

뿌리까지 떨어지는 햇빛과 달빛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비워낸 세계수.

그 신령스러운 뿌리를 향해 별빛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이 블라드의 귓가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머릿결을 휘감는 공기가 서늘하다.

“······.”

힘겹게 눈을 뜬 블라드에게 보이는 것은 사납게 치켜떠진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여기는.”

흩날리는 새빨간 단풍잎들.

지금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호박석 안에 담겨 있던 가을의 풍경이었다.

[많이 아프냐.]

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 서 있는 누군가.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지만, 누구인지 알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상처투성이의 어린 기사.

블라드를 보는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선을 다했는데요. 잘 안됐어요.”

블라드는 천천히 일어나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걸어가도 걸어가도 그에게 더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아직도 안 돼요?”

[······.]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그렇게 목소리와 블라드의 사이는 좁혀지지 못했다.

이렇게나 열심히 걸어왔는데 아직도 닿을 수 없단 말인가.

어린 기사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잖아요. 뭘 해도 안 되잖아요.”

뒷골목의 소년이 기사가 되어 용과 대적하고 있다.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의 걸음이었지만 여전히 블라드의 앞에는 높은 벽과 거대한 세계뿐이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자신에게 쥐어지는 것은 그저 보잘것없는 한 줌의 성공일 뿐이라는 것에 어린 기사는 그만 지치고 말았다.

[······.]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리는 블라드의 울먹임에 그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도전했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서러움을 무어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래도 난 네가 자랑스럽다.]

세상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뒷골목의 소년은 대장간 위에 걸려 있던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소년의 눈 안에서 비치던 그때의 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위를 바라보던 네가 자랑스럽다.]

세상은 너보다 거대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바라보는 곳이 곧 너의 세계가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고개를 들어라. 어린 기사야.

“······제가 잘하고 있었어요?”

[그럼.]

“너무 힘든데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면 돼.]

목소리의 격려 한 번마다 어린 기사의 고개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걸어봤기에 네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어린 기사야. 너는 정말 훌륭히 잘 해내고 있다.

[네가 맞고, 네가 옳다.]

목소리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허리에 달려 있던 검집을 블라드에게 던져주었다.

은색의 검.

고고한 빛을 뿜는 소드마스터의 검이었다.

“이건······.”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을 향해 돌아서 있는 사내.

비록 사내의 얼굴은 짙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지만, 입술만큼은 보이고 있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너의 차례다.]

단풍잎이 흩날린다.

어느새 시야를 가득 채운 새빨간 잎들이 손가락을 펼치며 안녕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서 웃음 짓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차례.”

흩날리는 단풍잎과 함께 환상 속의 가을은 지났다.

다시금 눈을 뜬 블라드에게 보이는 것은 가을날의 풍경이 아니라 하늘 위로 뜬 오늘의 달빛이었다.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안으로 새하얀 달이 가득 맺혀 들어오고 있었다.

※※※※

그아아아아!

마침내 세계수의 꼭대기까지 오른 니드호그.

그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가지 사이사이에 매달려 있는 어린 정령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드호그는 공포에 질려 있는 수많은 어린 정령들을 보며 즐거운 듯 크게 웃어젖혔다.

터져나간 왼쪽 눈.

반쯤 잘려버린 꼬리.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올라왔지만 상관없다.

이제 저 아이들의 가능성을 취해 좀 더 완벽한 나의 모습이 될 테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오는 단호한 목소리.

감히 완벽해질 자신을 향해 차가운 조소를 날리는 존재가 있었다.

그르르르-

푸른 눈동자의 기사.

치켜뜬 눈은 사나운 용이었으나 들고 있는 것은 기사의 검인 그런 존재.

함께 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를 간직한 그의 이름.

쇼아라의 블라드.

그아아아아아!

눈앞에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니드호그는 거친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달라붙다니.

푸른 눈동자의 어린 용은 끔찍하게도 질긴 놈이었다.

“여기서 내려가라. 이 개자식아.”

아우슈린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은 오직 블라드와 니드호그뿐.

이제 자신의 뒤에는 정령들을 지켜줄 그 누구도 없다.

이젠 내가 해내야 할 차례다.

‘······좀 더 깊이.’

블라드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떴다.

좀 더 깊은 세계.

그것은 자신의 눈이 아닌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나의 차례.

이제는 내가 지킬 차례.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빛 하나가 은색의 검과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아!

어린 정령들을 뒤로한 별빛 하나가 용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오직 자신만의 의지를 담아서.

“······!”

애꾸눈의 기사가 알려준 날렵한 발걸음을 통해 날카로운 뿔을 피하고.

빠르게 날아오는 가시들을 하얀 뱀의 가호와 함께 갑주술로 받아내었다.

“크윽!”

살짝 밀렸으나 강체술로 강화한 발목을 통해 버텨내며.

오늘 누군가가 보여준 가장 최적의 길을 찾아 그렇게.

소드마스터의 검술 위에 얹힌 누군가의 세계들이 블라드를 위한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크아아아!”

니드호그는 자신에게 짓쳐 드는 어린 용을 보며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짓밟은 채 올라서야 하는 법.

그러나 푸른 눈의 어린 용은 오직 자신만의 가능성으로 벽을 뛰어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울 모습으로.

그아아아아아!

찢기는 피막 사이로 흉악한 가시들이 꺾이고 있었다.

혼자서는 날 수 없었던 너절한 가능성이 별빛과 함께 갈라지고 있었다.

완벽을 꿈꾸었던 용의 목소리가 비명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이제는 나의 차례다!”

오늘 새로이 떠오른 별 하나가 아우슈린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누구나 바라볼 수 있게, 누구나 올려다볼 수 있게.

그 빛은 여태껏 소년이 가슴속에 품었던 별빛이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3화 11

부서지는 목줄 (1)

가장 날카로운 용 니드호그.

그러나 이제는 멈춰버린 그 용 위에서 한 명의 엘프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가야 해.”

여전히 부릅뜨고 있는 용의 눈동자 위로 꽂혀있는 화살 두 개.

화살촉까지 깊게 박혀버린 화살의 끝으로 하얀색의 뇌수(腦髓)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파고들 힘이 모자란다면 바로 앞에서 쏘면 된다.

마주친 눈동자 안에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선 바라디스는 결국 화살 하나를 용의 뇌까지 쏘아 넣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한 마리의 용을 멈출 수 있었다.

“모두 일어나라!”

그러나 승리의 영광도 잠시, 동료들에게 외치는 바라디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용을 죽였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세계수를 노리는 용은 한 마리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바라디스의 명령과 함께 곳곳에서 널브러져 있던 전사들이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단 한 발의 화살을 위해 최선을 다해 길을 만들었으나 그들은 아직 쉴 수 없었다.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니드호그.

저 멀리 보이는 어린 세계수에서부터 시작된 비명이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젠장.’

모두 눈빛은 살아있었으나 너무 지쳐버리고 말았다.

성체가 된 용은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고 그 악의를 막기 위해서는 전사들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파멸이 세계수를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으나 전사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지 못했다.

그아아아아아!

순간, 용의 비명과 함께 세계수의 가지 끝에서부터 강렬한 빛이 날카롭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모두가 바라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반짝이는 빛이.

“······!”

지쳐있던 바라디스도, 부상 당한 전사들도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강렬한 존재감.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빛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별빛처럼.

별이 떠오르자.

용이 떨어지고 있었다.

※※※※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

그렇기에 일개 손님의 자격으로 있던 오귀스트라 할 지라도 지금의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는 지난밤 세계수를 지켜낸 은인이었으니까.

“무엇을 원하기에 우리를 보고자 했는가. 인간들의 기사.”

통일된 간격 없이 이곳저곳에 흩뿌리듯 앉아 있는 엘프들의 장로들.

비록 세계수를 지켜준 기사를 앞에 두고 있었으나 아직 니드호그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로들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여러분께 긴히 드릴 말이 있어 지금의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오귀스트는 굳이 지금의 시기를 잡아 장로들에게 자리를 요구했다.

불안감에 흔들릴 때만큼이나 빈틈이 생기는 때는 없다는 것을 제국의 전 헌병대장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국에 대한 엘프들의 원한은 공고했으니 오귀스트가 그들의 반감을 파고들 수 있을 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말해보시오.”

“······압실론, 이곳에서는 투존이라는 불리는 차의 유통을 멈춰주십시오.”

오귀스트의 말과 함께 장로들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지고 말았다.

늙은 기사에게서 나오는 말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아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 대한 발언이었으니까.

“······어째서 멀쩡히 유통하고 있는 차를 왜 팔지 말란 말입니까.”

“아무리 세계수를 지켜준 자라 한들 우리의 내정까지 간섭하는 것은 도를 지나치는 행위요.”

이곳저곳에서 장로들의 반발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투존의 잎을 인간들에게 파는 것은 엘프들이 새롭게 찾아낸 활로이자 기회.

만약 제로니모가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들, 이 요구에 대해서만큼은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너무 돌려 말했던 모양이군요.”

그러나 오귀스트는 엘프들이 지금도 말하지 않고 있는 이면의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다해 진실을 파헤쳐 온 전 헌병대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제 말은 더는 제국에 마약을 유통하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마치 화살처럼 쏘아져 들어오는 오귀스트의 발언에 몇몇 장로들의 눈에 시뻘건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눈앞의 기사는 더는 손님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존재다.

오귀스트는 자신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눈빛이 확연히 변한 것을 느끼며 자그맣게 웃고 말았다.

역시 엘프들은 압실론이 마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딴 서툰 거짓으로 우리를 흔들려 하는 이유가 뭐요? 역시 오만한 제국의 기사답게······.”

“더이상 압실론을 팔게 되면 새로이 정착한 숲도 안전하지는 못할 겁니다.”

기어이 진실을 들춰낸 기사는 누군가의 질척한 의도를 간파해냈다.

역시 엘프들이 시작이 아니었다.

시작은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부터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제로니모를 대신해 가장 큰 발언권을 갖고 있는 장로가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눈치챌 거라 생각이야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늙은 기사의 말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말이었다.

“분명 지금, 제국은 흔들리고 황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틈을 타 오랫동안 쌓여있던 원한을 풀어놓겠다는 여러분들의 의도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세계는 지금도 수많은 세계의 시체를 발판삼아 서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엘프들의 세계 또한 마찬가지.

어머니 세계수를 불태운 것은 가장 완벽한 용이었지만 서쪽에 있던 엘프들의 숲을 빼앗은 것은 제국이었으니까.

“······말이 지나치시군. 인간의 기사. 당신이 아무리 세계수를 위해 검을 뽑았다 한들 지금의 발언은 선을 넘었소.”

마치 가을의 찬 서리와도 같은 날카로운 눈빛들.

더 이상의 발언은 불허하겠다는 듯 매섭게 덮쳐오는 기세.

“당신이 내어준 은혜도 있으니 목숨만은 살려서 보내 드리리다.”

오귀스트가 뭐라 하던 엘프들은 초록빛의 복수를 멈출 생각이 없었다.

견고했던 제국이 지금만큼 흔들리는 시기가 없었으니 조금만 더 독을 퍼트리고 힘을 모은다면 제국의 영향력에서부터 독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 제국이 약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귀스트는 제국에 충성한다.

그리고 그 제국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황실.

“그저 황실의 힘이 약해진 것뿐입니다.”

“······.”

제국의 귀족들은 그간 큰 전쟁 한번 없이 힘을 부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황실의 힘만으로는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영향력은 강대해지고 말았다.

“귀족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깃발을 들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오귀스트는 잘 알고 있었다.

제국에는 아주 작은 틈 하나만 있다면 견고했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소드마스터의 시대를 끝낼 수 있다 믿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제가 보기에는 여기에 그들이 깃발을 치켜들만한 훌륭한 명분이자 구실이 보이는군요.”

그들이 자신들을 가두고 있던 목줄을 물어뜯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었기에 넓은 곳을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의 기사는 날카로운 경고와 함께 엘프들의 시야를 강제로 넓히고 있었다.

“제 이름은 오귀스트.”

오귀스트는 회색의 두건을 벗어젖히며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초라한 행색과는 다르게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색 검집.

그곳의 가장 끝, 손잡이 중심에 박혀있는 붉은색 보석에는 빛나는 문양이 하나 새겨져 있었다.

“제국의 전 헌병대장이었습니다.”

사나운 용.

그리고 그 용을 찍어누르고 있는 검 하나.

오귀스트는 지금 오직 몇몇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황실의 문양을 치켜들고 있었다.

“압실론을 파는 것은 결국 여러분들에게도 치명적인 독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제국 전 헌병대장 오귀스트.

가장 낮은 자로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못다 한 자신의 임무를 마치고자 하는 기사.

그는 그렇게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보이고 있었다.

※※※※

“······.”

올라오는 봄의 기운과 함께 점점 어둠을 몰아내는 아침의 하늘.

비록 지난밤은 요란했으나 오늘의 아침은 고요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귓가로 들려오는 요란한 새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지저귀는 새소리가 명랑하다.

“엄청 시끄럽네.”

하는 수 없이 눈을 뜬 블라드는 앓는 소리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끄으응.”

곳곳에 감겨 있는 붕대들이 블라드의 온몸을 죄이고 있었다.

울상을 지으며 온갖 약들을 덕지덕지 발라대었던 소녀의 손길이 아직도 곳곳에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

가장 날카로운 악의들로 인해 여기저기 상처 입고 만 육체.

그러나 블라드는 곳곳에서 느껴지는 쓰라림보다도 안쪽에서부터 느껴지는 공허함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너무 뽑아냈나.’

확연히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력 또한 분명 소모되는 자원이다.

지난밤 블라드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깊은 세계를 불러일으켰고 그에 대한 반동이 지금 정신을 넘어 육체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마치 예전에 목소리의 힘을 강제로 끌어 쓸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대장, 왜 벌써 일어났어?”

“시끄러워서.”

“시끄럽다고?”

시중을 들기 위해 방으로 들어선 고트는 블라드의 대답에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엄청 조용한데?”

블라드의 말과는 달리 시끄럽기는커녕, 엘프들의 숲답게 고요하고 청명한 아침이었다.

고트는 혹시 어제의 전투로 무언가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싶어 이리저리 손가락을 튕겨가며 블라드의 청력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혹시 어제 싸움으로 귀라도 다친 거 아냐?”

“아니야.”

확인해보고 있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애새끼들 시끄럽네. 진짜.’

지금도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삐약거림에 블라드는 그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고트는 모를 것이다.

지금 이 방안에서 삐약거리고 멍멍거리고 푸르릉대는 어린 녀석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마치 제집이라도 된다는 듯 블라드의 머리에 앉아 있는 어린 새가 날지도 못할 작은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다.

“하아.”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어린 녀석들의 난동에 블라드는 그만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았다.

너무 강하게 불러일으킨 깊은 세계는 마치 바닥을 휘저은 연못 마냥 아직도 블라드의 심상 세계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아마 며칠간은 이 녀석들의 채근에 잠을 못 이루지 않을까.

“······.”

정령들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린 블라드는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침대 옆에 놓여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린 정령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은색의 검.

아침에 햇살에 따라 비치는 모양새가 고고하다.

“그런데 대장. 이 검은 뭐야? 처음 보는 놈인데.”

누가 보아도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보이는 검.

처음 보는 검을 향한 고트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고 블라드는 그 질문에 대해 솔직히 답해주었다.

“소드마스터의 검.”

“응?”

“소드마스터의 검이라고 하더라고. 엘프들이 그랬어.”

어젯밤 자신과 함께 해주었던 은색의 검.

블라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소드마스터의 검이 반짝여 대었다.

“소······드마스터? 소드마스터?”

“너까지 시끄럽게 하지 마라. 안 그래도 골이 울리니까.”

전설이자 명예.

이 세상 모든 보물 속에 숨겨놓아도 확연히 자신의 빛을 뽐낼 고고한 은색의 검.

그러나 그 검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동자는 복잡하게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이건 확실히 물어봐야 되겠어.”

용을 잡겠다고 말한 남자.

이제는 잊혀 버린 정령들의 세계를 보는 남자.

그리고 황실의 검을 사용하는 남자.

분명 그 남자는 환상 속에서 자신에게 이 검을 건네주었었다.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그렇게.

2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4화 22

부서지는 목줄 (2)

끔찍한 악몽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수의 아래.

니드호그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작업이 분주한 곳으로 늙은 기사가 찾아왔다.

“내가 잠시 이 녀석의 시체를 보아도 괜찮겠소?”

“······그러시죠.”

한참 용의 시체를 갈라내던 엘프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길을 내주었다.

인간들의 기사 오귀스트.

그는 분명 세계수를 지켜준 은인이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대하기 미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것 참 고맙군. 용의 사체를 관찰할 기회는 얼마 없어서 말이오.”

반가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꺼려지는 존재.

평생을 무언가를 조사하던 늙은 수사관은 너무나 익숙한 반응에 그저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어디 보자. 시작은 왼쪽 눈부터군.”

이곳에서의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오귀스트는 이제야말로 은퇴한 기사다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흥미가 생기는 일을 따라온 것에 불과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피막 안쪽까지 베어내었고.”

니드호그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검의 흔적은 마치 물결치듯 흘러나가 피막 안쪽에 있는 겨드랑이까지 닿고 있었다.

“이게 치명타였군.”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심장까지.

오귀스트는 이것이 니드호그의 숨을 끊어놓은 치명타임을 간파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단 말이지.’

승리를 확신했음에도 블라드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이어진 상처는 마치 뼈와 살을 발라내듯 결을 따라 그어나가 오귀스트가 반쯤 잘라놓았던 꼬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끝을 확신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검술이라 할지라도 뻗어낼 때는 각자의 개성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검에도 아직 피어나지 못한 강렬한 개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오귀스트가 알아본 그 개성의 이름은 바로 잔인함이었다.

“이거 골 때리는 놈이로군.”

오귀스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많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아왔던 인간 군상 중에서도 이 녀석만큼 판단하기 힘든 녀석은 없었다.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하다.

황실의 검을 쓰는 북부의 어린 기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흔만큼이나 모순적인 존재였다.

※※※※

창가를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이제는 완연히 느껴지는 봄의 기운을 느끼며 블라드는 서둘러 머리 위를 털어내었다.

“이제 너희들 집으로 가면 안 되냐? 제발 좀.”

블라드의 손놀림에 테이블로 철퍼덕하고 떨어진 작은 털 뭉치 하나.

병아리처럼 생긴 정령 하나가 화가 난 듯 뭐라 삑삑 대기 시작했지만 블라드는 어린 정령의 몸짓을 무시한 채 그저 웃옷을 벗어낼 뿐이었다.

“조용해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보이기는 하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마치 폭풍처럼 불러일으켰던 심상 세계가 이제야 좀 잠잠해진 것을 느끼며 블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좀 더 확연한 오러를 내뿜기 위해 깊은 세계에만 집착해왔던 블라드였으나 이번 일을 겪고 나서부터는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약이 너무 좋은데.”

자신에게 달라붙던 어린 정령들을 다 털어낸 블라드는 몸 곳곳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며 혀를 내둘렀다.

검날을 잡았을 때 생긴 손바닥의 흉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니드호그와의 대결에서 얻은 상처들도 이제는 붕대가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 좀 달라고 해야겠다.’

훌륭한 약은 여벌의 목숨과도 같다.

평생 자잘한 상처를 달고 살아온 블라드는 엘프들의 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아. 그걸 벌써 풀면 어떡하지?”

작은 것들이 여기 좀 보라며 계속해 북적대었으나 들려오는 소리만큼은 하나도 없는 조용한 방.

그 방의 고요함을 깨트리며 방으로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요.”

“상처가 깊숙했단 말이야. 뼈에 금도 가 있었다고.”

소녀가 하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만약 블라드의 상처를 평범한 방법으로 상처를 치료했다면 최소한 한 달은 넘게 정양해야 했을 부상이었다.

“빨리 다시 누워. 일주일은 더 여기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어떨 때는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지나치게 어려 보이지만 또 어떨 때는 현숙한 눈빛이 어려있다.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세계수의 신녀는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제쳐두고라도 블라드를 과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약이 좋네요. 이거 나중에 조금 얻어갈 수 있을까요?”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화제를 돌려보려 애썼다.

“그리고 혹시 기침에 좋은 약이 없을까요? 부작용이 없는 걸로다가.”

청명한 녹색빛을 지닌 압실론을 보며 맨 처음 떠올린 사람은 바로 요제프였다.

항상 기침을 달고 살던 자신의 주군은 언제나 북부의 차가운 공기에 고통스러워하고는 했었으니까.

분명 엘프들이라면 요제프에게도 맞는 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귀한 약이라면 분명 돌아가는 길에 훌륭한 선물이 되어주겠지.

“기침······약?”

약을 내어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소녀.

블라드를 마주하던 소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아주 잠시 반짝였다.

“······.”

블라드는 소녀가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자신의 눈동자를 통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달라면 주겠는데 크게 의미는 없을 거야.”

어느새 약병으로 고개를 돌린 소녀는 다시금 블라드가 알고 있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가 이렇게까지 일찍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가지고 태어났던 생명력이 강렬하기 때문이야.”

소녀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약을 가져가 봐도 그 사람에게는 큰 소용이 없을 거야. 우리의 약은 그런 거거든.”

“······그렇군요.”

마치 누구에게 줄지 알고 있다는 말투.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그만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언가 확연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납득이 되고 마는 그런 느낌이었다.

똑똑똑.

소녀의 신비로운 기운에 한참 알 수 없던 상념에 빠져있던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는 그렇게 순간순간 블라드를 환상과도 같은 분위기 속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누구십니까?”

벌컥벌컥 문을 열어대는 소녀와는 달리 정중하게 자신이 왔음을 기별하는 소리.

손님이었으나 방의 주인 된 도리로 문을 연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감청색 눈동자를 지닌 엘프였다.

“잘 지내고 있었나? 그동안 일이 바빠서 들여다보지 못해 미안하군.”

레인저들의 대장. 바라디스.

그가 문턱에 기대어 서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자네 방이라도 해도 옷은 좀 입고 다니지 그래. 신녀님도 계시는데 보기가 좋지 않군.”

바라디스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넘어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듯 양손을 흔들며 바라디스를 반기는 소녀.

방 안에 오직 블라드와 소녀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바라디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약을 좀 바르느라······.”

“그래. 거동이 불편하니 그럴 수도 있겠군.”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바라디스는 곧 침대 위에서 웃옷을 집어 들고는 블라드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다 안 발랐는데.”

“괜찮아. 그 정도면 다 나았어.”

웃옷을 받아든 블라드는 멍한 눈빛으로 바라디스를 바라보았다.

“어서 입으라니까?”

웃고 있었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굳어 있는 바라디스의 표정.

그리고 그의 어깨 뒤에서 어느새 다시 평범한 눈빛으로 돌아온 소녀까지.

블라드는 왜인지 모르게 그 둘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 같았다.

※※※※

“늙은 기사가 자네보다 먼저 면담을 신청했어. 그래서 그 일을 처리하느라 장로님들이 조금 늦게 부르신 것 같네.”

“그런가요.”

손님에게 내어주었던 건물에서 나와 세계수 쪽으로 향하는 블라드와 바라디스.

그 둘을 보는 엘프들의 눈이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정확히는 블라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정령들을 보며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장로님들이 자네를 잊으신 게 절대 아니야.”

“바쁘셨겠지요. 이해합니다.”

블라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니드호그의 발톱에 맞서 자신에게 마법진을 씌워주었던 늙은 제로니모를.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엘프들의 대장로를 보았던 블라드는 충분히 엘프들의 난감함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의 검과 갑옷이 다 깨져나가 안타깝게 되었군.”

엘프들의 타격도 분명 컸지만 블라드 개인에게 있어서도 니드호그의 토벌은 큰 손해를 안겨준 일이었다.

기사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검과 갑옷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가호는 제쳐두고라도 그 둘의 값만 따져도 20골드는 족히 나가는 물건들이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은색의 검을 바라보았다.

차마 허리춤에는 찰 수 없었던 소드마스터의 검.

그러나 블라드는 그 검의 무게가 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무거워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니드호그를 향해 뻗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무게는 블라드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지.”

세계수 앞에 세워진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바라디스는 내뻗는 손을 통해 블라드를 안으로 안내했다.

“······.”

곳곳에 햇살이 비치는 거대한 건물 안.

마치 나무의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에 블라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숲의 향기가 났다.

“올라가지.”

마치 계단처럼 새겨진 그루터기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올라선 그곳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라디스입니다. 세계수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시게.”

끼이이익-

안에서 들려오는 허락의 의사와 함께 누가 밀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열리는 문.

“······.”

그 안으로 들어선 블라드는 곳곳에서 비치는 햇빛에 잠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친숙한 기분이 들었으나 모든 것을 크기로 압도하는 거대한 공간.

그 안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장로들의 눈이 조용히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블라드를 대하는 장로들의 태도가 온화하다.

증오해 마지않는 제국민이자 어리디어린 인간이었음에도 세계수를 지켜주었다는 사실은 완고한 장로들의 태도를 바꾸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동안 편하게 지내셨는지 모르겠군.”

“제집같이 편안한 밤이었습니다.”

무기도 갑옷도 잃은 채 상처를 입고 누워있던 기사.

단순한 예의로써 말하는 것이 아닌 그동안 블라드에게 보여주었던 엘프들의 관심은 극진한 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러나 아무리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할지라도 블라드에 대한 은혜의 값이 다 치러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날, 블라드가 니드호그에 맞서 세계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우슈린에 울려 퍼지는 것은 뚝딱거리는 망치 소리가 아닌 슬픈 울음뿐이었을 테니까.

“검도, 갑옷도 모두 잃었다 들었네. 물론 우리는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줄 생각일세.”

대장로를 대신해 회의를 주관하고 있던 장로는 손을 뻗어 옆에 걸려 있던 무구들을 가리켰다.

“이건.”

“갑옷일세. 하나는 밖에 입을 갑옷이고 또 하나는 안에 받쳐 입을 갑옷이지.”

블라드의 눈길이 장로의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오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의 갑옷.

산 로지로에서 준 갑옷과 흡사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렵하게 생긴 것이 척 봐도 가벼워 보이는 갑옷이었다.

기민함을 중시하는 엘프들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난 갑옷이었다.

“그래도 부서진 갑옷 중에 멀쩡한 부분이 하나 남아있어 새로운 갑옷에 부착해보았네.”

장로의 설명을 따라 블라드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왼쪽 가슴의 흉갑 부분.

그곳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낯익었다.

“아이들의 숨결을 지켜준 기사. 자네에게 참 어울리는 문구라고 생각하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부터 이곳 세계수에 이르기까지.

어린 기사의 발걸음은 언제나 똑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검 말이네만······.”

갑옷을 주었으니 이제는 검을 내어줄 차례.

그러나 다음을 말하는 장로의 말끝은 희미하게 옅어질 뿐이었다.

어린 기사가 들고 있는 은색의 검.

아무리 자신들이 다른 것을 내어준다고 해도 대체할 수 없을 검.

오랫동안 세계수를 지켜왔던 소드마스터의 검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네. 아쉽지만 우리가 다룰 수 없는 검이기도 하니······.”

소드마스터의 검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는 그 검을 뽑아 세계수를 지켜내었으니 충분히 이 검을 휘두를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여기서 블라드가 검을 가져가겠다고 말해도 어쩔 수······.

“돌려드리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

가능성과 의외성의 덩어리.

그가 지금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은색의 검을 천천히 내려놓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장로들은 천천히 검을 내려놓는 블라드를 보며 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엘프라 해도 탐낼 수밖에 없는 기물이었다.

“싫다고 하네요.”

“······뭐?”

“여기서 떠나기가 싫다고 합니다. 이 검이.”

땅에 내려놓자마자 척하니 달라붙는 은색의 검.

바닥에 딱 붙어버린 은색의 검을 보며 장로들과 바라디스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을 내어주실 거라면 새로 하나 만들어주시죠.”

가장 좋은 검은 필요 없다.

나는 오직 나만의 검이 필요할 뿐.

온전히 나만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그런 검이 가지고 싶다.

“제 말을 잘 듣는 검이었으면 좋겠네요.”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보다 소년은 대장간에 걸려 있던 희미한 별 하나가 가지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의 검.

블라드는 아직도 장식 없는 검이 그리웠다.

노인의 꿈으로 만들고 소녀의 눈물로 샀었던 그 검이.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5화 17

별을 불러온 어린 것들

늦은 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북소리.

그 소리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소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넓게 퍼져간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횃불들보다도 소녀의 치맛자락으로 안기는 빛들이 더욱 선명하다.

“떠올리게.”

늙은 제로니모의 말대로 블라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소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떠올리게나.”

주문을 외우는 장로들.

무기를 든 채 지키는 전사들.

그리고 어린 세계수에서부터 내려오는 빛방울들.

블라드는 자신의 어깨로 맺히는 정령들을 느끼며 깊은 내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가져가려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오직 스스로에게 있을 것이다.

블라드의 명상과 함께 너풀거리는 비단에 감겨 있던 푸른 금속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올라 빛나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그 빛과 반짝임과 함께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그러자 보이는 풍경 하나.

그리운 대장간의 모습 위로 밝게 떠 있는 장식 없는 검이 보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온다.

늙은 대장장이가 검을 내려치는 소리가.

※※※※

“그래, 너는 여기에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하던데요. 의식을 통해서 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행장을 꾸려놓은 오귀스트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받을 건 받아 가야지.”

임무의 마무리를 위해 이제는 떠나야 하는 오귀스트와 받을 것이 있어 남아있어야 하는 블라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들어왔으니 떠나는 시기가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나도 궁금하군. 너의 스승이 누구인지 말이야.”

태어난 뿌리는 몰라도 들고 있는 검의 뿌리는 찾고 싶은 어린 기사.

블라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오귀스트는 떠나기 전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황실의 검은 몰라도 용살자를 기록한 명단은 수도인 브리간테스로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드라굴리아 가문은 용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있거든.”

용을 죽이기로 맹세한 용들.

용과 관련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드라굴리아 가문에는 여태껏 용을 살해했던 모든 용살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마 블라드의 이름도 가장 밑부분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명단 안에 네 스승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황실의 검을 사용함과 동시에 용을 살해한 남자.

현재까지 그 두 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단 한 명뿐이었다.

가장 고귀한 검으로 가장 날카로운 용에게 맞선 기사.

건국왕 프라우센.

티잉-

“······?”

둘 사이에 내려앉은 잠시간의 침묵을 오귀스트가 손가락 사이로 쇠붙이 하나를 튕겨내었다.

낡고 녹슨 보잘것없는 동전 한 닢.

“내 이름은 오귀스트다.”

오직 가장 낮은 자들만 건네줄 수 있다는 동전.

블라드는 라문드가 건네준 적 있는 두카트를 받아들고는 오귀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중에 네 검을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이름을 대도 좋다.”

황실의 검을 사용하는 어린 기사.

비록 개성이 꽃피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많이 미숙한 그를 위해 오귀스트는 자신의 색깔까지 덧칠해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블라드의 근원을 알아볼 정도라면 자신의 기술인 약점 간파까지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걸리지는 말고.”

비록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던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전 헌병대장의 이름값이라면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것은 막아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귀스트 님.”

“너한테 내 이름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오귀스트는 자신을 향해 묵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짧았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제국에 충성했던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희미한 흔적 하나만은 남긴 것 같아 무언가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나중에 브리간테스에 오면 한번 찾아와라.”

그 말과 함께 오귀스트는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떠나가는 늙은 기사.

들어올 때는 무거운 의심을 지니고 왔으나 나갈 때는 한결 가벼워진 그의 어깨가 경쾌해 보였다.

“······.”

블라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바닥에 놓인 낡은 동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두 닢이 된 두카트.

보이는 것보다는 무거운 동전을 쥔 블라드는 품속으로 명예의 값을 집어넣었다.

※※※※

“할아버지는 갔어?”

“네.”

이제는 블라드와 고트만이 머무는 손님방.

그러나 정작 이곳에 있어야 할 고트는 항상 어디론가 쫓겨나고 블라드와 마주하는 사람은 이름 모를 소녀뿐이었다.

“다행이다.”

“왜요?”

“······말 안 할래.”

가끔씩 내뱉는 소녀의 말은 두서가 없다.

주어가 없고 목적어가 없으며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말할 뿐인 소녀였으니 그녀 또한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데어마르라는 곳에 정말 하얀 뱀이 있어?”

“······엄청 크죠.”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소녀의 의도를 읽은 블라드는 어깨를 타고 오르는 강아지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대답했다.

“여기 있는 애들은 전부 한입에 삼킬 정도로요.”

마치 놀아달라는 듯 헥헥거리며 눈을 빛내고 있는 강아지는 꼬리가 불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번 보고 싶다. 굳이 따지자면 얘네들 삼촌 정도는 되는 정령이겠는데.”

“정령들 사이에도 족보가 있나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어.”

어머니 세계수에서 태어났을 것이 분명한 하얀 뱀.

어린 세계수의 신녀는 태어나 한 번 보지 못했던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잊혀 버린 흔적들을 곱씹으며 의식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저는 그냥 튼튼한 장검 하나만 있으면 돼요. 여기 보니까 대장간도 있어 보이던데.”

“싫어. 내가 해줄 거야.”

한참 오래된 고서를 내려다보던 신녀는 부루퉁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다들 해주고 싶다잖아.”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린 정령들이 각자 입을 열며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아마 낑낑, 짹짹거리고 있겠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어차피 무조건 한 번은 해봐야 한단 말이야. 내가 못하면 다 잊히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이어지지 않는다면 잊히고 만다.

선배가 후배에게, 전대가 후대에게 이어줘야 하는 수많은 의식은 이제 몇 권의 오래된 책으로만 남아있었을 뿐, 소녀에게 친절히 가르쳐줄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에 끊겨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다려봐. 우리가 이쁜 거로 하나 만들어줄 테니까.”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만은 아니었다.

여기 이곳에도 스스로 길을 찾아 무언가를 이어야만 하는 소녀가 있었다.

“천천히 하세요.”

때로는 나눠들 수 없는 짐도 있는 법.

오직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짐을 짊어든 소녀에게 감히 손을 내밀어줄 수 없었던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기름 먹인 천을 들고는 호르헤의 단검을 손질하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를 보며 소녀는 가만히 들고 있던 책을 치켜세웠다.

얼굴은 가렸으나 쫑긋거리는 귀와 황금색의 눈동자만큼은 블라드를 향해 있었다.

※※※※

새하얀 보름달이 뜬 밤에 아우슈린의 엘프들이 모두 세계수의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거 부담되는데 대장.”

“그냥 축제 같은 거라고 생각해.”

마을의 온 엘프가 모여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블라드와 고트는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직도 둘은 왜 검을 만드는데 대장간이 아닌 이곳에 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은 엄격하지만 달은 자애롭지. 그녀라면 아주 잠깐 정도는 눈을 감아줄걸세.”

잡고 있는 지팡이는 부들거렸으나 목소리만큼은 또렷했다.

이제 거동할 만큼은 회복되었는지 제로니모는 천천히 걸어와 블라드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떠올려 보게나. 자네가 원하는 검의 형상을.”

“그냥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블라드는 제로니모의 말을 들으며 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천을 두른 소녀.

그 소녀의 머리 위에는 꽃과 풀로 엮은 자그마한 관(冠)이 얹혀 있었다.

“선명하고 강렬하게 떠올릴수록 좋겠지.”

“알겠습니다.”

볼 때마다 새롭고 달라 보인다.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소녀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것을 느낀 블라드는 제로니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준비하게.”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주위의 공기.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에 의해 긴장되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시작하시지요. 신녀님.”

거창한 시작은 없었다.

자그마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만이 존재했을 뿐.

그 소리에 맞춰 일어선 소녀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는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엘프들의 언어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소녀는 블라드에게로 다가와 들고 있던 천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것만 같은 형상이었다.

북소리가 커진다.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그 소리를 타고 넓게 퍼져나간다.

주위에는 어린 정령들의 수선함이 가득하다.

까앙- 깡-

그리고 그 소리들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떤 망치 소리.

블라드는 그 소리에 집중하며 좀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

새까만 어둠.

블라드는 나풀거리는 나비의 인도를 따라 어두운 진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 와닿는 질척임이 낯익었다.

찐득거리며 달라붙는 진창은 어린 소년에게 있어 벗어나기 힘든 존재였지만 지금의 블라드에게는 그저 잠시간의 불쾌함일 뿐이었다.

까앙! 깡!

저 멀리서부터 그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날아간 하얀색의 나비가 조용히 낡은 대장간의 문틈 사이에 앉아 있었다.

“······.”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나비가 앉아 있는 대장간을 바라보았다.

대장간의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별 하나.

이제는 검의 모습이 아닌 빛이 되어 있는 장식 없는 검이 가만히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블라드는 나비의 인도와 함께 대장간 앞, 깊게 새겨진 발자국을 넘어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

그리고 쉼 없이 들려오는 망치 소리.

“저 왔어요.”

“그래. 왔냐.”

블라드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똑바로 마주치면 사라질 것만 같은 신기루 속에서 늙은 대장장이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으니까.

“검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요.”

“검?”

노인은 이제 더는 검을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늙은 육체와 보잘것없는 화로로는 제대로 된 검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 잘 왔다. 마침 좋은 재료가 들어왔거든.”

그러나 지금은 그리 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늙은 육체와 낡은 도구는 더는 걸림돌이 될 수 없었으니까.

“이게 운석이라는 건데, 별에서 떨어진 금속이라 불순물도 없고 아주 단단한 거거든.”

가래 낀 목소리가 아닌 힘이 넘치는 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미소를 지었다.

“크기는 장식 없는 검정도였으면 좋겠네요. 처음 들었던 녀석이라 그런지 저도 그 녀석에게 길들었나 봐요.”

“사실 나도 그 정도밖에는 못 만들어.”

의뢰를 받아든 늙은 대장장이는 힘차게 망치를 들어 내리쳤다.

까앙-!

화로에서 불을 지피는 강아지의 자그마한 꼬리가 요란하다.

망치 위에서 노니는 작은 뱁새가.

물통을 차갑게 식히는 어린 복어가.

쉴새 없이 검에 모래를 퍼붓는 새끼 도마뱀이.

장식 없는 검은 소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값을 치러주었지만, 지금 만들어지는 검은 어린 정령들이 대신 값을 치러주고 있었다.

“다 됐다.”

“······벌써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기에 이곳에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문가에 앉아 있는 하얀 나비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이제 가 봐라.”

블라드는 어느새 묵직하게 들려오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마치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하얀 천 사이로 보이는 푸른 빛.

장식 하나 없었지만 푸르게 빛나는 검이 그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6화 16

돌아온 탕아 (1)

겨울의 끝자락이 저물고 있었으나 이곳만큼은 지금도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다가오는 봄의 온기조차 데울 수 없는 차가운 자리.

그곳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빛이 마치 검과 같이 날카롭다.

“겨우 그딴 말을 지껄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북부 유일의 공작.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

그가 지금 냉막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내려보고 있었다.

“용의 조각을 내어주면 돌아가겠다니. 지금 나에게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서부의 로마노프는 이미 멸문했다.

맹약을 주시하던 순례자들은 로마노프가 보관하던 용의 조각을 가져와 북부의 손에 맡겼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중 하나를 내어달라 말하는 중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용의 가능성은 모일수록 완벽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린드부름도 그 가능성에 이끌리지 않았습니까?”

“······.”

역시 용에 관한 일만큼은 이들에게 숨길 수 없다.

용살기사단에서 보내온 집사장 데비어스는 이미 티무르가 두 개의 조각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 부담을 저희 드라굴리아가 나눠지겠습니다. 부디 저희의 제안을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그 안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저 착각일까.

데비어스를 바라보는 티무르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강철공께서 용이 아닌 북부에 대해서만 온전히 신경을 쓰신다면 이번의 일도 충분히 바라노프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데비어스의 제안을 들은 강철공 티무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국, 드라굴리아는 지금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중이었다.

용의 조각이냐 아니면 우트만 남작가이냐.

그러나 둘 중 무엇을 선택한다 한들 티무르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손해일 뿐이었다.

“강철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저 아래 고개 숙인 남자의 눈빛이 불길하다.

용이 보낸 비둘기.

그 비둘기가 내뱉은 전서구에는 지금도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소드마스터께 한 맹세 또한 그럴 것이다.”

고민을 떨쳐내듯 머리를 쓸어올린 티무르.

결정을 마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데비어스를 향해 내려왔다.

“가서 용혈공께 전해라.”

북부의 지배자이며 맹약의 수호자.

소드마스터가 인정한 가문 바라노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비어스에게 다가간 북부의 사자는 차가운 입김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그 너절한 발톱을 치워라. 몰락한 용아.

강철은 용에게 굽힐 생각이 없으니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은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단순히 맹약 때문이 아닌 냉정한 군주로서의 판단도 이 결정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목줄 잡힌 용에게 가능성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우트만 가문에 대해서는 우리도 지원하도록 하지. 사특한 존재를 받아들인 자들과는 어깨를 마주할 수 없을 테니까.”

공고했던 북부 연합 중 한 축을 담당하던 가문은 거멓게 썩어버렸다.

그러니 잘라내야만 한다.

온전히 북부의 힘으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서나 봄이 찾아오고 있었으나 여전히 북부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뿐이었다.

※※※※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이리저리 퍼져나간다.

테이블 위에서 이리저리 산란하는 햇빛을 보며 블라드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검, 검집, 갑옷······.”

고트는 햇빛을 따라 반짝이는 엘프들의 무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게 다 얼마야?”

“저리 꺼져.”

감히 자신의 무구에 값을 매기는 불손한 종자를 보며 블라드는 고트를 발로 쳐 테이블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니, 잠깐 생각해 볼 수는 있는 거잖아.”

“너 방금 눈깔 돌아갔었어. 이게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그랬어?”

고귀한 기사 속 여전히 존재하는 뒷골목 양아치의 모습에 고트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매끈한 귀족의 모습이었지만 평생을 투쟁하며 살아온 블라드의 안에는 여전히 잠재우지 못한 사나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목숨 건 보람이 있다. 그렇지 대장?”

“······조용히 좀 해봐.”

자신이 모시는 기사가 두둑이 보상을 받았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엘프들에게 받은 보상은 고트와 나눌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는 것이다.

“검집은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었다 했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검집에는 가공을 했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나무결이 남아있었다.

만들어낸 장인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재료의 기운이 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독특한 감성을 안겨주고 있었다.

“관절 부분이 유연하네?”

“게다가 얇아.”

엘프들이 내어준 판금 갑옷은 분명 철로 만들었음에도 날렵해 보였다.

아마 기민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곳저곳 비워놓은 부위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슬갑옷······.”

그러나 갑옷에 비어있는 부분이 많다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은색의 내갑의(內甲衣).

엘프들이 내어준 사슬갑옷은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옷처럼 보일 정도로 촘촘하게 꿰매어져 있었다.

“이건 그냥 옷처럼 입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기존에 내갑으로 입고 있던 솜갑옷(gambeson)은 기능성은 좋을지 몰라도 편의성은 영 꽝이었다.

냄새며, 더위며, 무엇보다 날렵한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들고 있는 사슬갑옷은 몸에 꼭 맞을 뿐만 아니라 가볍기까지 했으니 블라드의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고트. 안내해 드려.”

굳이 입으로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리는 소녀.

고트는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고는 방문을 열며 소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신녀님.”

“블라드 어때? 마음에 들어?”

환한 미소로 맞이했건만 들어서자마자 블라드만 찾는 소녀를 보며 고트의 표정이 씁쓸하게 굳어져 갔다.

“너무 좋은데요. 제 평생 이런 장비들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

마치 자신을 향한 칭찬인 양 소녀의 귀 끝이 조금은 빨개져 있었다.

“미안해. 내가 제대로 못 만들어서.”

소녀의 사과와 함께 블라드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검을 향했다.

옅은 푸른 빛이 감도는 장검.

세계수와 소녀, 그리고 어린 정령들이 운석을 두들겨 만든 검은 형태는 투박했을지라도 기세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었다.

“우리가 처음 해봐서 그래. 제대로 못 만들었어.”

그러나 형태는 갖췄을지 몰라도 눈앞에 있는 검은 완성품이라 할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희미한 기록을 따라 어린 것들이 처음 시도해 보는 의식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날은 세웠는데 담금질은 제대로 못 했대. 그래도 쓸 만은 할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톡톡거리며 바닥을 차는 발끝.

블라드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소녀가 지금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신녀님”

소녀는 내구도에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분명 되었다고 했다.

혹시나 자신의 검이 블라드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했던 그였기에 정말 쓰지도 못할 검이었다면 애초에 내어주지도 않았을 것을 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검입니다.”

장식 없는 검을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검은 블라드가 바라볼 때마다 미묘하게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빛을 볼 때마다 블라드는 가슴 속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정말 다행이고.”

블라드의 말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재빨리 편지 하나를 건네며 웃음 지었다.

“이건?”

“하이날의 영주, 알리시아 님에게 보내는 내 편지야. 호박석에 대해 미안하다고 썼어.”

세계수를 지켜낸 블라드는 합당한 보상을 받았지만 정작 가보를 잃어버린 알리시아에게는 마땅히 내어줄 것이 없었다.

아마 이 문제는 개인 간의 협상이 아닌 하이날과 아우슈린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혹시 신녀님 것만······.”

“대장로님 것도 들어있어.”

“그렇군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녀의 편지만 전해주기는 불안하다.

그러나 현명한 대장로 제로니모의 편지까지 들어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리시아에게 민폐만 끼치는 그녀의 기사는 들고 있는 편지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만 같았다.

“아마 조만간 우리들도 하이날이랑 도브레치티에 사신을 보낼 거야. 그곳에 있는 정령들도 만나보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어차피 엘프들도 인간들과 인연을 맺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영주들과 맺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댈 곳이 몇 없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도 비록 멀긴 하지만 아우슈린이라는 세력은 충분히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거.”

편지와는 다르게 꼬깃하게 접혀 있는 쪽지 하나.

마치 네잎클로버처럼 접혀 있는 쪽지는 분명 소녀가 개인적으로 전하는 물건이었다.

“이거는 나중에 갈림길에 들어서면 열어봐.”

“······갈림길이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싶어 블라드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소녀.

애써 들어 올린 까치발이 소녀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그럼 잘 가. 내일은 배웅 못 할 거야.”

“······.”

그저 할 말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 소녀.

그러나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블라드의 모습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여태까지 계속 궁금했던 건데요.”

“뭔데?”

이제는 이별이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소녀는 여전히 자신을 보며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태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이름과 이름을 전하며 인연을 튼다.

당연히 블라드는 그러한 예의에 따라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었지만.

“······이름?”

그러나 블라드의 물음을 들은 소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을 뿐이었다.

파닥이는 귀가 점차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름은 왜?”

순식간에 가라앉은 침묵.

고트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인간의 상식과 엘프의 상식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쫑긋 세워진 소녀의 귀가 점점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

“들어올 때는 눈밭이었는데.”

“아우슈린의 겨울은 짧지. 세계수는 추운 것을 싫어하거든.”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저 멀리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언덕은 여전히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여기까지군.”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프와 인간들의 세계를 경계선.

그 앞에 선 누아르가 나가기 싫다는 듯 푸르륵 대었지만, 이들의 세계는 아우슈린에 있지 않았다.

“아우슈린은 자네가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을걸세.”

비록 감사하다 말하고 있지만 묘하게 딱딱해진 바라디스의 목소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소녀의 이름을 물어봤던 일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이름이라는 개념이 인간들보다 훨씬 민감한 부분이니까 앞으로도 조심하고.”

“······네.”

바라디스는 자신을 바라디스라 소개했지만 진정한 뜻을 지닌 이름은 아니라고 했다.

아마 그것을 내보이거나 물어보는 행위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꽤 민감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블라드는 원치는 않았지만, 또다시 실수를 통해 견식이 넓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바라디스는 블라드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신녀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바라디스는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경고를 남겨주었다.

지금 세계수의 신녀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소녀는 자리에 누워 앓는 중이었으니까.

분명 블라드라는 기사에게 건넨 계시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걱정해줘서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세계수를 지켜줘서 고마웠네. 다음에 또 볼 날을 기다리지.”

바라디스의 인사와 함께 누아르의 등 위에 타고 있던 정령들이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개, 꼬리, 머리 등등.

각자 흔들 수 있는 부위를 흔들어 대며 아우슈린을 나서는 기사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드는 레인저들과 정령들.

블라드의 눈으로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어 희미해 보였지만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려대었다.

“가자.”

“응. 대장.”

말머리를 돌리는 기사와 종자.

검은 말 뒤에서 하얀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 깃발의 한쪽에는 지금 보이는 세계수와 꼭 닮은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

“그런데 대장. 앞으로 어디로 갈 거야.”

종자인 고트가 블라드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의 목표를 정한 것은 블라드였으니까.

“······.”

세 갈래의 갈림길.

그러나 그 갈림길에 선 블라드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쪽지를 읽어내려가는 블라드의 미간이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어디지?”

“우리가 왔던 곳이잖아. 이곳으로 가면 타노보를 거쳐서 도브레치티까지 이어지겠지. 쇼아라로 돌아갈 거라면 이 길이야.”

내심 돌아가자 말해주길 바란 것 같은 고트였으나 블라드는 조용히 중앙의 길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로 가면?”

“중간 길로 가면······.”

고트는 재빨리 지도를 꺼내고서는 혀를 빼물었다.

“중부 지역을 관통하게 될 거 같은데. 일단 제일 가까운 도시는 마르시아야.”

“그럼 이곳으로 가자.”

소녀가 전해준 쪽지를 꾸깃하게 쥐어든 블라드는 누아르의 고삐를 잡고는 중간의 길로 나아갔다.

“왜 그 쪽지에 왼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쓰여 있어?”

“······왼쪽으로 가면 뭐가 있는데.”

가장 넓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누아르와 고트의 말.

갈림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어온 블라드는 그제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고트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봤는데. 왼쪽으로 가면 수도 브리간테스로 향하는 가도(街道)랑 만나더라고.”

“그래?”

“응. 영감님은 아마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고트의 말에 오귀스트를 떠올린 블라드는 괜스레 입맛이 써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지막 인사로 브리간테스로 오면 자신을 찾아오라 말했으니 아마 고트의 말대로 수도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용살자 명단은 나중에 봐야겠군.”

블라드는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는 소녀가 건네주었던 쪽지를 불태웠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종잇조각들.

-절대 왼쪽으로는 가지 말 것.

불타오르는 쪽지에 적혀 있던 자그마한 글씨.

소녀가 블라드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준 것은 감사나 안녕의 의미가 아닌 단호한 경고였다.

2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7화 23

돌아온 탕아 (2)

구름조차 달을 감춘 밤.

곳곳에서 달라붙는 악의가 끈적하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흐르는 핏줄기가 이마를 따라 미끄러진다.

그러나 노쇠해 버린 늙은 기사는 더는 손을 들어 닦아 내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은 늙은이들에게 특히나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이런.”

막다른 길에 막히고만 늙은 기사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베어내고 달려오며 길을 열었건만 결국은 이들이 의도한 곳으로 이끌리고 말았다.

“그냥 편히 쉬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사내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남자.

“그러라고 은퇴까지 시켜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

금발에 푸른 눈.

미끈한 외모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법했으나 눈동자 속에 담고 있는 기세만큼은 누구보다 흉악한 자.

“보잘것없는 늙은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겠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스르릉-

사내의 손짓에 오귀스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마지막 예우를 갖추듯 정중한 모습으로.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이빨은 빠졌을지 몰라도 아직 발톱은 날카롭다네.”

마지막을 각오한 오귀스트의 눈빛이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은퇴했으나 하고자 했던 마지막 임무가 있었다.

엘프들은 막았으니 이제 자신이 가지고 온 증거들을 황실에 넘기기만 한다면 압실론에 대한 해악을 만방에 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임무였건만.

“설마요.”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늙은 기사의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직접 온 것 아니겠습니까?”

용살 기사단장 미르셰아.

그의 말과 함께 기사들의 검 끝이 오귀스트를 향해 치켜졌다.

용을 죽이는 자들의 살기가 늙은 기사를 향해 서늘하게 맺혀 들어가고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저희가 마련한 은퇴식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푸른 눈동자 속에 감춰져 있던 흉악함이 꿈틀거린다.

검을 뽑아 들었을 때는 고귀한 기사의 모습이었으나 자신을 향해 겨눌 때는 이빨을 치켜든 짐승의 모습이었다.

‘금발······푸른 눈.’

그리고 잔인함.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한 꽃을 피워올렸던 그 강렬한 개성.

그 개성이 지금 푸른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번뜩이는 악의들이 다가온다.

지치고 늙어버린 사자를 향해서.

그 사이에서도 가장 빛나는 악의를 보며 오귀스트는 엘프들의 숲에서 만났던 어린 기사를 떠올렸다.

‘개성이 아니었어.’

착각하고 있었다.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했던 그 아이의 흔적.

블라드가 내보인 잔인함은 스스로 개화한 개성이 아니었다.

끈적한 피를 타고 이어지는 포식자로서의 본능이었다.

구름이 다시 달을 감추었다.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허물어지는 누군가의 몸짓.

그 속에서 초록색의 찻잎들이 애처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찾아온 진실들이 그렇게 덧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

도시 마르시아.

로즈미츠 남작령의 유일한 도시.

특별히 오래되지도 그렇다고 영지 자체에서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이 도시는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인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블라드와 고트는 도시 마르시아를 향해 걸어가고······있지는 않았다.

“고마워 대장.”

“뭐, 어차피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블라드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고트를 보며 머쓱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은 지금 마르시아가 아닌 그곳에서 나흘 거리는 떨어져 있는 외딴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으니까.

마땅한 붙여진 이름도 없어 그저 등나무 마을이라 불리는 그곳은 고트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었다.

“얼마나 된 거야?”

“뭐? 집 떠나온 지? 어디 보자 한 6년은 된 거 같은데.”

“꽤 오래됐네.”

스물 중반은 되어 보이는 고트였으니 6년 전이라고 한다면 아마 성인이 되자마자 뛰쳐나온 것일 테다.

아니면 블라드처럼 그전에 나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엄마랑 동생들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나올게.”

“······.”

일행의 대장은 어디까지나 블라드였고 고트는 어디까지나 종자일 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평범한 기사와 종자 사이였다면 고트는 감히 고향 마을에 들렀다 가자고 말조차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고트는 블라드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요리는 잘하시냐?”

“······그럼! 우리 어머니가 해주시는 감자 스튜는 웬만한 여관에서 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거든.”

“그래?”

날씨는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아우슈린에서 목소리에 대한 단서도 찾아냈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목표도 잡은 상황이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잠시 휴가 같은 기분을 내도 될 테지.

“그렇게 맛있으면 한 이틀은 머물러도 되겠네.”

“······흐!”

타인을 냉정하게 대하는 블라드였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호르헤가 블라드를 보며 어느 골목에서나 대장을 할 녀석이라 평했던 것은 그저 실력이 뛰어남만을 보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기야.”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고향을 가리키는 고트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마을의 입구 옆으로 흐트러지게 쏟아져 내린 푸른 나뭇잎들.

조금 있으면 자주색으로 물들 꽃망울들이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의 탕아를 반기고 있었다.

※※※※

“정지!”

무장은 별거 없었지만, 눈빛만은 매서운 경비병이 블라드와 고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무슨 일로 우리 마을에 왔지?”

척 봐도 작은 마을이었으니 당연히 상비병은 아닐 것이다.

아마 마을의 젊은이 중 하나가 자경대의 역할을 하는 것일 텐데 이방인을 멈추는 솜씨가 꽤나 능숙해 보였다.

“톰슨. 나야 고트.”

“누구? 고트?”

말 위에서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고트를 보며 경비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잖아. 언덕 위에 방앗간 집.”

“아아. 그 고트!”

이제야 고트를 알아본 톰슨이라는 경비병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동안 어디 있다가 온 거야.”

“그냥 뭐 여기저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누아르의 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어색한 둘의 모습.

그리고 주위에서 멀뚱히 서 있는 다른 경비병들의 모습까지.

‘딱히 환영받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낯선 곳에 올 때마다 분위기를 살피고는 하는 블라드는 지금 고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적지근한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마을에서 나올 때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어머니랑 동생은 잘 있지?”

“그렇지. 별일은 없었지.”

그러나 고트는 이들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익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고트의 태도에 블라드는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건 반갑기는 한데. 조용히 있다가 갈 거지?”

“······금방 있다가 갈 거야. 하루 이틀 정도.”

오랜만에 본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을 먼저 내세우는 톰슨을 보며 고트는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촌장님한테 들러서 먼저 인사부터 해.”

창을 치워낸 경비병들의 사이로 조용히 고트가 고개를 숙이며 걸어 들어갔다.

“정지.”

“······?”

그러나 금세 다시 길을 가로막는 창들.

고트가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경비병들은 다시금 블라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봐. 톰슨. 그분은 내 손님이야.”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톰슨!”

큰 도시의 경비병들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지만 이곳은 작은 마을이고 이들은 그저 자경대일 뿐이었다.

마을의 주민이었던 고트가 신원을 보증했으니 그냥 넘어가 줄 법도 했으나 이어진 반응은 차가울 뿐이었다.

“너 이름 뭐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하아.”

고트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가 나고 자라온 마을의 앞에서.

블라드 안에 있던 뒷골목의 소년은 불쾌하고도 낯익은 공기를 느끼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내 이름은 블라드다.”

옥사나가 내어준 망토를 크게 젖혀낸 블라드는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에 손을 얹었다.

반짝이는 정령들의 검은 눈앞에 있는 자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흉포한 포식자의 기세.

마치 늑대 앞에 서 있는 토끼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톰슨은 등허리에 땀이 가득 차고 말았다.

이건 잘못 건드렸다.

“다시는 네놈 따위가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이제야 블라드가 쏘아낸 주박에서 풀려난 톰슨은 허리를 크게 굽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기사가 느낀 것만큼이나 흉포한 인성을 지닌 자라면 당장 검이 휘둘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례였으니까.

기세만으로 가볍게 경비병들을 제압한 블라드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고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대장.”

경비병이 가로막았기에 생긴 짜증이 아니었다.

언제나 넉살 좋게 웃고 있던 고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쓴웃음만이 맺혀 있을 뿐.

‘짜증나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왜 그렇게 움츠려 있는지.

블라드는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어.”

“응?”

고트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날아드는 하얀색을 보며 다급히 잡아냈다.

“······이건 왜.”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하얀 깃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귀족과 단체들의 문양이 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앞장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무심히 말하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고트를 위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떠날 때의 모습은 모르겠으나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당당해야 할 거 아니냐.

“······안내하겠습니다. 블라드 경.”

“좋아.”

눈치 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들은 고트를 보며 블라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를 담은 깃발.

그 깃발을 치켜든 기수를 보는 마을 젊은이들의 눈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기사님. 환영합니다!”

천천히 열리는 목책이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빛나는 깃발을 든 명예로운 기수.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떠나갔던 마을의 탕아는 지금 빛나는 깃발을 든 기수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줄기의 미소와 함께 앞장선 고트의 가슴이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

저게 누구야. 누군데 저렇게 출세했대.

걔 있잖아. 방앗간 집 둘째 아들.

그 반푼이가 돌아왔어? 아이고 밖에서 성공했나 보네.

오는 사람만 오는 자그마한 마을.

그렇기에 새로운 이방인이 당도했다는 소식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 반푼이였어?”

“······.”

“하긴 모자란 반푼이보다는 사기꾼이 낫지.”

들려오는 웅성거림에서 고트의 대한 평가를 확인한 블라드는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극악무도한 자이거나 과거가 복잡한 녀석이었다면 오랫동안 옆에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푼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이쪽으로면 가면 촌장의 집인데······.”

“너희 집부터 가자.”

“응?”

블라드는 요제프의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자각해냈다.

블라드는 이제 추레했던 뒷골목의 소년이 아닌 당당한 기사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촌장보고 너희 집으로 오라고 해. 찾아가기 귀찮으니까.”

과도한 예의는 자신을 낮출 뿐이다.

자리에 맞게 행동할 줄 알아야 그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법이었다.

“알았어.”

“너도 직접 가지 말고 아무나 잡고 말이나 전해.”

“응.”

어차피 고트 때문에 온 마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동안은 녀석을 조금 띄워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기, 저기 언덕 위에 있거든.”

“가 봐.”

자신의 앞에 다른 말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누아르도 이번만큼은 조용히 고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기사와 말은 그렇게 맞닿은 세계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점심 준비하나 봐.”

“그러게.”

저 앞에 보이는 외딴집 하나.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낡은 방아 하나가 보이는 집에서 굴뚝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나 왔어요.”

조심스레 울타리에 달린 문을 열어젖히는 반푼이.

떠날 때와 다름없는 고향 집의 모습에 고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겨 들어갔다.

“엄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부엌에서 나온 아낙네.

그녀의 모습이 고돼 보인다.

머리 위로 단단히 여민 스카프는 깨끗했으나 형편없이 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세월의 주름들이 새겨져 있다.

못난 아들이 차마 펴주지 못한 깊은 주름들일 것이다.

“고트? 고트니?”

여인이 들고 있던 주걱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고트야!”

“엄마.”

마을의 모두가 무시하고 있었지만, 그녀만큼은 두 팔을 벌려 고트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사고나 치는 탕아였지만 이 여인의 눈에는 누구보다 귀한 아들일 것이다.

“······오늘 점심은 감자 스튜인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는 두 모자를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땅바닥을 툭툭 쳐댔다.

“그러고 보니 가정식은 진짜 오랜만인데.”

무거워지는 눈망울을 애써 들어 올린 블라드는 물끄러미 굴뚝 위로 퍼져 올라가는 연기를 보았다.

알싸하게 퍼져나가는 주방의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블라드가 먹을 점심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내어주는 따뜻한 스튜일 것이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맛이겠지.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8화 10

돌아온 탕아 (3)

한 번, 두 번, 세 번.

스튜의 물을 맞추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어렸을 적부터 고트는 요리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만들어지는 향긋한 음식의 냄새를 기다려왔었다.

아마 지금의 농도가 딱 맞을 텐데.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고트가 기억했던 맛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고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부엌 앞에서, 마치 들켰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

늘어나는 양만큼이나 사라지는 스튜의 향기.

그때 어머니의 표정을 본 순간 고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고 말았다.

서늘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어린 고트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고 있었다.

가난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서로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들고 밑바닥만을 쳐다보게 한다.

고트는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이 빌어먹을 마을에서는 더는 고개를 들 기회가 없었으니까.

기도하던 용병을 만나기 전까지 등나무 마을의 고트는 그렇게 위를 바라볼 기회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

포크조차 필요 없어 보이는 단출한 식탁.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튜 안에서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감자 덩어리들이 블라드를 반기고 있었다.

“어찌 기사님의 입맛에 맞을지······.”

있는 것을 다해 차려놓은 상이었으나 고트의 어머니는 초라한 재료가 영 마음에 걸렸는지 연신 앞치마에 손을 쓸어내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오신다고 기별을 주셨으면 미리 고기라도 한 덩이 준비해놓는 건데······.”

아들과 함께 나타난 젊은 기사.

보이는 모습만 본다면 어디 근사한 귀족가의 자제였으니 시골 아낙네의 솜씨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닭은 안 키웠던 것 같은데.’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달걀을 보았다.

분명 들어왔을 때 닭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어디선가 다급히 꿔온 달걀들일 것이다.

한눈에 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으니 아들을 위해 무리를 한 것일 테다.

“드세요. 기사님.”

고트의 앞에는 두 알.

블라드의 앞에는 세 알.

그러나 차이 나는 이 하나의 달걀도 결국 자신의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안다.

블라드는 스튜를 입에 대기도 전부터 어머니의 맛을 느끼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블라드는 일부러 스튜의 국자를 크게 휘두르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이럴 때는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주인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구나. 이렇게 때마침 오다니.”

거리낌 없이 수저를 뜨는 블라드를 보며 안심한 고트의 어머니는 곧 아들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여지껏 연락도 없던 애가 여동생의 결혼식에 맞춰서 오다니, 분명 아버지랑 형이 너를 이곳으로 부른 게 틀림없어.”

눈과 입은 스튜에 박아 두고 있었으나 귀만큼은 열고 있던 블라드는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말았다.

“······.”

들고 있는 스튜 그릇 너머로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 갈색 머리의 여자.

그야말로 평범한 시골 처녀답게 생긴 갈색 머리의 여자는 바로 고트의 여동생이었다.

“마리의 결혼식은 보고 갈 수 있지? 혹시 바로 가야 하니?”

“아니, 이게······.”

오랜만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공교로운 시기에 찾아온 아들이었으니 그녀의 감회도 남다를 법했다.

그러나 고트는 여정의 책임자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사 옆에 딸린 종자의 신분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바로, 바로 가야 하나?”

“······.”

차마 블라드를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허공을 맴도는 고트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블라드는 그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별수 없지.’

의도치 않은 사정에 끌려다니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의 일이라면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스튜가 정말 맛있네요. 요 며칠간 종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블라드의 대답을 알아들은 고트의 어머니가 가슴에 손을 모으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즈넉한 시골 마을.

다가오는 봄기운과 함께 스튜의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이 마을에서 블라드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보기로 했다.

※※※※

식사를 마친 블라드는 집 밖으로 나와 조금씩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족과의 회포를 풀 고트를 위한 배려였으며 주변의 풍경을 살펴보고자 하는 오래된 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이 집에는 마구간이 없나 본데.”

히이이잉-

블라드와 함께 나선 누아르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이 머물 곳이 보이지 않자 주둥이로 블라드의 등을 툭툭 쳐대고 있었다.

인간은 싫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은 좋다.

자유로운 초원의 영혼은 비바람을 막아줄 문명의 이기들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었다.

‘애써 만들어놓고 사용을 안 한다라······.’

산책을 하며 조용히 마을을 살피던 블라드의 눈에 쓰러져가는 방앗간이 하나 보였다.

고트의 집 옆에 있으니 아무래도 그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이미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보이는 방앗간이었다.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방앗간은 내려앉아 있는 거미줄만큼이나 많은 사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잘 곳 하나는 마련해줄 테니까 그만 좀 건드려.”

푸르르륵-

블라드의 투덜거림에 이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누아르가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굳이 누아르의 투정이 아니더라도 블라드도 고트의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낡은 만큼 작은 고트의 집.

그곳 자그마한 손님방에 일가족을 몰아넣고 잠을 청한다면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때마침 오네.”

저 멀리서 고트의 집을 향해 언덕을 오르는 몇몇 마을 남자들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 촌장이 보낸 사람들이겠지.

마을에 들어선 낯선 이방인이 기사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니 촌장의 입장에서는 쉽게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고트 놈이 뭔가 단단히 눈 밖에 나긴 한 모양인데.’

그러나 블라드는 이곳을 향해 올라오는 마을 청년들을 보며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손에 각자 무언가 하나씩 집어 들고 언덕을 오르는 남자들

아무리 보아도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의 일원을 환영하는 자들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어이 고트!”

산책을 위해 밖을 나선 블라드의 귀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마치 마을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몰래 야반도주나 했던 빚쟁이가 무슨 낯짝으로 다시 기어들어 온 거냐!”

누구랄 것도 없이 건들거리는 태도.

거기다 별로 사용감이 없어 보이는 반짝이는 검집까지.

전형적인 불량배들의 모습을 한 남자들을 보며 블라드는 그들이 온건한 목적을 가지고 고트를 찾아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토마스.”

오랜만에 가족 간의 회포를 풀고 있던 고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집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고도 무례한 호출이었지만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듯 고트의 태도는 침착할 뿐이었다.

“야반도주라니, 그냥 밤이 좋아 달을 보고 떠난 것뿐인데.”

“갚을 돈을 안 갚고 밤 중에 내뺐으면 그게 야반도주지 새끼야!”

고트의 여유로운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리의 대장인듯한 사내가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밀려 있던 방앗간 사용료나 지불해라!”

“하는 말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구만. 이 발전 없는 놈들 같으니.”

무기를 꼬나들고 찾아온 무리를 보며 고트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예전에야 이 위협에 몸을 떨었던 때도 있었으나 블라드와 같이 넓은 세상을 경험했던 고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그저 애들 장난 같을 뿐이었다.

“그동안 밀린 이자까지 다 합해서 총 2골드······.”

“옜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오는 반짝이는 동전들.

아무렇지도 않게 금화를 튕기는 고트를 보며 사내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거 먹고 얼른 떨어져.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아.”

“······이 새끼가.”

예전과는 다르다.

자신들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고트는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커져 버린 고트는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토마스라 불린 무리의 대장은 그 눈빛에 분노하고 말았다.

“이 돈이 무슨 돈인 줄 알고 받겠냐. 이 사기꾼 새끼야.”

“······뭐?”

“네 아비처럼 어디서 사기 쳐 온 돈인 줄 어찌 알고 받느냐고.”

빚도 갚았으니 더이상 대화를 주고받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고트의 상처를 후벼가며 쉽게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꼬이고 꼬인 감정의 실타래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일 테다.

“이번에는 무슨 기사 나부랭이까지 데려오셨다며? 아주 당당하게 깃발까지 들고 왔다던데.”

“그 입 닫지. 더 나불거리면 너 가지고는 감당 못 해.”

“왜. 네놈의 같잖은 연극이 들통날까 봐 그러냐?”

토마스라 불린 남자는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네 놈이 기사의 종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데려온 놈이 가짜라는 것을 믿는 것이 낫지. 다들 안 그래!”

“암. 당연하지!”

“그놈이 가짜가 아니고서야 왜 고트 같은 놈을 종자로 삼겠어!”

“칼도 제대로 못 쓰는 무지렁이를 종자로 삼을 정도면 그 수준도 알만하지!”

패거리의 비웃음을 듣는 고트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블라드까지 싸잡아 모욕하는 저들의 행패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아들로서, 종자로서 서 있을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고트는 들고 있던 검을 뽑으려 검집에 손을 얹었다.

저들의 말처럼 제대로 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고트는 용병 생활을 통해 거친 세상을 경험하고 온 남자였다.

“양아치들이네.”

“······뭐?”

검을 뽑기 전 일촉즉발의 상황.

집안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고트의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뛰쳐나와 말리려 하는 순간, 저 뒤에서부터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는 짓이 되게 익숙한데.”

검은 말의 고삐를 붙잡은 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 명의 남자.

작았지만 모두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그런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네 놈이 고트가 데려왔다던 가짜 기사냐?”

대접을 받기 위해 잠시 갑옷을 벗어놓은 블라드는 누가 보아도 새파란 애송이의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은색의 웃옷과 데리고 있는 말의 기세는 범상치 않아 보였으나 평생을 작은 마을에서 제 잘난 맛에 살아왔던 사내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만한 식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짜 기사라.”

블라드는 사내의 말을 듣고는 뒤통수를 긁고 말았다.

이럴 때는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걸까.

오랜만에 마주한 동류들을 보며 뒷골목의 양아치가 불쑥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의 종자를 무시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무시당했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고트의 고향이니까.

둥글게 휘어 들어가는 푸른 눈만큼 사내들을 압박해 들어오는 기세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진짜의 기세에 우물 안 개구리들은 모두 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살려는 드릴게.”

아마 스튜 때문일 것이다.

스튜와 몽글하게 피어올랐던 기억은 그리웠던 어머니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두웠던 뒷골목의 냄새까지 같이 떠올리게 했다.

“덤벼봐. 새끼들아.”

굳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블라드는 예전부터 진짜였었다.

쇼아라 뒷골목 최고의 유망주.

창녀의 배 속에서 태어난 순수혈통의 스트릿 출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 양아치들을 향해 사납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작은 마을치고는 훌륭하게 지어진 촌장의 집.

그러나 지금 그 안에서는 억눌린 고성 하나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슈테판. 진정하시게.”

점차 사나워지는 용병 대장을 향해 마을의 촌장이 진정하라는 듯 의자를 빼주며 말을 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 무슨 놈의 기사가 찾아왔겠는가. 게다가 데리고 온 녀석이 고트였어. 그 녀석은 진짜 기사를 데리고 올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촌장님.”

주홍색 머리의 사내.

가시나무 용병단의 대장 슈테판은 경고하듯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촌장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 마을의 치안에 관련된 부분은 무조건 저를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이건 영주님의 뜻이기도 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분노와 함께 섞여 들어온 슈테판의 경고는 아무리 경험 많은 촌장이라 할지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 앞으로 무조건 그렇게 함세.”

슈테판은 모처럼 맡은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새롭게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이 지역에서 시작부터 꼬이게 된다면 가시나무 용병단은 또다시 기약 없는 방랑을 시작해야 할 테니까.

“자네의 말대로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촌장님!”

차분히 슈테판을 진정시키려 했던 촌장이었으나 갑작스레 열린 문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큰일, 큰일났습니다!”

마치 문을 부술 듯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내.

무언가 잔뜩 일그러져 있어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그 기사가, 가짜가, 아니 진짜가.”

“······아니, 네가 왜.”

촌장은 그를 바라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낳아준 부모가 보아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파랗게 부어오른 얼굴.

형편없이 부러져 버린 앞니 사이로 새 나오는 숨소리가 힘겹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놈이 토마스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

청천벽력같은 보고를 들은 촌장은 자신도 모르게 슈테판을 제치고는 서둘러 열려있는 문으로 뛰쳐나갔다.

촌장에게 있어 단 한 명뿐인 아들의 안위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마침 저 위에 있는 언덕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오는 비명 하나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과연 자신의 아들인 토마스였다.

“빌어먹을······.”

슈테판은 이를 꽉 물고는 촌장의 뒤를 따라나섰다.

결국, 껄렁이던 촌장의 아들놈이 무언가 사고를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살려줘어어어어!”

저 멀리서부터 가련한 비명과 함께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있었다.

말 뒤에 발이 묶인 채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는 토마스가 만들어 내는 흙먼지였다.

“토마스! 토마스! 누가 좀 막아봐라!”

그 모습을 확인한 촌장이 이성을 잃은 채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마을의 그 누구도 쉽사리 날뛰는 말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터져나가는 토마스의 상처를 통해 마을 이곳저곳에 피로 만든 흔적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촌장이 누구냐.”

그렇게 한참을 날뛰던 검은 말이 마침내 마을의 광장 앞에서 멈춰 섰다.

아직도 씨익 거리는 모양새가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이 마을의 촌장은 내 앞으로 나와라.”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기사라 하기에는 너무 흉악하고 일개 불한당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사내.

먼발치에서 보이는 이방인을 알아본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군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사람이었지만 적이었을 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감히 이딴 너절한 녀석을 보내 기사의 명예를 무시한 촌장은 누구냐!”

뇌성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작은 악(惡)은 더 큰 악(惡)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법.

여태껏 같잖은 권력으로 마을을 주름잡고 있던 촌장의 아들은 지금 진짜배기 양아치의 발치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29화 11

너 정도면 어디쯤이냐 (1)

“······나 같으면 당장 무릎부터 꿇을 겁니다. 촌장.”

저 앞에서 늑대가 미소 짓고 있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가련한 양 떼들을 바라보는 늑대가.

슈테판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블라드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마자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저놈은 한 명이고, 우리는 수십이오. 당신들이 앞장만 서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소!”

촌장의 어이없는 제안에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평화롭게 살아왔다 한들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이 자는 촌장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 우리는 빠지도록 하지.”

“······뭐?”

그 말과 함께 슈테판과 용병들이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는 용병들은 앞에서 웃고 있는 잔인한 늑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뭐야. 왜들 그래.”

“너희들 애초에 이럴 때 쓰려고 고용된 거 아니야! 왜 뒤로 빠지는 거냐!”

각자 창 하나씩을 꼬나 들고 모여있던 자경 대원들은 망설임 없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용병들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저 사람 기사야.”

“뭐?”

“저 사람 진짜 기사라고.”

블라드를 알아본 용병 중 몇몇이 물러나는 와중에도 조용히 마을 사람들에게 귀띔해주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눈앞에 있는 사내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당장 무기 버려. 이 병신들아.”

“······.”

점점 얼어붙어 가는 분위기.

하나였음에도 수십을 압도하는 기세가 푸른 눈동자 속에 있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마을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운이 좋다.”

검은 말의 입김이 거칠어진다.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인간들을 밟아버릴 정도로 거칠게.

자신과 맞닿은 세계가 그만큼 요동치고 있었기에.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조용히 휴가를 보내러 왔기 때문이다.”

이 검이 뽑히면 돌이킬 수 없다.

나를 둘러싸고 가르쳤던 세계들이 검을 뽑으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말라 말해주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참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내가 제안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라. 촌장.”

아무리 작디작은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알아봐야 할 것이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노와 당황, 그리고 편견을 뚫고 이제야 현실을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그만 파랗게 입술이 질려버렸다.

흔들리고 있는 창끝만큼이나 그들의 눈동자도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

“······.”

무거운 침묵이 앉아 있는 촌장의 집.

마을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집답게 안의 공간은 쾌적했지만 정작 감도는 공기의 무거운 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희가 감히 기사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 놈당 3골드다.”

“네?”

멍청히 반문하는 촌장을 보며 블라드의 차가운 눈빛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창을 들이댄 녀석들까지는 봐주도록 하지. 다만 고트의 집까지 쳐들어온 놈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방금 자신에게 창을 들이댄 마을 사람만 해도 수십이었다.

다만 그들 모두를 자신을 적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린다면 단순한 살인마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리 권리가 있다 해도 상식에 맞게 행사해야 하는 법이었다.

“한 놈당 3골드.”

“하, 하지만 기사님. 저희 같은 작은 마을에서 3골드는.”

“당신 아들은 10골드다.”

그렇다 해도 모욕당한 처사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법.

블라드는 이 마을의 주인인 로즈미츠 남작이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보상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비록 직접 지불해야 하는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과도한 금화였지만 말이다.

“정말 돈을 내지 못하겠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말씀만 하십시오!”

촌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금화 말고 다른 방안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그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힌다는 것을.

“그놈들의 왼팔 하나씩을 잘라와라.”

“······기, 기사님.”

험난한 곳에서 자라왔고 평생을 날카로운 검을 들기로 맹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블라드가 내뱉는 말에는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스산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물론 당신 아들은 양팔을 잘라와야겠지.”

블라드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촌장은 더는 입을 열 기력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이 모든 제안을 거부할 경우 너의 아들과 시건방진 놈들의 목숨은 없을 것이다.

“더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럼 나가봐라.”

잘못된 판단을 통해 마을을 위기에 몰아넣었으나 그래도 마지막 눈치는 있던 촌장은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밖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었으니까.

“······이런 면모도 있으셨군요.”

“나서지 않기를 잘했어. 슈테판. 안 그래도 본보기로 누구 하나 썰어버릴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슈테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블라드의 말에 그만 목덜미에 있는 웃옷을 잡아 내리고 말았다.

아직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블라드의 어투에는 쉬이 넘기기 힘든 가시들이 섞여 있었다.

“저희야 기사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블라드는 촌장이 내어준 차를 밀어놓고서는 자리에 일어섰다.

장식장에 놓여있는 수많은 술병을 바라보며 블라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지? 이런 시골구석까지 밀려날 실력들이 아닐 텐데.”

이건 벌꿀주인가?

꽃이 귀한 북부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었던 술병을 찾아낸 블라드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뭐, 어떻게 보면 저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기사님의 덕도 있는 것이지요.”

“······아.”

블라드는 슈테판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그만 침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시골 구경하니 콧속도 시원하고.”

“이걸로 한잔하지. 내가 따라 드릴 테니.”

블라드는 자신의 것인 양 거리낌 없이 촌장의 벌꿀주를 열고서는 슈테판에게 따라주었다.

타노보에서 비츠카야 백작과 사이가 틀어져 버린 블라드.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던 블라드야 별문제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볼까 했던 가시나무 용병단은 또다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의뢰를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슈테판이 한 말은 그저 엄살이 아닌 진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의뢰로 온 건데?”

“흐음······. 의뢰내용은 고용주의 허가가 없이는 발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는 합니다만.”

블라드는 슈테판의 너스레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맛있는 술과 인연이 닿았던 지인.

여태껏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살려줬잖나.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죠. 그때 다리 위에서도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죠.”

용병대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칼밥 좀 먹었다 해서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바로 블라드를 마주한 지금처럼 분위기를 편안히 만들고 고용주에게 자신들을 홍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딱히 비밀도 아니긴 하죠.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블라드가 내어준 술을 들이켠 슈테판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블라드에게 고개를 가까이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만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전쟁?”

“영지전 말입니다. 귀족들끼리 하는 땅따먹기요.”

슈테판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가 슈테판의 혀끝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속해봐.”

“······저희가 로즈미츠 남작에게 받은 의뢰는 산적으로부터 이 마을을 보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이 뿌리내릴 지역을 찾던 가시나무 용병단은 일종의 자경 업무를 위탁받아 이곳 등나무 마을로 찾아왔다.

요근래 남작령의 경계 근처에서부터 산적들의 약탈 행위가 빈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적이랑 영지전은 무슨 상관인데?”

“바로 그게 핵심인 부분이죠.”

아무도 없는 촌장의 집이었지만 슈테판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조용히 몸을 가까이 기울이고는 블라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약탈을 하고 다닌다는 그놈들, 암만 봐도 산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촌사람들이야 모를 수 있어도 용병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슈테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근방에서 날뛰고 있는 산적들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것을.

“치고 빠지는 모양새가 너무 깔끔하고 정련되어 있습니다. 마치 훈련을 받은 병사들처럼요.”

“······음.”

아마 로즈미츠 남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날뛰고 있는 산적들이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봤을 때는 이건 일종의 전초전이거든요. 마르시아로 들이닥칠 진입로를 확보하는 거죠.”

상대는 선전포고를 하기 전 주위의 마을들을 정리하면서 마르시아를 향한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로즈미츠 남작은?”

“그 사람은 시간을 버는 거죠.”

그리고 로즈미츠 남작은 몇몇 마을들을 제물로 삼아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과 병력을 벌고 있었다.

공격하는 자와 수비하는 자.

둘 모두의 움직임은 전략적으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일 뿐이었다.

“저희도 이번 주까지만 이곳에 있다가 돈 받고 떠날 생각입니다.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마시고 있는 벌꿀주가 쓰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마을이었건만 또다시 무언가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아니, 어디에 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상대는 누군데.”

“······아마도 필로스 남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쪽 방향에서부터 약탈이 진행되고 있거든요.”

“필로스?”

아직 귀족 가문들을 빠삭히 알아들을 정도로 상식이 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필로스라는 가문은 분명 블라드의 기억에 있는 가문이었다.

‘필로스, 필로스······.’

블라드는 눈을 감고는 최대한 기억을 헤집어보며 낯익은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

기억 속 가라앉아 있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블라드는 코끝에서부터 희미한 레몬향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들은 대로 힘이 좋아.

-괜히 흙멧돼지라 불리는 게 아니야. 저기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릴걸?

기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땅이 있었다.

시작은 명예롭지 않았지만, 끝은 화려하게 꽃피웠었던 그때의 결투.

요제프가 빌려준 명예를 등에 지고 올라선 소년을 노려보던 시선이 있었다.

스승이었던 자야르에게 패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씩씩거리던 기사였다.

※※※※

끄아아악!

살려주세요! 원하는 건 내드릴 테니까!

매캐한 연기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마을 안에서 더는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없는 소리들이 왱왱대며 메아리치고 있었다.

“콜린 님.”

“보고해.”

가득한 피비린내와 누군가의 울음소리.

그런 살육의 현장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질겅질겅 육포를 씹어먹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

“이 마을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빼낼 건 다 빼냈나?”

불태울 마을이라면 쓸만한 것들은 빼놓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주인이 없게 될 물건들일 테니까.

“······이것밖에 안 되나?”

“워낙 가난한 마을이었던 모양입니다.”

도시도 아니고 그냥 마을.

그것도 산골 구석에 박혀 있던 마을이었으니 이들이 만족할만한 전리품이 나올 리가 없었다.

콜린이라 불린 사내는 눈앞에 전리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음에 갈 마을은 좀 다를 겁니다. 마르시아 근처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고, 그곳에 있는 촌장이 전직 징수관이었답니다.”

“그래?”

원하던 금화의 냄새를 맡은 멧돼지의 표정이 이제야 기꺼워지기 시작했다.

전직 징수관이라면 이래저래 꿍쳐놓은 비자금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것을 허용해주는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다음에 갈 마을이 어디라고?”

“등나무 마을이라고 합니다.”

고깃덩이를 자르던 단검을 집어넣은 콜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저물고 있는 황혼.

어쩌면 저 해가 지는 방향에 반짝이는 금화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들 마무리 지어.”

“네 콜린 님.”

기사는 검이다.

그리고 검은 곧 도구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기사는 다양한 모습을 비치게 된다.

그리고 오늘, 주군의 명에 따라 명예를 내려놓은 필로스 가문의 콜린은 더는 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잔악무도한 산적의 모습일 뿐이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0화 9

너 정도면 어디쯤이냐 (2)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마을 곳곳에 가득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새파랗고 곳곳에 장식된 꽃들은 오늘따라 색깔이 선명한 그런 날이었다.

마치 목소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인 것처럼.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블라드는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다.

‘······.’

얼굴에 웃음이 만연한 사람들을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뺨을 긁적거렸다.

한 몸처럼 어우러지는 저들의 세계에 들어가기에는 블라드는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본인이 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도 했고.

“대장. 고마워.”

“뭐가.”

고트의 목소리에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같이 길을 헤매던 사이였으나 어느샌가 고트는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고트는 그렇게나 낯설어 보였다.

“돼지 말이야.”

블라드는 고트가 눈을 찡긋거리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사과 한 알을 입에 문 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돼지 통구이.

돼지가 돌아가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까닥거리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이 흥겨워 보였다.

“······촌장이 주더라고. 대신 1골드 까줬어.”

오늘의 결혼식을 보며 블라드는 예전의 호르헤를 떠올렸다.

호르헤는 조직원들에게 무언가 축하할만한 일이 생길 때마다 보스의 이름으로 술 한 병씩을 보냈었고 그걸 받은 녀석들은 그렇게 좋아하고는 했었다.

“마리가 엄청 좋아해. 기사님의 축복을 받은 거잖아.”

“······그래?”

그렇다면 됐다.

역시 호르헤가 하는 방식이 맞는 거였구나.

처음으로 가져본 보고 배울만한 남자 어른의 존재는 지금도 블라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신랑이 마르시나에 친척이 있다고 했지?”

“그랬지.”

“그러면 이번 결혼식 끝나면 당분간은 그쪽으로 가족들 보내놓으라고.”

블라드의 말을 들은 고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블라드는 단순히 이방인이었기에 이 분위기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식을 즐기는 마을 사람들과는 달리 블라드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 봐. 이제 시작하는 것 같은데.”

블라드에 의해 이틀이나 앞당겨진 결혼식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시작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네. 가봐야 하겠어.”

그 말과 함께 저 앞으로 마을의 반푼이이자 사기꾼이 바삐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누구보다 당당한 남자일 것이다.

블라드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한 고트는 여동생의 앞날을 밝혀주기 위해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의 결혼식에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근처 마을에서 모신 사제의 축언을 시작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붉은색 천을 밟으며 입장을 기다리는 신랑과 신부.

“······이런.”

그러나 서글프게도 블라드의 눈에는 행복한 누군가의 모습보다는 다가올 위협의 전조가 먼저 보였다.

저 멀리서 자신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슈테판이 보이고 있었다.

“꼬마야.”

“네?”

“바구니에 있는 거 한 송이만 줘.”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아이를 부른 블라드는 그 위에서 가만히 꽃을 골라 잡아들었다.

마침 눈에 띄는 꽃 한 송이가 있었다.

축하해 마리!

잘 살아야 한다!

사제의 부름과 함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신랑과 신부.

이제 곧 떠나야 하는 기사는 그들을 위해 저 멀리서 붉은색 장미 한 송이를 던져주었다.

축하와 환호. 그리고 아름다운 광경을 뒤로 한 채.

“기사님의 말대로 정찰병을 넓게 퍼트려 놓길 잘했습니다. 지금 신원 불상의 무장인원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시간은?”

“두 시간 내면 닿을 것 같습니다.”

슈테판의 보고를 들으며 블라드는 얼굴을 굳힌 채 조용히 결혼식장을 빠져나갔다.

“결혼식은 어찌할까요? 지금 끝낼까요?”

슈테판의 말에 블라드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서 있는 사람들.

블라드는 가능한 한 그들을 위해 결혼식만큼은 끝마쳐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지킨다는 것은 저런 광경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십 분만 있다가 끝내지.”

밖으로 나서는 블라드의 뒤로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차 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블라드는 자신이 던져 놓은 붉은색의 장미 한 송이를 뒤로 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

‘······빌어먹을.’

콜린은 속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참아내며 침을 뱉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앞에 둔 콜린의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지금 저기에 매달려 있는 놈들이 우리 애들 맞는 거냐?”

“······그렇습니다. 저희가 보낸 정찰병들입니다.”

쉬운 임무일 거라 생각했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맡고 싶지 않았던 시시한 임무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콜린과 부하들이 기대하고 상상했던 광경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기사라도 숨겨놨었나 보군.”

다급하게 세워놓은 태가 나는 목책.

얼마든지 부술 수 있을 것만 같은 허접한 목책이었지만 그 앞에 매달려 있는 시체들이 강렬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죽음을 매달아 놓은 목책은 이곳을 쉽게 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어쩔까요?”

“뭘 어쩌란 거냐. 여기서 후퇴라도 할까?”

세 명의 정찰병을 보냈건만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잡히고 말았다.

일개 마을의 병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병사들이었으니 분명 마을 안에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있다.

“내가 앞장선다.”

그러나 누군가가 보내는 노골적인 경고에도 콜린은 주저하지 않았다.

쉬운 임무라는 것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임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가뜩이나 데어마르에서의 명예 결투 때문에 입지가 좁아져 있던 콜린은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리 나와라!”

일개 산적이라 볼 수 없는 강렬한 기세.

더는 정체를 숨기지 않겠다는 듯 콜린은 큰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감히 어떤 놈이 내 부하들의 목을 잘라놓은 거냐!”

흥분과 분노에 가득 찬 멧돼지의 외침이 등나무 마을을 향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웃음으로 가득하던 마을은 어느새 숨소리조차 죽인 불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지금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네놈들의 목도 모조리 잘라버리겠다!”

문을 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자신에게 있다는 듯 당당히 외친 콜린이었으나 돌아오는 답변은 담담할 뿐이었다.

“필로스의 기사. 흙멧돼지 콜린.”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목책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딱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게.

“오랜만에 뵙지만 전혀 반갑지는 않군요.”

“······너는 누구냐.”

홀로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금발의 사내.

한눈에 보아도 기사처럼 보이는 사내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들고 있던 물건을 콜린에게 집어 던졌다.

투욱-

콜린의 발치로 굴러오는 목들.

하나같이 눈을 부릅뜬 채 굴러오는 부하들의 목을 보며 콜린은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다들 한 번에 당했군.’

목에 그어진 상처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단칼에 베어냈다는 뜻이었다.

앞에 있는 기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실력만큼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은 좋은 날입니다. 콜린. 그러니 지금 돌아가신다면 당신의 무례를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나!”

금발에 푸른 눈.

귀족처럼 보이는 화려한 자태였지만 품은 기세는 짐승처럼 흉포하기 그지없는 기사.

저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지닌 녀석이라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섭섭하군요. 그날 저를 위해 검을 뽑아주시지 않았습니까.”

“······뭐?”

묘하게 여유 있는 미소가 화를 자극한다.

앞에 있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저런 미소를 짓고 있는 기사를 콜린은 기억하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바예지드의 애꾸눈.

자신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던 그 개 같은 자식.

“저는 자야르 경의 종자였던 사람입니다.”

이제 보니 그놈과 똑 닮았다.

하는 짓도, 흔드는 방식도.

그리고 여유로워 보이는 저 미소까지도.

“네 이노옴······.”

이제야 블라드를 알아본 콜린의 두 눈이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레몬향이 감돌던 땅이 기억난다.

자신을 보며 비웃고 있던 애꾸눈, 혀를 차던 주베르.

그리고 빛나고 있던 파블로와 금발의 애송이까지도.

“개 같은 바예지드!”

이제야 기억난다.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주었던 기사의 제자.

한눈에 알아보지 못할 만도 했다.

어느새 한 사람의 기사가 된 소년에게는 예전의 초라했던 모습은 그저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으니까.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듯, 그렇게 당당한 모습이었다.

“죽여버리겠다! 북부 잡놈들아!”

시시했을 뿐인 임무는 어느새 새빨갛게 달궈진 복수의 장이 되었다.

그날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아 들었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 나는 너를 죽이고 차마 주워 담지 못했던 그날의 패배를 지워내겠다.

“콜, 콜린 님!”

성이 난 멧돼지가 두 눈 가득 목표를 포착했다.

필로스의 흙멧돼지 콜린.

후퇴 따위는 모르는 돌격대장이 절호의 움직임으로 블라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따라 들어가! 지금 당장 공격해라!”

“콜린 경을 따라라!”

산적처럼 위장하고 있던 필로스의 병사들도 자신들의 기사를 따라 서둘러 돌격하기 시작했다.

훈련을 받은 자들답게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나름의 진형을 유지하며 목책으로 달려드는 병사들.

“끄아아아악!”

“함정, 함정이다!”

그러나 블라드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경험 많은 용병들과 마을 사람들을 닦달해 만든 함정들이 곳곳에서 필로스의 병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까아앙-!

“죽어! 이 개자식아!”

“쇼아라의······블라드라니까.”

온몸으로 멧돼지의 돌격을 저지한 블라드가 이를 악물고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비록 달려오는 기세까지는 완전히 죽이지 못해 마을의 안까지 진입을 허락하고 말았지만, 이것 또한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슈테판! 문 닫아!”

“알겠습니다!”

허접하지만 기능에는 충실했던 목책의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지휘관과 병사들을 가로막는 나무문 사이로 비명과 핏물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오늘 너를 죽이고 네놈의 목을 주군에게 가져가겠다!”

“······이제 내 목 정도면······ 가져갈 만한 값어치는 있습니까?”

과연 멧돼지라 불릴 만하다.

고립되었으나 뒤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듯 치켜떠진 두 눈.

섬세함은 없었어도 타고난 용력이 블라드를 사정없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콜린은 마주한 블라드를 보며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야르의 그것과 닮았다고 생각한 미소는 어느새 흉악하게 일그러져 본연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누구의 미소도 아닌 오직 블라드만의 미소.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할 포식자의 미소였다.

“그럼 당신의 목이면 어느 정도지?”

“뭐?”

오직 포식자만이 지을 수 있는 잔인한 미소가 블라드의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너 정도면 어느 정도쯤이냐고.”

가장 빠른 용 린드부름을 찌르고.

가장 날카로운 용 니드호그를 베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같은 인간과 생사결을 펼쳐본 적은 없었던 블라드는 언제나 궁금해했었다.

내가 어느 정도인지.

어디까지 다다랐는지.

“너를 죽일 나는 어느 정도냐고 묻지 않냐!”

블라드는 여전히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남자들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그들을 닮고 싶고, 그리고 넘고 싶었으니까.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까지 올라온 것인지.

소년이었던 기사는 이제 그것을 확인할 시기가 되었다.

감고 있는 왼쪽 눈으로 블라드의 세계가 찬란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1화 9

너 정도면 어디쯤이냐 (3)

각자의 검을 빼 들고는 둥글게 결투장을 감싸고 있는 기사들.

여전히 패배의 아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콜린이었지만 그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음으로.

“소드마스터의 규율이라니······ 진짜 어이가 없군.”

언제나 여유롭던 주베르였지만 그조차도 지금의 상황이 난감한 듯 고개를 흔들어대었다.

이제 막 피어나려는 꽃을 위해 검을 치켜든 기사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문장은 가지각색이었으나 지금만큼은 하나의 규율 아래 자신들의 의무를 다할 차례였다.

-너의 이름을 말해라. 소년아!

끌어내려는 자와 피워내려는 자.

지키는 자와 보호받는 자 모두가 하나의 세계 안에 서 있는 모습.

건국왕 프라우센이 그토록 원했던 모습이 지금 데어마르의 결투장 안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피워냈군.”

누군가의 읊조림과 함께 콜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그곳에는 이제야 피어나기 시작한 희미한 빛이 어려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비척거리며 걷는 소년.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걸어가는 소년.

그 녀석이 빛나고 있었다.

피투성이의 손으로 이제야 피워낸 세계를 든 소년.

그 녀석의 이름은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했다.

※※※※

끼기기기긱-

“······!”

검의 삐걱거림이 가까워질수록 콜린의 두 눈에는 분노가 아닌 경악이 차올랐다.

마치 갑옷처럼 두 팔을 감싸 안은 오러의 형태.

지금 블라드는 필로스 최고의 용력을 가진 콜린을 힘으로 밀어 올리는 중이었다.

“할······ 만하네!”

타고난 힘은 어쩔 수 없으나 피워낸 세계에는 한계가 없다.

블라드는 지금 라문드의 강체술을 통해 가지고 태어난 재능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어디서 희한한 기술을 배워왔군!’

블라드의 기술에 당황한 콜린은 서둘러 검을 떼어내고는 거리를 벌렸다.

무슨 사술을 부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봤자 잔재주.

같잖은 재주들은 결국 진정한 힘 앞에서 깨어지고 말 것임을 콜린은 믿었다.

“건방진 놈!”

상대에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장점을 살린다.

살아온 방식대로 믿어왔던 방향대로 검을 휘두르는 콜린.

갈라지는 공기의 흐름이 블라드의 머리를 쪼갤 듯 쇄도해 들어갔다.

터엉-!

“······!”

그러나 콜린의 믿음은 끝내 보답받지 못했다.

꿈에서도 듣기 싫었던 소리.

기억 속, 애꾸눈의 사내가 웃고 있다.

“익숙하지? 이 소리.”

“······이 개자식이!”

지금 앞에서 푸르게 빛나는 것이 검인가 눈인가.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세계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 튀어 오르는 하얀빛의 번개가 콜린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고작 1년 만에!’

어린 녀석들은 눈 깜짝할 새에 큰다지만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이다.

그 자리에 있었던 누구도 지금 자신과 검을 맞댄 녀석이 그때의 소년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이젠 내 차례겠지!”

‘······!’

뜨고 있는 블라드의 오른 눈에서부터 새벽의 여명이 비쳐왔다.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에게서 허락받은 약점간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멧돼지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빈 곳이 있었다.

‘다리!’

강력한 힘을 받쳐주기 위해서는 단단한 기반이 필요할 터.

콜린의 강인한 용력은 굳게 디딘 두 다리에서부터 나온다.

흐르고 있는 오러의 물결이 그렇게 알려주었다.

‘이런 젠장!’

강했으나 유연하지는 못했던 콜린은 집요하게 자신의 하체를 노리는 블라드의 공격에 심히 당황하고 말았다.

여태껏 자신에게 이런 식의 공격을 펼친 녀석은 없었으니까.

끄가가각-!

검과 검이 부딪힌다.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 사이로 검에서부터 튀어 오르는 불꽃들이 가득하다.

‘나는 어느 정도냐!’

가장 빠른 용을 찌른 기민한 검놀림에 콜린의 허벅지가 베어져 나간다.

가장 날카로운 용을 베어낸 잔인함이 집요하게 기사의 무릎을 노리고 있다.

블라드가 보고 배우고 그리고 쓰러뜨려 왔던 모든 세계가 지금 별빛과도 같은 모습으로 검날에 맺혀있었다.

“크악!”

“대답해봐라!”

이제는 알고 싶다.

이 커다란 세계에서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지.

얼마나 더 해야만 하늘 끝에 닿을 수 있을지를.

이제 누군가는 나의 물음에 대답해 줄 때가 왔다.

“이 건방진 자식이!”

까아앙-!

터져 오르는 검붉은 핏줄기와 함께 블라드의 세계가 멈춰 섰다.

감히 바로 앞에 있는 자신이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보는 블라드를 보며 콜린은 노호성을 터트려대었다.

“고작 너 따위에게 당하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검게 물든 피부 위로 새빨간 핏방울들이 터져나갔지만, 콜린은 힘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 또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

위를 향한 꿈을 꾸는 것은 오직 소년만의 특권이 아니었다.

“뒤져라! 이 빌어먹을 애송이놈아!”

콜린의 노호성과 함께 봄기운에 녹아버린 여린 땅들이 폭발하듯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근육과 함께 터져나가는 콜린의 핏줄과 같이.

“크윽!”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진 콜린의 기세에 블라드는 자신이 때를 놓쳤음을 깨닫고 말았다.

흐름은 파도와도 같아서 나에게서 오는 물결을 타지 못하면 남에게로 넘어가 버리는 법이다.

“나 정도면 어느 정도냐고 물었냐!”

쉴 새 없이 이어지던 공방의 흐름이 어느새 콜린에게로 넘어가 버렸다.

누구에게나 걸어온 역사가 있고 자신이 세워온 세계가 있다.

콜린 또한 자신의 세계를 쌓아왔던 사람이었다.

“나, 필로스의 콜린은 바로 이 정도다!”

거대한 함성과 함께 콜린의 검 끝에서부터 세계의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하는 오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내면으로 깊숙하게 빠져들어 간 콜린의 의식은 이미 내일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과거의 패배에 깔려있던 콜린은 오늘의 패배까지 떠안을 자신이 없었다.

“죽어!”

“······!”

콰아아아앙-!

블라드는 마치 폭발하듯 터져나가는 지면을 피해 데굴데굴 굴러나갔다.

비처럼 쏟아지는 흙더미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허억, 헉.”

이미 싸움은 끝났다.

오직 결투만이 남았을 뿐.

문에 달라붙어 서로를 찌르던 병사들은 모두 석상처럼 멈춘 채 지금의 대결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둘의 싸움이 오늘의 시작이자 끝이 될 것이라는 걸 모두가 깨닫고 있었다.

“흐흐······.”

차마 자그마한 마을이 담아낼 수 없는 거대한 결투.

모두가 숨죽이며 바라보는 가운데서 블라드는 웃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흙비조차도 가릴 수 없는 웃음이었다.

“왜 웃는 거냐!”

갑자기 실성한 듯 웃는 블라드를 보며 콜린이 크게 외쳤지만 푸른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미소는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제야 웃음을 멈춘 블라드의 검이 휘둘러진다.

쌓여있던 흙먼지들을 털어낸 별의 검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누군가의 도움도, 배려도 없는 전장.

그러나 블라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당신 정도는······. 이제 감당할 수 있겠어.”

“뭐?”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검을 치켜들었다.

정령들이 만들고 세계수가 내어준 검.

마치 장식 없는 검을 쥐었을 때의 감각을 다시 한번 느낀 블라드는 미소를 지우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에게 대답을 해줘서 고맙다.”

블라드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오늘의 답을 얻었다.

필로스의 콜린.

오러를 깨우치고 자신만의 세계를 세운 훌륭한 기사.

그러나 나는 이미 이 남자를 뛰어넘었다.

“그러니 이제 끝내자.”

그리고 지금 그것을 증명한다.

초대 소드마스터가 정립한 검로(劍路) 위로 블라드가 쌓아 올린 세계들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래 덤벼봐라! 쇼아라의 블라드!”

한 송이의 세계를 피워내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던 소년의 발걸음은 아직 멈추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위태로웠던 발자국들은 소년의 세계 안에 차곡차곡 쌓아 올려져 지금의 기사를 만들어냈다.

“그래. 애송이 같은 거 말고.”

콜린의 함성을 들은 블라드의 눈빛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게 된, 그래서 스스로의 가능성에 눈을 뜬 작은 용의 푸른 눈동자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불러라.”

오늘 블라드는 기어이 결혼식을 지켜내었다.

자신의 검으로 누군가의 행복을 지켰고,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냈다.

그러니 이제는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붉은색의 장미 한 송이를 던져줄 차례다.

“······!”

순간, 빛이 번뜩였다.

시작은 마주 보고 있었으나 어느새 스쳐 지나간 시선 속에서 블라드와 콜린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보고 있음에도 막을 수 없고 알아챘음에도 피할 수 없는 그런 빛이었다.

“끄어어억······.”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릅뜬 콜린의 눈.

더 이상의 삶을 허락하지 않는 날카로운 말뚝 하나가 그의 심장에 박혀있었다.

점점 저물어가는 심장 박동.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검은색의 형체가 붉은색의 액체를 쏟아내며 자그마한 마을 위로 쓰러져 갔다.

필로스의 기사 콜린.

그는 오늘 블라드가 만들어낸 증거 중 하나가 되고 말았다.

“여기까지 올라왔으니.”

승자와 패자.

정당한 결투의 대가로 콜린의 숨을 앗아간 블라드는 어깨 위로 닿는 빛을 느끼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하늘 위에 떠 있는 달 하나.

“조금만 더 하면 닿을 수 있겠어.”

그날과 마찬가지로 처량한 푸른 빛을 가진 달이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블라드는 자신을 내리쬐는 달빛이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

달빛이 비치는 커다란 저택.

그곳 바닥에 내려앉은 먼지 속에는 모래 알갱이가 가득하다.

척박한 땅에서부터 시작된 건조한 바람은 언제나 서부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백작님.”

커다란 로비.

오직 둘만이 존재하기에는 넓은 공간에서 가이다르 백작은 자신에게 고개 숙이는 기사를 바라보았다.

“때가 되었습니다. 백작님.”

“······자세히.”

로비의 가장 높은 곳.

피를 이은 아들조차도 오를 수 없는 그 계단을 따라 푸른 달빛의 기사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는 백작에게 다가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만들어 낸 피와 시체들이 지금의 계단을 깔아놓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용혈공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백작에게 가까이 다가간 고딘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넓디넓은 로비에서 떠도는 모래 알갱이들이 그의 목소리를 감춰주고 있었다.

“그래?”

고딘의 말을 들은 가이다르 백작은 강하게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찡그려진 그의 얼굴 속에서 두 개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왔군.”

냉혈한 서부의 지배자.

빼앗는 것을 개의치 않는 찬탈자.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

그는 오랫동안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고딘. 지루하다 못해 괴로울 지경이었어.”

“충분히 이해합니다. 백작님.”

삼켜도 삼켜도 언제나 배고플 수밖에 없는 것은 서부에서 태어난 자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빌어먹을 땅은 언제나 자리 잡은 곳이 아닌 저 멀리에 있는 땅을 갈구하게 만들고는 했으니까.

이 끊이지 않는 허기짐은 마치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다.

“가라 고딘. 가서 내 아들의 검을 찾아와라.”

빼앗는 자가 빼앗겼음에도 참으로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때가 왔고, 서부는 더 이상 참을 필요가 없었다.

겨우 형체나마 유지하고 있던 울타리는 오늘로써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데어마르로 가라. 가서 북부의 관문을 자처하는 계집년을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주군의 명을 받은 기사.

고딘은 언제나 그랬듯이 명을 수행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가이다르의 뒤에서부터 비치는 창문 밖에서 푸른 달빛이 고딘을 비추고 있었다.

그날 장미의 미소로 내려왔던 달빛과도 같은 색이었다.

15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2화 15

그녀가 너를 부른다 (1)

이제는 잔디가 무성해진 북부의 초원 위로 세워져 있는 주둔지.

수많은 천막 사이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에는 교황청과 용살기사단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째서 진입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두 경.”

가장 화려하게 치장된 지휘관의 막사 안.

그곳에 선 피에르 주교는 주인이 내어준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앞에 있는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킨 지 어언 두 달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숨만 죽인 채 바라만 보고 있다니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다.

쇼아라의 주교이자 이단 심문관.

피에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의 불성실한 태도는 저 위에 계실 신께서도 그리 달가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라두 경께서는 지금이라도······.”

“할 겁니다.”

피에르의 말에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분노가 어려있었지만 정작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태연할 뿐이었다.

“지금은 그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머릿기름으로 말끔하게 넘긴 붉은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마주치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 라두라는 자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마치 사람 같지 않은 기세를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였다.

“언제까지 하겠다고 확언한 바는 없지 않습니까?”

“······.”

용살기사단의 라두 드라굴리아.

용혈공의 피를 이은 남자가 지긋이 피에르 주교를 노려보며 그의 기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검을 빼 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교황청이 내세우는 주교 앞이었지만 라두의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존재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때입니다.”

“······.”

테이블 위에 두 발을 올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두.

그 여유로운 모습에 피에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부디 신의 뜻에 인간의 의도를 섞지 마십시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교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두.

마치 이제 나가보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 피에르는 속으로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목줄 풀린 용의 기세는 어느새 교황청까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 보겠소.”

“배웅은 안 하겠습니다. 주교님.”

결국, 피에르 주교는 입술을 깨문 채 천막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 이름으로 세운 깃발이나 결국은 인간의 검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라두의 허락 없이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하자고 합의한 계약이었으니까.

‘당했군.’

천막을 빠져나온 피에르의 눈가로 정오의 태양이 내려앉았다.

부신 눈을 손으로 가리자 보이는 광경.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깃발들.

그 사이로 정연하게 자리 잡은 천막들이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렇게까지 준비했건만 결국은 용혈공의 의도에 놀아나고 말았다.

어느새 명분은 빼앗겨버렸고 검 자루는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

어째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지를 안다.

북부를 견제하고 싶었겠지.

모처럼 몸을 일으킨 중앙의 군세들은 사특한 존재를 명분 삼아 북부 한가운데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그렇게 용혈공이 박아놓은 말뚝은 강철공과 북부연합의 움직임을 찍어누르는 중이었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용혈공.’

다만 피에르는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

주둔지가 마주하고 있는 곳.

그곳에서 퍼져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어느새 형체를 갖춰 검은색의 안개처럼 내려앉고 있었으니까.

다가오는 여름의 기운도, 오후의 햇살도 닿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였다.

※※※※

어제와는 달리 텅 비어버린 마을이 을씨년스럽다.

모두가 떠난 듯 그렇게 조용해진 마을에는 미처 챙겨가지 못한 가재도구들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마리 잘 따라가고. 거기 가서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서히 떠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고트는 어머니의 손을 꽉 붙잡고는 신신당부를 해대고 있었다.

“우리 엄마랑 마리 좀 잘 부탁해.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아니 이제는 같은 가족이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등나무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

그 앞에서 촌장이 떠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귀담아듣는 사람들은 없었다.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전쟁의 전조를 보았는데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르시아로 가서 콕 박혀있어요. 아무리 영지전이라도 도시까지 함락시키는 경우는 드무니까.”

“조심해라 고트야. 엄마는 항상 나보다는 네 걱정뿐이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고트 눈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너무나도 가득해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내가 준 돈 잘 챙기고. 도착하자마자 쇼아라로 편지 보내. 거기면 연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오빠도 조심해야 해.”

이제야 겨우 만난 가족이었건만 또다시 헤어져야만 한다.

그것도 험하디험한 피난길 속으로 가족을 보내야 하니 고트는 그만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쯧.”

안타까운 배웅에 정신이 팔려있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혀를 차고 말았다.

어머니와 이별을 준비하는 아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라드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야. 고트.”

“······.”

“야. 안 들리냐.”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가만히 손을 흔드는 고트.

블라드는 한참 배웅에 열중하던 고트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왜, 왜 대장.”

어째서인지 사나워 보이는 블라드의 표정.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그의 표정에 고트는 움츠러들었지만 들려오는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도 따라가.”

“응?”

어차피 쇼아라로 돌아갈 뿐일 여정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고트의 안내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휴가다. 길게 줄게.”

아주 잠깐이었지만 블라드는 고트의 가족을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그 모습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너무나 오래되고 낡아 제대로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

“대신 무급 휴가야.”

“······대장.”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트는 당황한 듯 얼어붙고 말았다.

눈치 빠른 사기꾼은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 떨리는 고트의 손가락.

“나 잘렸어?”

“······휴가라니까. 이 미친놈아.”

“길게 주는 무급 휴가라니, 원래 고용주들은 해고를 그런 식으로 말한단 말이야.”

블라드는 들려오는 대화 속에서 고트가 살아왔던 인생 역정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른 따라가. 나중에 쇼아라에서 보자.”

“으. 응!”

그제야 블라드의 의도를 파악한 고트가 서둘러 말 위로 올라탔다.

차가운 말투 속에 담겨 있는 배려.

블라드의 배려는 어젯밤 어머니의 앞에서 휘휘 젓던 국자 속에서도 느껴지던 것이었다.

“고마워 대장!”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행렬이 어째서인지 희뿌예 보였다.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을 것이지만 고트는 쉽사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만 안전한 곳에 모시고 바로 찾아갈게!”

“그때까지 네 자리가 남아 있겠냐.”

진심을 타박으로.

그러나 오해는 없을 것이다.

겨울날에 만났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이해할 정도의 사이가 되어있었으니까.

“······너는 하벤처럼 배 받기는 글렀어.”

가족에게로 떠나가는 고트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났을 때는 사기꾼의 모습이었으나 떠나갈 때는 진실된 모습으로.

등나무 마을의 고트는 그렇게 가족의 품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래 빨리 가봐.”

금방 오겠다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못해도 몇 달은 걸릴 이별이었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이별이란 그렇게 덧없는 것이라는 걸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맛없더라. 감자 스튜.”

떠나가는 고트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차마 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엄마의 맛이었지만 맛은 없었다고.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는 오후의 햇살이 블라드의 눈을 간지럽혔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손바닥으로 가린 푸른 눈동자.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눈동자의 색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온기만큼은 따뜻해 보였다.

※※※※

“역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춥군요.”

자그마한 숲길을 걷고 있는 사내들.

슈테판은 너스레를 떨며 블라드의 옆으로 말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누아르의 사나운 눈총에 그저 벌벌 떨 뿐이었다.

아무래도 고트와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블라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야.”

“북쪽까지요. 쇼아라까지 이제 일주일 남았나요?”

슈테판과 가시나무 용병단.

지금 그들은 블라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왜 굳이 쇼아라까지 따라오는데?”

“아직 자리를 못 잡았으니까 그러지요.”

동쪽 도시 타노보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방황은 아직 끝을 맺지 못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용병의 가치는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눌러앉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하나뿐인 목숨으로 장사하는 입장이니까요. 고용주를 고르는 데는 민감할 수밖에 없거든요.”

“······말 들어보니까 굳이 내 잘못도 아니었네. 그렇게 까탈스러우니 지금까지 자리를 못 잡았지.”

“하하!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슈테판은 블라드의 핀잔에도 그저 호탕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이 어린 기사의 마음에 들어야만 했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

말투는 까칠하고 태도는 냉정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자한테 하는 행동은 따뜻했으니 분명 나쁘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설사 성격이 개차반이라 해도 따라갈 만한 가치는 있다.’

도르레치티의 숲에서 헤매던 것을 구했을 때부터 등나무 마을에 이르기까지, 질기다 할 수 있는 인연으로 블라드와 함께 했던 슈테판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더 크게 될 녀석이라는 것을.

블라드의 가치는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누가 보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빛나고 있었다.

“쇼아라에 들르시면 어떻게, 그곳에서 바로 임무를 받으십니까?”

“······몰라, 가봐야 알지.”

실력 좋고 인성 괜찮으며 장래성까지 훌륭하다면 지체하지 말고 올라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장 강력했던 경쟁자조차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줬으니 이건 분명 기회였다.

“내 일은 왜 물어보는데?”

“흐흐. 이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 쇼아라에서 어떻게 술이라도 한잔······.”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이며 너스레를 떨려는 슈테판.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던 블라드의 눈가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잠깐.”

“네?”

바람결을 따라 들려오는 소리들.

블라드의 예민한 청각이 무언가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들.

말발굽 소리였다.

“누군가 오는군.”

“······!”

조용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블라드.

블라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본 슈테판은 재빨리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형 갖춰!”

그의 신호에 따라 순식간에 타고 있던 말들로 슈테판과 블라드를 둘러싸는 가시나무 용병단.

블라드는 그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에 잠시 놀라고 말았다.

“보입니다.”

“음.”

자연스럽게 블라드의 옆에 붙어 보고를 하기 시작하는 슈테판.

그들의 시야로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20명은 되어 보이는군.’

일행보다 배는 많아 보이는 숫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시나무 용병단은 노련한 자들이었고 자신 또한 이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확실히 파악했으니까.

“정지. 앞에 있는 자는 신분을 밝혀라.”

감출 것도 없다는 듯 당당히 다가오는 검은 두건의 사내들.

평범한 듯 위장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야 좀 태가 나는군. 많이 컸어. 그때와는 영 딴판이야.”

“······나를 아는 모양이지?”

자신을 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향해 블라드는 검을 치켜들었다.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아는 자만큼이나 수상한 것은 없다.

“너는 누구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

날카로워지는 블라드의 기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내.

그는 조용히 품속을 뒤지며 빳빳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낼 뿐이었다.

낯익은 인장이 새겨진 종이였다.

“요제프님이 보내셔서 왔다. 기사 블라드.”

“뭐?”

들고 있는 명령서와 함께 두건을 들춰내자 보이기 시작하는 사내의 얼굴.

그의 얼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깊게 새겨진 흉터들이 가득했다.

“너는 지금부터 쇼아라로 오지 말고 데어마르로 가라.”

“뭐?”

블라드는 그 흉터들과 함께 사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딱 한 번의 마주침이었으나 잊을 수 없는 모습.

그는 얼굴만큼이나 강렬한 첫인상으로 블라드에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쇼아라의 블라드가 아닌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로써 행동할 것을 명한다.”

요제프가 마차 안에서 보여주었던 가죽 주머니.

그 안에는 차마 감지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내의 목이 담겨 있었다.

“고귀한 북부의 핏줄, 요제프 바예지드 님의 명이시다.”

바예지드의 가문의 숨겨진 검.

엔드레 하이날의 목을 잘라왔던 이름 모를 기사가 지금 블라드의 앞에 서 있었다.

18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3화 18

그녀가 너를 부른다 (2)

내리쬐는 햇볕은 따듯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한 그런 날.

어느새, 계절을 따라 올라온 여름이 느껴지자 데어마르의 하얀 뱀은 오랜만에 나무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일광욕을 즐기기에는 이만한 날씨가 없을 테니까.

조용한 만큼 외로운 언덕 위.

오직 침묵할 뿐인 비석들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은 하얀 뱀.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꼬리가 살랑거렸다.

----?

순간, 이제야 막 자리를 잡은 하얀 뱀은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이 조용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확연한 감각 하나.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각이었기에 하얀 뱀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

냄새를 알아본 하얀 뱀의 눈이 치켜 떠졌다.

저 멀리서부터 꽃의 향기가 났다.

아주 어린 꽃들의 향기.

오랜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영혼 속에 박혀있던 향수를 자극하는 향기였다.

하얀 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몸을 세우고는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하이날의 저택을 넘어 영지 밖 너머까지.

그곳까지 시선을 넓힌 하얀 뱀의 시야로 낯익은 사내의 모습이 맺히기 시작했다.

영지 밖 먼 곳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금발의 기사가 한 명 있었다.

별로 만든 검에 어린아이들의 숨결을 잔뜩 싣고서.

기사의 검을 타고 온 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해주고 있었다.

세계수의 가능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어린아이들을 알아본 하얀 뱀의 꼬리가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작고 오래되었지만 관리만큼은 세심하게 되어있는 하이날의 저택.

그곳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는 집무실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구요.”

마치 바닷물이라도 쏟아진 듯 책상 위에는 풍성한 물빛 머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알리시아 하이날.

그녀는 지금 어찌할 수 없는 피곤함에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어져 있는 중이었다.

지금 창문 밖에서 흥분한 듯 마구 고개를 까닥이고 있는 하얀 뱀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알고 계신 만큼 준비하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귀족 영애가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던 던칸은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달래줄 뿐이었다.

“준비요?”

던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알리시아.

풍성한 머리카락 때문에 가려진 얼굴이 조금은 스산해 보였다.

“이 정도 준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

힐난 아닌 자조에 던칸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

대답 없는 던칸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찬찬히 머리를 쓸어올리는 알리시아.

엎어져 있던 그녀의 머리맡에는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하이날 가문의 병력 구성을 정리해 놓은 보고서였다.

“······고작 7백 명 가지고는 가이다르에게 대적할 수 없는걸요.”

마른걸레를 쥐어짠다는 심정으로 모아놓은 병력이었지만 고작 7백 명일 뿐이었다.

평범한 영지전을 치른다면 몰라도 상대는 서부의 패자 가이다르였고 이 정도의 숫자로는 대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동네 꼬마들도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용병들은 어떤가요? 요즘 값이 많이 올랐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알리시아 님.”

한숨과도 같이 흩어지는 알리시아의 말끝.

그녀가 얼마나 과중한 부담감에 직면해있는지 잘 알고 있던 던칸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알리시아에게 힘을 북돋아 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저희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전쟁의 전조가 감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병들의 값이 많이 올랐고······.”

가이다르의 목적은 분명했고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영지뿐만 아니라 가문의 운명을 건 일전이 다가오고 있었고 알리시아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 볼 생각이었다.

“따로 이름 있는 용병 단장들을 만나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다들 저희 쪽에 서는 것을 꺼리는 것 같더군요.”

“······역시 그렇겠죠.”

그러나 알리시아의 각오와는 달리 세상은 그녀에게 쉽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고 있었다.

가난한 군주.

그리고 강대한 적.

아무리 기회를 찾아 움직이는 용병들이라 할지라도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저희 쪽에서는 1천조차 준비하지 못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던칸의 대답에 드리워져 있던 알리시아의 그늘이 깊어져 갔다.

요제프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 가이다르는 그들을 따르는 가문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전부 합쳐서 5천은 될 병력.

고작 7백일 뿐일 자신의 병사들로는 그저 중과부적일 뿐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에 달려들지는 않겠죠? 그들에게는 저희를 칠 명분이 부족하니까.”

“그렇습니다. 중앙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뿐더러 저희에게는 바예지드라는 동맹도 있습니다.”

서로가 붙어있기에 이런저런 명분들로 얽혀있던 서부와는 달리 데어마르는 전혀 다른 세력권에 속해있는 영지였다.

만약 그들이 정당한 명분 없이 데어마르로 침공해온다면 황실이나 중앙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문이 그들을 비판하게 될 것이었다.

“알리시아 님.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요?”

정중한 노크와 함께 들어온 집사.

여태껏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던 알리시아의 집무실이었지만 그가 들어온 문으로 신선한 공기가 불어오고 있었다.

“바예지드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바예지드!”

집사의 말에 잠시 체면조차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알리시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책상에 무릎이 부딪히고 말았지만 아픔보다는 반가움이 앞서고 있었다.

“어서 여기로 모시세요.”

“알겠습니다.”

알리시아는 거리낌 없이 이제 막 저택에 도착했다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모든 이들이 하이날을 외면하고 있는 지금, 손을 내밀어주고 있는 유일한 자들이었으니까.

“역시 요제프 님께서도 이 사태를 주시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다행이네요.”

알리시아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었다.

“이제 숨통이 좀 트이려나요?”

아무리 가이다르라 한들 바예지드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부의 기둥 중 하나인 바예지드는 분명 그만한 힘이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같이 왔겠네.’

그러나 알리시아는 그들이 들고 올 반가운 소식보다는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힌 듯한 지금의 상황에서 잠시 숨을 쉴 수 있을 만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리는 알리시아의 입가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집사의 보고에 재빨리 머리를 쓸어넘긴 알리시아는 어느새 당당한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온 그녀의 눈빛이 곧이어 열릴 문을 향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알리시아의 기대와 함께 열린 문.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남자가 있었다.

요제프가 보낸 기사이며 종종 그에게 꾸지람을 듣지만 언제나 결과로 보장해주는 남자.

“저는 바예지드에서 온 보르단이라고 합니다.”

“······아.”

인사와 함께 더운 듯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있는 늙은 기사.

그를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말았다.

창밖의 하얀 뱀은 아직도 고개를 치켜들고는 이리저리 방정맞게 까딱이고 있을 뿐이었다.

※※※※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남자들.

블라드와 가시나무 용병단은 그들과 함께 데어마르로 향하는 중이었다.

“저 때문에 이곳까지 내려오신 건가요?”

“······나한테는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다.”

자신의 물음에 확실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 흉터투성이의 남자.

블라드는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을 데려가는 것 말고도 다른 임무를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엔데르 하이날의 때처럼 또 다른 누군가의 목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죠? 선배님?”

정체도 모르고 의도도 모르겠다.

그런 의문투성이의 남자에게 계속해서 정보를 캐내려 하는 블라드의 행동은 생존 본능에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었다.

“흠. 호칭의 문제가 있었군.”

검은 두건의 남자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턱을 쓰다듬고는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선배님은 좀 그렇지. 가능하면 나랑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왜죠?”

“서로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남자의 미소와 함께 얼굴에 가득한 흉터가 일그러진다.

비언어적인 신호로 블라드에게 더는 깊게 들어오지 말라고 조용히 경고를 보내는 정체 모를 남자.

블라드는 그가 보내는 경고를 알아채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블라드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남자는 이윽고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커스로 하지. 너는 앞으로 나를 마커스라고 부르면 된다.”

“······방금까지는 마커스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이름 짓는 것이 제일 어려워. 이 정도면 꽤 괜찮게 뽑힌 거다.”

방금 이름을 지어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 검은 두건의 남자.

이제는 마커스라고 불러야 하는 남자는 고개를 돌려 슈테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랐는데 잘 끌고 왔군. 고용한 상태인가?”

“아니요. 아직.”

“지원금을 내어주지. 저들을 고용하도록 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용병 한 무리를 끌고 오는 블라드를 보며 마커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보는 사람들에게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흉측한 미소였지만 말이다.

“가시나무 용병단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실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임무완수율이 좋은 녀석들이더군.”

“그런가요?”

블라드는 마커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명예, 용병은 신뢰.

이것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최우선 덕목이었고 슈테판은 높은 임무완수율을 통해 자신의 신뢰를 증명하고 있었다.

“어쩐지 도망을 안 치더라고요.”

“그래?”

잠시나마 용병업계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용병이라는 녀석들은 걸핏하면 내빼는 녀석들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시나무 용병단은 오귀스트와의 일전 속에서도 도망가지 않았었다.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기에 얄팍한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던 것이었다.

“혹시, 앞으로도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이라면 여자관계는 좀 주의시키라고.”

“네?”

마커스는 블라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떠도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아하.”

마커스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전직 창관의 초팔이.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슈테판을 바라보았다.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슈테판은 블라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반대쪽 눈은 찌푸리지도 않은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음?”

슈테판과 의미 없는 눈싸움을 하고 있던 블라드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하나가 뱅뱅 맴돌기 시작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나 보군.”

하늘 위를 빙빙 돌고 있던 까마귀는 마커스가 팔을 내밀자 익숙한 모습으로 그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도 아니고 까마귀를 쓰네.’

발목에 매달아 놓은 편지통도 새까맣게 칠해진 것이 그 누구도 이 까마귀가 전서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았다.

“으음······.”

블라드는 까마귀를 보며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 까마귀가 보내온 소식을 접한 마커스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갈 뿐이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네?”

데어마르까지 같이 가겠다던 마커스와 그의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무언가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다는 양 서둘러 말머리를 돌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다니까.”

마커스는 또다시 천연덕스럽게 질문하는 블라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이놈은 영악한 놈이다.

순진한 척, 모르는 척하며 또다시 자신이 경고한 선을 넘고 있으니까.

역시 페테르님께 이 녀석을 달라고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마커스가 보내는 무거운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 속에 담긴 경고는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으니까.

“어서 데어마르로 가라.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어서 가라. 레이디의 기사야.

그녀가 너를 애타게 부르고 있으니까.

“너무 늦으면 안 될 거다.”

“······.”

그러니 어서 가서 너의 의무를 다하길 바란다.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하늘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기 전에.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4화 11

그녀가 너를 부른다 (3)

단단히 쌓아 올린 2층짜리 오두막.

일개 촌구석 서민이 짓기에는 과분한 집 앞에는 이제 수확을 막 앞둔 너른 호밀밭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 있어?”

요란하게 삐걱대며 울리는 마룻바닥

마치 이곳이 자신의 집이라도 된다는 양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오두막을 거닐고 있었다.

“다 알고 왔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서로 피곤하게 가지 말자고.”

갈색의 벽면 위로 튀어 오른 핏자국들.

오두막의 주인인 늙은 사내는 착잡한 눈빛으로 붉은 자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지워지지 않을 붉은색의 흔적 아래에는 눈조차 감지 못한 자신의 아들이 쓰러져 있었으니까.

“······무엇을 묻는지 모르겠군.”

“방금 그 말 하다가 당신 아들 목 날아간 거 못 봤어. 영감?”

행색은 고귀한 귀족이었으나 나오는 어투는 상스럽기 그지없었다.

“진짜 일가족이 다 죽어 나가야만 입을 열 셈이야?”

협박을 하는 사내의 짙은 눈썹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불끈거리는 상체의 근육은 지금도 검을 뽑아 들겠다는 듯 위협적으로 움직여대고 있었다.

“아무리 라브노마의 녹을 먹고 살던 당신이라도 지금은 가족을 챙겨야 할 때 아닌가? 이제는 있지도 않은 가문 따위에게 충성을 바칠 필요는 없잖아.”

잔뜩 부풀어진 악의를 보며 한때 기사였던 노인은 그만 웃고 말았다.

고작 이딴 녀석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봐야 한다니.

너무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꼴도 보게 되는 거겠지.

“네가 뭐라고 지껄이던 너희들의 말에는 신뢰가 없다. 이 비열한 찬탈자들아.”

은퇴한 늙은 기사.

자신의 장원에서 조용히 여생을 마치려 했던 라브노마의 늙은 검이 비릿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서부에 있는 자 중 그 누가 용의 개가 된 네놈들의 말을 믿어 줄까.”

“영감······.”

노인이 하는 말을 들은 이슈트반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고개를 들고는 눈을 감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라브노마의 꼬맹이가 어디 갔는지 말해주면 고통 없이 죽여드릴게. 어차피 그 꼬맹이가 어디로 가든 뭣도 못 한다는 걸 알잖아.”

어르듯 말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파멸을 이야기하는 불청객.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가만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어디를 가도 무엇도 못 하는 존재라······.”

이슈트반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파고들고 있었다.

마치 승리한 자의 표정 같은 미소였다.

“북쪽에서 온 까마귀는 그렇게 말하지 않던데.”

“······!”

가장 듣기 싫은 대답을 들어버린 이슈트반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사나운 불길에 태워졌다 할지라도 뿌리만 살아 있다면 다시금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서부의 지배자.

갑작스러운 습격에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맹약을 위해 자신의 핏줄보다 용의 조각을 먼저 빼낸 가문. 라브노마.

아직 서부는 그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 늙다리가!”

마치 조롱하듯 말하는 노인을 보며 발악하듯 외치는 이슈트반.

“어차피 뒤진 거 곱게 뒤졌어야지!”

그의 손끝에서부터 뻗어 나온 검이 번개처럼 노인의 가슴팍을 파고 들어갔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허물어지는 노인.

그럼에도 그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이유는 마지막까지 임무를 달성했다는 기사의 자긍심 때문일 것이다.

라브노마의 늙은 기사는 결국 마지막까지 씨앗 하나를 지켜내었으니까.

“전부 다 불태워!”

신경질적인 이슈트반의 외침과 함께 오두막 곳곳에 불이 댕겨지기 시작했다.

큰 소리로 울부짖는 가축들과 함께 미처 수확하지 못한 호밀들의 고개가 숙여지기 시작했다.

한 사내가 평생을 걸쳐 쌓아 올린 명예로운 장원이 불타고 있었다.

“빌어먹을······.”

근본 없는 비열한 찬탈자.

맹약 없는 껍데기.

지금도 서부를 떠돌아다니는 가이다르의 멸칭들을 떠올리며 이슈트반은 애써 분노를 잠재우려 노력하고 있었다.

“······전부 다 가져오면 돼.”

명예가 없어 멸시당한다면 가져오면 된다.

역사가 없어 무시당한다면 빼앗아오면 된다.

그것이 서부의 법칙이며 가이다르의 역사였으니까.

“내 검까지도.”

북쪽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가이다르의 핏줄.

사방에서 일렁이는 불꽃의 그림자들이 이슈트반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

“오······.”

슈테판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자그마한 감탄사를 내지르고 말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하는 도시.

중부와 북부, 그 둘을 구분 짓는 경계에 접해있는 데어마르라는 도시는 분명 여태껏 본 적 없는 독특한 향취를 지닌 곳이었다.

“북부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기사셨군요.”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러나 슈테판과 용병단원들이 지금 놀라고 있는 이유는 데어마르라는 도시가 주는 첫인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데어마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블라드 님!”

작지만 옹골차 보이는 성벽.

그 아래에 서서 블라드에게 경례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용병들에게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아무리 봐도 그 정도가 아닌 게 아닌데요?”

“시끄러.”

마치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듯한 병사들의 모습을 보며 용병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어깨를 곧추세우고 말았다.

갈 곳은 많았지만, 딱히 환대받아 본 적은 없던 용병의 삶.

부평초처럼 떠도는 삶을 살아왔던 이들에게 있어 지금의 광경은 분명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일단 가지.”

블라드는 자신의 등 뒤로 당황한 듯한 용병들의 눈빛이 박혀오는 것을 느꼈지만 일단은 움직이기로 했다.

데어마르라는 도시와 블라드라는 기사의 관계는 간단한 몇 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끈끈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으니까.

“이것들은 왜 따라오는 거야.”

“떨어져. 이놈들아!”

병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도시로 들어선 일행들.

마치 시골길이나 다름없는 한적한 길목이었으나 정작 일행의 전진은 조금씩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달라붙는 거야.”

용병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용병에게 달라붙는 아이들이라니.

여태껏 달아나는 아이들은 많이 봤었어도 가까이 다가오는 아이들은 처음인 용병들이었다.

“명예 결투의 기사 블라드다!”

“저런 금발은 처음 봐.”

“진짜 어디 귀족 출신인 게 맞나봐.”

“······.”

아이들의 말을 알아들은 용병들이 다시 한번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최대한 조용히 한답시고 서로가 귓속말을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 특유의 높은 목소리는 일행의 귓가에 닿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니까.

“아이들이 기사님을 굉장히 좋아하는군요.”

“······원래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슈테판의 물음에 블라드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흐트러뜨리며 한숨을 쉬고 말았다.

몇 번이나 들렀던 도시였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일행과 움직이다 보니 아이들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가면 갈수록 이러네.”

서서히 입소문이 퍼지고 있는 북부의 신성. 쇼아라의 블라드.

그러나 이 도시에서만큼은 조금은 다른 칭호로 알려진 사내.

그런 블라드에게 아이들이 호기심을 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은퇴하면 이런 곳에 정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계약을 마치자마자 은퇴 이야기라니.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하! 그만큼 이곳의 인상이 좋았다는 이야기죠.”

슈테판은 블라드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달라붙은 아이들을 떼어내며 길을 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눈앞의 어린 기사는 이런 환대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거든요.”

자그맣게 흘러나오는 슈테판의 말에 용병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을 낮고, 거친 곳에서 살아왔던 사내들이었기에 지금의 상황이 영 떨떠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경례하는 병사들, 따라붙는 아이들.

그리고 저택의 지붕 위에까지 올라타 애타게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는 하얀 뱀까지.

자그마한 도시 데어마르는 지금 이들을 진심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

하얀색이 조용히 빠져들어 간다.

하나, 둘. 소리 없이.

“약 5천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5천이요?”

자그마한 찻잔 속으로 하얀 각설탕을 욱여넣듯 빠뜨리기 시작하는 바예지드의 기사.

내일이 아닌 오늘만을 살아가는 보르단의 박력 넘치는 손놀림에 알리시아는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5천입니다.”

보르단의 찻잔은 올라가고 있었으나 정작 알리시아의 입은 다물어지는 중이었다.

그가 내뱉은 5천이라는 단어는 그만한 무게감을 지닌 숫자였으니까.

“보내주신 전보에는 분명 3천이라고······.”

“가이다르의 기수들이 따라 올라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서부의 지배자 가이다르.

그들은 혼자 북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서부의 가문들과도 함께 올라오는 중이었다.

“이것이 지배자라 칭해지는 군주들의 무서움이죠.”

“······.”

알리시아는 보르단의 말을 듣자마자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늙은 기사가 쥐고 있는 찻잔을 빼앗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예지드는 어찌하실 생각인가요?”

점점 늘어만 가는 부담감에 굳어지는 알리시아의 얼굴.

그런 그녀를 보는 노기사 던칸의 표정도 덩달아 굳어져 가고 있었다.

“현재 지원군 5백 명이 데어마르로 오는 중입니다. 제가 먼저 이곳으로 온 이유도 부디 그들을 위해 성문을 열어주십사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5백이요? 고작?”

5천을 대비하기 위해 보내온 병력이 고작 5백이라니.

보르단의 대답에 알리시아는 있는 힘껏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지만 정작 그녀를 대하는 늙은 기사는 침착할 뿐이었다.

“현재 쇼아라 쪽으로 바예지드의 군사들을 집결시키고 있습니다. 북쪽에 있는 병사들까지 빼내서 말이죠.”

데어마르라는 도시는 몇천의 병사들을 모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곳이었다.

아무리 단단한 성벽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비효율을 초래할 정도로 작은 도시였으니 페테르 바예지드는 가능한 한 병력을 유연하게 운영해야만 했다.

“······북쪽의 군사들까지 빼 오시다니. 그렇다면 야만족들은 어쩔 생각이시죠.”

신을 믿지 않는 자들.

북방한계선 너머에 있는 야만족들은 언제나 북부의 군주들을 괴롭히는 존재였다.

강철공이 있는 바라노프 가문이 천시받는 북부의 영주임에도 공작의 작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것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요제프 님께서 이미 해결하셨으니까요.”

바예지드는 이미 북부로 진출하려는 가이다르의 야심을 눈치채고 있었고 그렇기에 전선을 두 개로 만들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었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아게와 부다아트 족을 이용한 야만인 유화책은 적어도 이번 전쟁에서만큼은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요제프님께서는 데어마르를 한 몸과도 같이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5천에 대항하는 7백과 5백.

그리고 오랜 세월을 하이날을 지켜주었던 데어마르의 성벽.

이것으로 버티고 준비하고 있던 본대로 후려친다.

거칠게 올라오는 서풍을 대비해 냉혹한 북부의 바람은 이미 준비를 마쳐놓았다.

“저희가 버티기만 하면 되겠나요?”

“물론입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요제프님께서 준비하고 계신 여러 방법이······.”

똑똑똑.

전쟁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던 둘에게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알리시아 님. 지금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오. 이제야 병사들과 함께 도착하셨나 보군요.”

보르단은 집사의 말을 듣고는 손바닥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디 바예지드의 진심을 믿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 5백의 지원군을 이끌고 오신 분이 바로······.”

집사의 안내에 따라 문이 열리고, 보르단의 소개와 함께 집무실로 들어선 남자.

“응?”

그 남자를 알아본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햇살에 비치는 남자의 금발이 알리시아의 눈동자 안으로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알리시아 님.”

저 먼 동쪽에서부터 데어마르의 변고를 듣고 달려온 사내.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가 지금 이곳에 당도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는 듯한 보르단의 당황 어린 표정과 함께.

“······조금 늦으셨군요. 블라드 경.”

이제야 자신이 찾고 있던 얼굴을 발견한 알리시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기사를 맞이했다.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조금씩 떨리는 그녀의 손끝이 하얀색의 각설탕을 집어 들고 있었다.

여태까지 쓴맛만을 느껴왔던 그녀의 모든 감각이 이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는 달콤함을 찾아내었다.

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5화 9

새로운 둥지 (1)

오랜만에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웃을 듯 눈꼬리는 살짝 휘어져 있었으나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

블라드도 그 표정을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너는.”

겨울에 떠났으나 여름에 마주한 자신의 주군.

조금은 더 짙어진 듯한 요제프의 눈그늘이 블라드를 향해 날카롭게 치켜 떠졌다.

“이곳에만 오면 사건을 저지르는 거냐.”

“······죄송합니다.”

요제프의 질책에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데어마르에서의 전적이 화려하다는 것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이날 가문의 가보를 깨 먹다니······. 진짜 어이가 없군.”

자신이 말해놓고도 황당하다는 듯 의자에 크게 기댄 요제프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큰 전쟁을 앞두고 데어마르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도 모자랄 판에 하이날의 가보를 깨 먹고 오다니.

아직도 요제프는 블라드의 말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알리시아의 모습이 선한 것만 같았다.

“동쪽 끝까지 다녀왔다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군.”

할말을 잃은 요제프를 대신해 입을 여는 애꾸눈의 기사.

자중하라는 의미에서 추방까지 시켰건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니는 제자를 향해 자야르는 하나 남은 눈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블라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내뱉을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눈치를 보며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던 블라드는 지금만큼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함을 자각했다.

“이 멍청한 놈.”

짧은 호통과 함께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자야르의 신형.

그의 토대나 마찬가지인 신묘한 발걸음을 발동한 자야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블라드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

“힉!”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누군가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매섭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허공을 가르는 자신의 발길질만이 공허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

“······.”

자야르의 발길질을 피해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는 블라드.

당황한 듯한 표정과는 달리 확실히 간격을 벌려낸 그의 모습을 보며 요제프가 놀랐다는 듯 의자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아.”

자신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제프와 아직도 한쪽 발을 든 채 멈춰있는 자야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집무실의 분위기를 살피던 블라드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거 맞아야 하는 거였죠?”

“······아무래도 그렇지.”

은근슬쩍 다시 정강이를 내미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자야르도 이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 녀석은 예측할 수 없는 놈이었다.

처음 만났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역시나 멍청한 놈.”

따악-!

집무실 안으로 경쾌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크게 출렁이는 블라드의 금발.

내민 정강이가 아닌 뒤통수를 후려치는 데 성공한 자야르.

“항상 후속타를 대비하라고 했잖냐.”

자신을 향해 슬그머니 미소짓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조금은 따라 웃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

햇빛을 등진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요제프도, 그의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자야르도.

비록 꾸중을 듣는 와중이었지만 변한 것이 없는 지금의 모습에 블라드는 왠지 안심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알리시아 남작님은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 준다고 하셨다. 너그럽게 용서해준 그녀에게 감사하도록.”

“네.”

요제프와 일행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와 영지 안에 임시로 마련된 주둔지를 시찰하고 있었다.

사방에 깔린 천막과 모닥불들.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마다 올라가는 가느다란 연기를 보며 블라드는 어쩐지 데어마르와는 어울리지 않은 광경이라 생각했다.

“오늘부터 너는 공식적으로는 내 휘하가 아닌 알리시아 님의 기사로써 활동하게 될 거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요?”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거든.”

이번 전쟁에서 블라드는 쇼아라의 블라드가 아닌 알리시아의 블라드로서 활동해야만 했다.

아직 블라드는 교황청에 눈 밖에 나 있는 존재였으며 그 교황청의 군세가 북부 한가운데 틀어박혀 있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언제까지 알리시아 님의 휘하에서 움직이게 됩니까?”

“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그런 건 아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의 물음에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무리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블라드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저는 아무래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칭호가 좀 더 마음에 들거든요.”

“흠.”

블라드의 말에 요제프와 자야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기사 앞에 붙는 명예로운 칭호는 소속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드러내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블라드가 데어마르라는 영지와 인연이 있다 할지라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칭호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일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애착을 가져보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요제프는 묘한 말을 남긴 채 군영을 둘러볼 뿐이었다.

“알리시아 님은 조용히 넘어가 준다고 했지 그냥 넘어 가준다고는 말하지 않았거든.”

가문을 처음으로 세운 선조부터 내려온 귀한 가보였다.

아무리 블라드가 데어마르의 은인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나름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그런 물건이었다.

“남작님께서는 너에 대한 우선 협상권을 요구하셨다. 우리의 7년 계약이 끝난 다음에 말이야.”

"협상권이요?"

요제프와 블라드는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계약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었다.

기회와 신의를 맞바꾸기로 한 7년짜리 계약은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 계약이 끝난 후에는 블라드는 엄연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제가 거부할 수도 있나요?”

“그러면······ 아마도 슬퍼하시겠지.”

어차피 계약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영주를 찾아가기 전에 자신과 먼저 이야기 해달라 하는 것뿐이었다.

하이날의 영주 알리시아는 그만큼 블라드라는 기사를 자신의 밑에 두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말은 아직도 잘 있나?”

“누아르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녀석 말이다.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너의 말.”

그러나 이 모든 대화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나 일어날 일.

블라드의 소속은 겉으로는 하이날에 가깝게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명령권은 요제프가 쥐고 있는 상황.

요제프는 이미 블라드라는 기사를 어찌 쓸 것인지 머릿속으로 구상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데어마르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은 어디까지나 수성(守城)을 위주로 움직이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서 가만히 숨죽인 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겠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천막들을 헤치며 변두리까지 나아간 일행들.

그곳에는 다른 천막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듯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천막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하나의 색깔로 통일되어 있던 요제프 군의 천막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의 천막.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를 확인한 블라드의 눈썹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저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한 계약이었거든.”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인사하지. 앞으로 같이 움직여야 할 사이일 텐데.”

어째서인지 불길하게 들리는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앞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친한 사이라 착각할 만큼 자신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사내.

땋아 내린 머리, 곳곳에 새겨진 문신들.

“오랜만이오!”

부다아트 족의 아게가 블라드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출세하셨군요. 기사님.”

“시끄러.”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블라드.

그런 그를 보며 슈테판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직위 하나 올리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겁니다. 게다가 기사님은 전쟁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블라드는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마구간 안에서 푸르릉거리는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푸힝힝힝-

말 안 듣고, 거칠고, 그리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

그러나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 빠른 초원의 아들.

“게다가 그냥 정찰대도 아니고 타격대라니요. 제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이건 진짜 괜찮은 기회거든요.”

요제프는 블라드와 누아르가 가지고 있는 기동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동성에 알맞은 병사들을 붙여 한 번 정도는 가이다르를 휘저어 볼 생각이었다.

“일개 평기사가 아니라 하나의 분대를 맡으셨으니 분명 이번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치실 수 있을 겁니다.”

“······야만인 놈들이 내 말을 잘 들어준다면 말이지.”

그렇게 요제프에 의해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을 떠맡게 된 블라드.

요제프가 데리고 온 기사 중 야만인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인선도 아니었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

“같이 가겠습니다.”

“아냐. 따라오지 마.”

야만인들이야 처음 보는 이상한 놈들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블라드가 대장이 되니 좋았고 슈테판은 고용되자마자 블라드의 부관으로 승진하게 된 격이었으니 모두가 좋은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블라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한참 헝클어진 머릿속이나 풀어볼 겸 잠시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애초에 목이 빠져라 자신을 찾고 있는 존재도 있었고.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따라 병사들이 북적거리는 주둔지를 빠져나간 블라드.

그렇게 한적한 저택의 뒷마당까지 걸어 들어간 블라드는 언덕 위에서 까딱거리고 있는 하얀색의 형체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찾는 건데?”

야트막한 언덕 위, 하이날 가문의 문양에 박혀 있는 거대한 나무.

그곳에는 블라드를 향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 하얀 뱀이 서 있었다.

※※※※

“······훌쩍.”

넓은 방 안에서 홀로 꿈틀거리고 있는 하얀 굼벵이 한 마리.

창밖에서부터 시작된 달빛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줬다고 진짜 그걸 깨부수면 어떡해.”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과 침대 위로 널브러져 있는 손수건들이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둑이라도 자그마한 균열 하나에서부터 무너지게 되는 법.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의들에서도 여태껏 잘 버텨왔던 알리시아였지만 결국 호박석이라는 계기 하나 때문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건데.”

선조 때부터 내려온 가보이기도 했지만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깨부수다니.

아니 녹아들었다고 했었나.

“크응.”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흔적 중 하나는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눈물을 훔치며 일어선 알리시아는 그래도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받기로 했다.

“됐어. 어차피 이렇게 쓰라고 준 거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노란색 호박석에 이해할 수 없는 가호가 깃들어 있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빌려주었던 것이고 결국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된 것이다.

알리시아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래도 깨 먹기만 한 건 아니네.”

침대 옆, 화장대에 앉은 알리시아는 퉁퉁 부은 눈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블라드가 호박석 대신 내밀었던 편지들을 꺼내 들었다.

“아우슈린······ 엘프들이라.”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도무지 인간들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기에 소문만 무성한 곳이었지만 요즈음 중앙에서부터 엘프들의 물품이 비싸게 팔린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이거 잘하면’

비록 블라드는 호박석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대신 엘프들이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왔다.

어쩌면 지금 들고 있는 편지가 아버지가 물려주신 호박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알리시아는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의 가치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보았다.

‘읏!’

엘프들이 보냈다는 편지 봉투를 열어본 순간,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이거 뭐야.”

가뜩이나 우울해 있던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날아온 바람에 당황하며 창가로 다가가 마구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알리시아가 눈을 비비는 사이 봉투 안에서 시작된 바람은 곧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방을 청량한 숲의 향기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밤바람에 겨우 눈을 뜬 알리시아.

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내리쬐는 달빛을 받으며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이젠 아주 제집처럼 드나드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색깔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아챈 알리시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묘비들을 향해 목례 한번.

하이날의 나무를 향해 손 한 번을 흔들고.

그리고 언덕 위에 올라선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

“응?”

순간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보이는 광경에 당황하며 다시금 눈을 비비고 말았다.

“저 언덕에는 반딧불이 없는데?”

반딧불들이 보이고 있었다.

블라드에게서부터 시작된 빛의 가루들이.

멀리서 보고 있기에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알리시아의 눈에는 언덕 위에서 떠도는 불빛들이 보이었다.

분명, 이제야 막 태어난 것만 같은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6화 13

새로운 둥지 (2)

“잘할 수 있을까요?”

햇빛이 가득한 복도를 걷는 두 사람.

“블라드 경에게는 아직 이르지 않을까요? 다른 기사들 옆에서 좀 더 보고 배우는 것이······.”

“충분할 겁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알리시아와는 달리 요제프의 얼굴은 평온할 뿐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블라드 경은 이미 한 조의 우두머리였거든요.”

“아.”

알리시아는 요제프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은 하이날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바예지드의 기사인 블라드.

요제프 앞에서 그에 대한 의견을 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그럼?”

“제가 고용했었던 용병이었습니다. 바르나에서 시작한 몬스터 토벌에서 만났었죠.”

요제프는 지난 겨울날을 생각하며 복도 밖을 바라보았다.

17살 주제에 31살짜리 신분패를 가지고 온 녀석.

지금 생각해봐도 당돌하기 그지없는 녀석의 행동을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래도 전부 거친 자들뿐이지 않나요? 야만인에 용병에, 다들 처음 다루는 부하라 하기에는······.”

“알리시아 님.”

알리시아의 걱정 어린 의견에 걸음을 멈춘 채 그녀를 돌아보는 요제프.

그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그 녀석을 걱정하시는 이유. 잘 알고 있습니다.”

“······.”

처음으로 나서는 전쟁이라 들었다.

그럼에도 한 조의 대장이 되어 따로 임무를 수행하게 되리라는 것도.

아직은 어린 나이니 다른 기사들 옆에 붙어 있으며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라는 알리시아였지만 블라드는 이미 누구의 걱정을 받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증명한 사람이었다.

“포악한 야만인, 닳고 닳은 용병들······. 확실히 아직 스무 살도 안된 기사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사람들이겠죠.”

요제프는 그 말과 함께 복도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이날과 바예지드의 병사들이 모여 있는 임시 주둔지.

그곳에 옹기종기 세워져 있는 천막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잔뜩 모여들고 있는 곳이 보였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택까지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

그 소리와 함께 소속과 출신이 다른 남자들이 모두 뒤섞이기 시작했다.

“거칠기로만 따지자면 녀석도 전혀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요.”

“네?”

알 듯 말 듯 한 말과 함께 한 번 보라는 듯 창가에서 비켜서는 요제프.

“직접 보시죠.”

요제프의 안내에 따라 알리시아는 자연스레 창가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응?”

병사들이 모여 있는 임시 주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잔뜩 흥분해 있는 병사들 사이로 커다란 원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두 남자.

“······.”

알리시아는 손바닥으로 햇살을 가리며 멀리 있는 광경을 파악하고자 애썼다.

햇빛에 비쳐 반짝이는 금발.

그 주위에서 노니는 반딧불들이 있었다.

지금은 밤이 아닌 한낮이었는데도.

※※※※

시원하게 한 방 후려쳐!

힘내라! 데어마르의 기사!

저 야만족 놈들한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줘!

“후······.”

사방에서 쉴새 없이 터져 나오는 고함에 심장까지 울렁이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가다듬는 블라드.

그 앞에는 상의를 탈의한 채 험악한 인상을 짓고 있는 아게가 있었다.

불끈거리는 근육 위로 빈틈없이 새겨진 문신들이 살벌해 보였다.

“들어와 봐!”

야만인 특유의 손짓과 함께 블라드를 도발하기 시작하는 아게.

그 모습에 맞춰 원을 둘러싼 병사들의 함성이 커져만 갔다.

“이것들 엄청 시끄럽네.”

지금의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침을 뱉어낸 블라드.

계급장을 뗀 채 지금만큼은 순수한 블라드로 서 있는 그는 천천히 쇼아라에서의 옛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숨을 한 번 몰아쉴 때마다 차오르는 과거의 광기.

기사의 푸른 눈동자 안에는 어느새 거칠기 그지없는 뒷골목의 양아치가 깃들기 시작했다.

“······흠.”

아게는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말았다.

묘하게 자세가 잡혀 있는 가드.

라문드에게 직접 배운 근접 전투술은 확실히 블라드의 빈틈을 가려주고 있었다.

‘뭔 놈의 눈빛이.’

기사의 기술과 뒷골목의 기세를 동시에 품은 채 다가오는 블라드.

그를 보며 아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온다!’

일격필살의 기술은 간격을 지배하는 기술이다.

비록 검을 들지 않았더라도 이미 블라드의 몸에는 자신만의 공간이 각인되어 있는 상태였다.

‘왼쪽!’

날렵하게 뻗어오는 주먹이 날카롭다.

그러나 아게는 박투술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한 경험이 있는 전사.

재빨리 오른팔을 들어 올려 턱을 가린 그는 곧바로 역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만.

“큭!”

오른쪽 발목에서부터 갑작스레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아게의 균형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어야지.”

“······!”

왼쪽은 속임수였다.

아니 어쩌면 속임수가 아니라 그저 빠른 것은 아니었을까.

아게의 반응을 통해 타격점을 바꾼 블라드는 낮은 발차기를 통해 아게의 오른 발목을 후려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아게는 히죽 웃는 블라드를 보며 다시 한번 떠올릴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린드부름을 몰았고 따라잡았으며 결국은 살해한 용살자.

블라드는 자신이 보았던 사람 중 가장 큰 놈을 잡은 사냥꾼이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짖지 마라.”

푸른 눈동자에서부터 시작한 기세가 하나의 선을 이루며 아게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억!”

기세를 뒤엎기 위해 서둘러 블라드를 껴안듯 달려든 아게였으나 곧바로 시작된 연속된 타격에 그만 눈앞이 하얘지기 시작했다.

절대로 한 방에 끝내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밀고 들어오는 블라드의 공격.

펑! 펑-펑-!

매서운 주먹이 쉼 없이 옆구리와 복부를 후려갈기는 통에 아게는 숨을 들이켤 수 없을 정도였다.

내뻗는 주먹 하나하나가 마치 통나무가 달려드는 듯한 묵직한 타격이었다.

‘······!’

겉보기에는 단순히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모양새 같았지만 직접 대하고 있는 아게는 느낄 수 있었다.

체격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밑에서부터 무너뜨려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자신보다 큰 상대와 싸워왔던 블라드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 아게를 상대로 자신이 쌓아 올린 경험을 사정없이 풀어헤치는 중이었다.

“크억!”

야만인보다 거칠게.

닳고 닳은 용병보다 질척하게.

그렇게 뒷골목에서 뛰쳐나온 짐승이 기사의 기술을 뒤집어쓴 채 아게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내가 졌다.”

마침내 커다란 북부의 나무를 밀어 넘긴 블라드.

등바닥에서부터 차가운 흙의 감촉을 느낀 아게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자신을 타고 누르고 있는 사냥꾼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등진 블라드의 얼굴은 온통 새까말 뿐이었다.

“존댓말 해라.”

“······내가 졌습니다.”

아게에게서 떨어져 나온 블라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저 앞에 있는 야만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꼬운 놈 있으면 덤비고, 대신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라 검으로 상대해 준다.”

블라드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야만인들은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계약에 따라 같이 오기는 했지만 제국민에게 고개 숙이지 않겠다 말했던 야만인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라도 어느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규칙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블라드는 힘으로써 그들을 이해시키는 데 성공했다.

“잠깐!”

“······또 뭐야.”

방금까지만 해도 널브러져 있었으나 외마디 고함과 몸을 일으킨 아게는 큰 소리로 블라드를 불러세웠다.

“대장은 네가······. 아니, 대장이 하는 거로 하는데!”

“하는데?”

아게의 눈동자가 군중 속에 숨어 있는 주홍색을 찾기 시작했다.

부다아트 족의 전사 아게.

아직 그는 완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부관까지는 아니지!”

“······하.”

내가 졌으니 너의 말은 따르겠지만 그렇다 해서 이인자의 자리까지 순순히 내어줄 수는 없다.

아게는 적어도 슈테판에게까지는 고개 숙일 생각이 없었다.

“아 미치겠네.”

“그건 둘이서 알아서 해.”

아게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슈테판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앞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결국, 부하들에 의해 밀쳐지듯 앞으로 나온 슈테판.

그런 그를 보며 병사들의 함성이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부관 자리에서 내려오면 봉급도 깎이는 거야.”

“······저놈 힘 많이 빼놓으신 거 맞죠?”

피 섞인 침을 뱉어내는 아게를 보며 슈테판도 천천히 목을 풀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되는 야만인과 용병과의 싸움.

또 다른 볼거리에 흥분한 병사들의 함성이 높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비켜봐.”

곳곳에서 다가오는 사내들을 뿌리치며 원 밖으로 나온 블라드.

“······.”

“······.”

그렇게 한적한 바깥까지 나선 블라드는 저 멀리 복도 난간에서 놀란 듯 굳어 있는 고귀한 레이디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블라드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알리시아는 방금의 대결에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습니까? 앞으로도 잘할 것 같습니까?”

“······네.”

순식간에 야만인들을 제압한 블라드를 보며 알리시아는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명예로운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어린 기사 블라드.

그러나 오늘 보인 모습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거친 것이었다.

“잘하고 있네요. 앞으로 잘할 것도 같고.”

그리고 알리시아는 그런 블라드의 색다른 모습이 영 나쁘게 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사와 함께 언덕을 향해 떠나가는 블라드.

그의 뒷모습을 통해 새로운 블라드를 발견한 알리시아의 눈동자가 조금씩 일렁이고 있었다.

※※※※

서부는 끝없이 뻗어 나가야만 한다.

광대한 땅을 지배하고 있으나 그들이 가진 땅은 풀 한 포기 제대로 나지 않는 황량한 벌판일 뿐.

그렇기에 서부는 언제나 서로가 가진 것을 빼앗고 약탈하며 살아왔었다.

몰락한 용이 그들의 고개를 밖으로 돌려주기 전까지는.

“남작님! 남작님!”

도시 나사우.

이즈니크 남작이 지배하는 항구 도시.

서부 해상 무역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이즈니크 남작이었지만 지금 들려오는 보고는 그의 귀를 의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 털렸다고?”

“그것이······.”

“전부?”

“······그렇습니다.”

점점 작아지는 단장의 보고에 멋들어지게 세워놓은 남작의 콧수염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개소리야!”

쾅 소리를 내며 책상을 후려친 이즈니크 남작.

차오르는 화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는 속에서부터 시작된 일갈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도대체 누가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약탈을 했다는 거냐!”

산적인가?

아니면 근처의 영주들이 저질렀나?

한참 라브노마와 가이다르가 싸울 때라면 몰라도 이미 이 근방은 나름의 질서가 잡힌 상태였기에 보급품이 약탈당했다는 말은 남작으로서는 믿기 힘든 보고였다.

“누구야! 누가 털었는지도 모르나!”

분노와 함께 충혈되는 그의 두 눈을 보며 기사단장은 그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그것이······. 하이날의 병력이라고 합니다.”

“뭐?”

“하이날의······.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라는 자가······.”

기사단장의 보고에 남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고 말았다.

“하이날? 데어마르? 아니, 거기서 여기가 얼마나 떨어진 곳인데?”

그도 그럴 것이 데어마르와 나사우는 쉼 없이 말을 타고 달려도 일주일은 넘을 거리였기 때문에.

가뜩이나 다가올 일전에 대비해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할 하이날의 병사들이 여기까지 찾아올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놈들이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단 말이냐!”

먼 곳에서부터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바람같이 사라져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약탈자들.

그러나 사태는 이미 벌어졌고 남작이 보낸 보급품은 하나도 남김없이 불태워진 상태였다.

그들이 남긴 유일한 단서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이름 하나뿐이었다.

“그것들을 당장 찾아내! 찾아내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빼앗기는 것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는 서부.

그러나 약탈자들조차 약탈하는 악랄한 무리가 지금 서부의 밤하늘 사이로 숨어들어왔다.

뒷골목의 기사, 북부의 야만인, 그리고 닳고 닳은 용병들.

짙은 눈그늘의 사내가 한 땀 한 땀 기워놓은 악의 어린 타격대였다.

서부와 북부와의 전쟁.

다가오는 서부의 악의에 대항한 가장 빠른 북부의 봉화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의 것이었다.

14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7화 14

최후의 라브노마 (1)

좁은 산길을 걷고 있는 병사들.

무언가를 잔뜩 실었는지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가 산속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무슨 소문?”

평온하다 못해 지루한 행군길.

데어마르로 향하는 보급대는 그만큼 평화로운 길을 걸어왔고,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씩 긴장이 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어마르로 가는 보급대들이 약탈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약탈?”

병사 중 하나가 걷는 길이 지루했던 모양인지 옆에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들은 병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 뿐이었다.

“뭔 놈의 산적들이 병사가 잔뜩 있는 보급대를 턴다고 그래.”

“진짜라니까. 저번 마을에 있을 때 거기 사람들이 하던 말을 들었다고.”

감히 누가 무기를 가득 들고 있는 군인들을 습격한단 말인가.

아무리 보급대라는 병과가 일반적인 군대 행렬보다는 취약하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산적들이 목표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애초에 군인들을 털 정도의 무리라면 소문이 나도 진작에 났겠지.”

“······그건 그렇긴 한데.”

말을 걸던 병사도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 상황.

설사 보급대를 털만 한 산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창 군사들이 오가는 지금만큼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여야 할 때일 것이다.

“응?”

그러나 불행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인지와 상식 밖에서 다가오는 법이었고.

“화살이다! 불화살!”

“마차에 불이 붙었다!”

불길한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었다.

“나무가 쓰러집니다!”

수풀 사이에서부터 악의를 가득 담은 불화살들이 쏘아지고 그와 동시에 행렬의 앞뒤로 나무들이 쓰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습격!”

“모두 무기를 들어라!”

순식간에 막혀버린 길목.

마차 위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새까만 그을음과 놀란 말들의 비명 소리. 서부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린 바예지드의 악의가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다들 침착해라!”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이었지만 보급대의 대장은 재빨리 휘하의 기사와 병사들을 독려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전원 정지! 화물을 지켜라!”

중년의 나이에 근엄해 보이는 기사.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경험이 있는 그는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다가올 기습을 대비하려 하였으나.

“······!”

그러나 달려드는 악의는 그의 생각보다 빠르고 날카로울 뿐이었다.

가공할만한 속도.

그러나 보았을 때는 늦었고 반응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컥, 커억!”

서늘한 감각과 함께 뜨끈한 액체가 울컥거린다.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급대의 대장은 목을 부여잡은 채 꺽꺽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심장에서 출발한 박동은 목을 통해 쉴새 없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반응조차 못했다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이 굳어 있는 가운데, 흩날리는 핏물들을 뒤로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결투 아닌 전투.

그럼에도 일격필살의 묘리는 어느 전장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는가.

경험 없는 어린 기사는 수많은 교차 검증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애썼고 그리하여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 둘도 덤벼봐.”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강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이런 미친! 대장이······.”

“네 이놈! 너는 누구냐!”

대장의 죽음에 당황한 기사 둘이 다급히 검을 뽑은 채 블라드를 둘러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를 상대하는 둘.

그러나 정작 전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둘을 상대하는 하나였다.

“내가 누구냐고?”

조용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금발 머리의 사내에게서 천천히 한 줄기의 세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귀한 분에게 정당한 권한을 받아온 사람이자.”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확연히 빛나는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깃발, 이름, 그리고 세계.

이제 블라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세계를 새길 정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다.”

숲 가운데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외침 하나.

그 외침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전부 다 죽여버려!”

흉악한 용병들, 굶주린 야만인들.

블라드의 부름과 함께 정체 모를 사내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문신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이빨들이 선명했다.

“이 개자식들아!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이제야 나무가 아니라 사람 좀 찍어보겠네!”

비명 하나에 함성 하나.

흉측한 도끼 아래서 터져나가는 병사들의 투구들.

쉴새 없이 흔들리는 서부의 깃발 아래서, 마차에 실려있던 곡물들이 새빨간 피를 삼키며 마른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빨리 시작하자고. 이러다가 당신 부하들 다 죽겠어.”

“이, 이······.”

여유로워 보이는 블라드의 표정과는 다르게 두 명의 기사들은 그저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비명들.

그럼에도 기사들은 눈앞에 있는 침입자를 향해 쉽사리 검을 내뻗지 못하는 이유.

“안 들어올 거야?”

지금 이곳은 블라드의 전장이었으니까.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는 세계가 천천히 이 세상을 그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

“수고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바예지드의 역사와 함께 하는 도시.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두 명의 바예지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북방한계선에 있던 모든 요새의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대략 1천 정도의 병사들입니다.”

“좋다.”

루트거의 보고를 들은 페테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언자 라그무스가 건네준 지도를 받아들었다.

“적들은 현재 데어마르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 대략 5천 정도의 규모이지.”

지도와 함께 상세하게 전황을 설명하는 페테르.

지금 같이 군사들이 대놓고 움직이고 있다면 못 알아차릴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항하는 우리는 하이날의 군사를 합쳐도 약 3천 정도.”

“······네.”

가이다르는 혼자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6개 가문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으며 올라오고 있었으니 이 정도라면 차라리 서부 연합군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한 군세였다.

“강철공께서는 무어라 하십니까.”

“혹시 모를 야만인들의 위협은 막아주겠다고 했지만······. 역시나 직접적인 참전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서부의 강력한 도발에도 북부의 수호자인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는 이번 가이다르의 북상에 참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우트만 남작령의 사특한 존재를 해결하는 문제였을 테니까.

여전히 뭉그적대며 가시처럼 박혀있는 중앙의 군세는 강철공의 사지를 묶어놓는 중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데어마르와 가이다르의 대결이니 직접적인 동맹인 우리를 제외한다면 다른 북부 영주들은 참전할 만한 명분이 없기도 하겠지.”

마치 누군가가 짜 맞춰놓은 듯한 불리함의 모양새에 페테르는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7개 가문과 2개 가문의 전쟁.

단순한 숫자로 보자면 승부의 향방은 이미 정해진 셈이나 다름없는 상황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뚫고 들어갈 만한 틈은 분명히 있다.”

페테르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부의 뒤쪽.

아직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않은 서부의 가문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가이다르는 아직 완전한 서부의 지배자가 아니며 그들의 연합군은 헐거운 띠로 묶인 짚단과도 같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노린다.”

가이다르가 북부를 노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체제의 안정.

모자란 자원을 획득함과 동시에 강력한 군세를 통해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최우선 목표일 것이다.

“너에게 8백의 병사를 주겠다.”

“명하십시오. 아버님.”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자신들의 강점과 더불어 이미 가이다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간파해 놓은 상태였다.

“너는 내가 준 병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내려가라.”

“······배를 탑니까?”

갑작스러운 남하 지시.

당황하는 루트거와는 달리 페테르의 손가락은 쇼아라에서 시작되는 강줄기를 굳건히 가리키고 있었다.

“적들은 모래알과 같으니 우리는 그 틈새를 후벼판다.”

전쟁의 향방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결정된다.

애초에 페테르는 이번 전쟁의 승패를 5천과 3천이 맞붙는 대회전에서 결정지을 생각이 없었다.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즈니크 남작령의 도시 나사우를 점령해라.”

“······!”

페테르의 손가락이 강줄기를 따라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바예지드가 병사들을 빼내어 선제타격을 할 것이라고는.

“점령하지 못해도 좋다. 대신 철저하게 파괴해라.”

배가 많은 이즈니크의 항구로 곧바로 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근 부분까지 성공적으로 떨어지기만 한다면 도시 나사우로써는 루트거의 병사들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남은 육상 병력은 가이다르를 위해 보급대를 운영하기에도 바빴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페테르의 의도를 파악한 루트거는 그가 넘겨준 명령서를 받아든 채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저희는 이번 전쟁을 통해 부동항(不凍港)을 얻을 수도 있겠군요.”

“······아직은 이득을 따질 때가 아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전쟁.

분명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이번 전쟁에서의 모든 전리품은 바예지드의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페테르라는 군주는 최악뿐만 아니라 최상의 수까지도 대비하는 군주였다.

“가봐라.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건조한 말투 속에 담겨 있는 진심을 알아챈 루트거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떠나갔다.

까악- 까아악-

루트거가 떠나간 집무실.

조용히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페테르와 라그무스에게로 창문을 두들겨대는 까마귀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리낌 없이 두들기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드디어 왔군요.”

“음.”

기다렸던 소식을 물고 온 까마귀.

기사단만큼이나 페테르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암행단이 보낸 편지였다.

“······이번에는 마커스로 개명했나 보군.”

전보를 보낼 때마다 달라지는 이름이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안에 쓰여있는 내용이 페테르를 만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일 테니까.

“좋군.”

쉽사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페테르였지만 이번만큼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그무스. 요제프에게 수정구를 비출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페테르를 보며 라그무스는 전보 안에 적혀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그무스의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수정구의 빛.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는 페테르의 시선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시작은 그쪽이 했으니 끝은 우리가 내주어야 도리겠지.”

북부의 기둥이자 명문. 바예지드.

그 가문의 수장인 페테르 바예지드의 시선이 데어마르를 넘어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서부의 찬탈자를 향하고 있었다.

북부의 냉혹함은 자신들을 침략해 온 자들을 절대로 곱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

어느새 고요해진 전장.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을 따라 가차 없이 내리쳐지는 칼질만이 가득한 이곳.

그곳에서 블라드는 반쯤 무너진 마차 위에 앉아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거 맛있습니까?”

“고소하지. 나름.”

반쯤 그을린 밀 껍질을 벗겨내는 손놀림이 분주하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어이 부관. 식량들은 다 태웠어?”

“다 태웠지.”

“화살도?”

“당연히 그것도 태웠지. 이 일 한두 번 해보나.”

아게는 블라드의 물음에 자신 있다는 듯 떵떵대며 보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약탈과 방화는 야만인들의 특기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금화도 다 털었어?”

“······.”

“가져와. 남김없이.”

아게는 어서 내놓으라는 듯 흔들대는 블라드의 손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기사가 아니라 이쪽이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

“빨리 가져와. 나중에 다 분배해 준다니까?”

초원의 마적을 자연스레 삥 뜯는 뒷골목의 양아치.

요제프의 인선은 너무나도 정확한 것이었다.

악(惡)을 악으로 제압하는 현장을 보며 슈테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다 털었으면 이제 가자.”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블라드의 타격대는 지령에 따라 보급대를 급습하는 데 성공했다.

블라드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는 마차들.

활활 불타기 시작하는 밀의 고소한 냄새가 아주 조금은 비릿한 피 냄새를 감춰주는 것만 같았다.

“대장. 저기. 까마귀 온다.”

“흐음.”

눈이 좋은 야만족답게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까마귀를 발견한 아게.

그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삐딱하게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쟤네는 도대체 어떻게 매번 나를 찾아오는 거야?”

정체 모를 기사. 마커스가 보냈을 것이 분명한 까마귀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내려와 블라드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려앉은 검은색의 깃털들이 흉터 가득한 그를 떠올리게 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그런데?”

아게는 블라드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금발이 빛나지 않아? 내가 까마귀라도 쉽게 찾을 것 같은데.”

“······이제 보니 까마귀 전문가셨구만.”

아게의 실없는 말에 이죽거림으로 답하던 블라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까마귀 발목에 달린 전서구를 꺼냈다.

“다음은 또 어디려나.”

임무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일거리가 들어왔으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자신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일 때마다 바예지드가 유리해진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예지드는 대가를 후하게 지불해주는 몇 안 되는 고용주였다.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자그마한 쪽지에 적혀있는 두 개의 지령.

하나는 까마귀를 따라 움직일 것.

그리고 남은 하나의 지령.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

그곳에서부터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를 구출해 올 것.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굵게 쓰여 있는 필체가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까아악-

마지막 지령을 읽어내린 블라드는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밀을 훔쳐먹고 있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빛이 마치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냐는 듯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8화 7

최후의 라브노마 (2)

서부에서도 서쪽.

오직 끝없는 황야만이 펼쳐져 있는 곳에 자리 잡은 도시.

가이다르의 주도, 트리노바에서부터 출발한 병력은 현재 서부의 중심을 통과해 천천히 데어마르를 향해 북상하는 중이었다.

“······하하.”

새까맣게 늘어서 있는 병력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깃발 아래 서 있는 남자.

발달한 상체만큼이나 부리부리한 눈빛이 인상적인 가이다르 백작은 지금 허탈한 웃음과 함께 보고서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전부 한 놈이 저지른 일이란 말이지?”

“그렇습니다. 백작님.”

그가 지금 허탈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유.

그것은 들고 있는 보고서에 적힌 내용이 자신이 보아도 황당했기 때문이었다.

“가도를 따라 4개 가문, 총 7개의 보급대가 당했고······. 물품은 전소, 병력은 괴멸.”

비록 천천히 입으로 읽어내리고 있었으나 머리로는 바로 와 닿지 않았다.

뼈아픈 손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상식적으로 쉽게 납득하기 힘든 내용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짓을 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6일이라.”

빼곡히 적혀있는 명단을 본 가이다르 백작은 허탈한 듯 웃으며 턱을 긁적여댔다.

“이 보고서대로라면 심지어 하루에 두 탕을 뛴 적도 있다는 말이로군.”

허탈함 뒤에 찾아오는 어쩔 수 없는 분노.

보고서를 들여다보는 가이다르 백작의 굵은 눈썹이 어느새 거칠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놈이 그놈인가. 내 아들의 검을 가져갔다는?”

“맞습니다. 백작님.”

백작의 옆에 서 있던 고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지금은 레이디 알리시아의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기사입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바예지드가 키워낸 북부의 기사.

“그리고 호르헤가 뒷골목에서 키웠다는 녀석이기도 합니다.”

“호르헤······.”

그리고 호르헤의 단검이었던 소년.

지그문드 백작은 오래된 이름을 곱씹으며 한 사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거대한 체구, 무뚝뚝한 성정.

그리고 언제나 자신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전대 가주의 충실한 개.

“······처음 만났을 때 죽였어야지.”

“죄송합니다.”

고딘의 보고를 들은 지그문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차고 말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불쾌한 그 녀석의 흔적이 지금 서부를 휘젓고 있다니.

역시 호르헤라는 놈은 죽어서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다.

“바예지드가 이를 갈았군. 아마 이때를 대비해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 놓았던 모양이야.”

지그문드 가이다르는 생각했다.

지금 후방을 휘젓고 있는 놈들은 바예지드가 특별히 훈련해놓은 인재들이 틀림없다고.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서부 연안의 가도를 휩쓸고 다닐 수는 없을 테니까.

그만큼 지금 블라드의 움직임은 지그문드에게 잘못된 판단을 강요할 정도로 너무나 신속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바예지드 백작은 시간을 벌고 싶은 모양이로군.”

그러나 지그문드는 이 일련의 흐름 속에서 페테르 바예지드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었다.

비록 약탈당한 보급품들은 아프디아픈 손실이었지만 그저 잿더미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전군의 진군 속도를 높여라.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데어마르로 당도해야겠다.”

덩치는 곰과 같지만, 눈치는 여우와도 같은 자.

그가 바로 서부의 찬탈자 지그문드 가이다르 백작이었다.

‘당신의 의도대로 겨울까지 끌어줄 수는 없지.’

흐름은 가이다르의 편이었지만 시간은 바예지드 편.

페테르 바예지드는 철저하게 전쟁의 기본을 상기시키며 지그문드를 압박하고 있었다.

공격하는 원정군과 농성하는 수비군.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한 것은 서부 일것이 분명했으니, 페테르는 지금 다가올 겨울을 기다리며 시간을 벌려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전군 속보(速步)! 발걸음을 맞춰라!”

지그문드는 직접 큰소리로 독려하며 병사들의 진군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상대방의 의도를 눈치챈 이상 더는 휘둘릴 이유가 없다.

전장의 주도권을 잡는 치열한 눈치 싸움에서 가이다르 백작은 가장 큰 목표를 잊지 않기로 했다.

결국은 이번 전쟁의 첫걸음이 닿을 곳은 데어마르인 것이다.

“백작님!”

“또 뭐냐.”

그러나 지금 황급히 달려오고 있는 정찰병의 보고는 그의 이성을 흐트러트리기에 충분했다.

“지금······앞에 강가에 있는 다리가.”

굳이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보고.

정찰병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앞으로 나선 지그문드는 선두에서 우두커니 멈춰서 있는 병사들을 보며 그만 악다구니를 쳐대고 말았다.

“부서졌군요.”

“이 빌어먹을 북부 놈들이!”

고딘의 말처럼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끊어져 있는 강가의 다리.

누가 보아도 인위적으로 헤집어 놓은 다리는 지그문드를 향한 경고이자 도발이었다.

“······블라드라는 놈이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이나 걸리겠나?”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입니다.”

고딘의 보고를 들은 지그문드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몰려오고 있는 비구름들.

거세질 물결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였다.

“······아무래도 서부에 파고든 벌레들이 한두 마리가 아닌 모양이군.”

페테르는 그저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볍게, 넓게. 그리고 과감하게 서부를 흔든 페테르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고 있었다.

쏴아아아아-

가이다르의 깃발 위로 거센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리는 비와 함께 서서히 멈춰서기 시작하는 서부의 행렬들.

북부에서 시작된 비구름이 천천히 서부의 군사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 전쟁의 첫 번째 주도권을 쥔 사람은 지그문드가 아닌 모양이었다.

※※※※

“비가 오네요.”

“나쁘지 않군.”

언덕 위에 숨어 있는 사내들.

통일성 없이 온갖 복색이 섞여 있는 모습으로 보아, 마치 산적 같아 보였지만 정련된 기세가 그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들은 노예 상인들인가요?”

“그래. 원래 서부는 노예거래가 활발하니까 말이지.”

저 아래서 내리는 비와 함께 서둘러 천막을 치기 시작하는 노예 상인들.

내리는 빗방울이 차가운 만큼 그들의 행동은 빠릿했지만 정작 그들이 끌고 온 마차 위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멈춰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두꺼운 창살 안에 갇혀 하릴없이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잡혀 온 노예들이었다.

“저 사람들한테는 뭐라도 안 씌워주려나요?”

“비온다고 소나 말한테 천막 쳐주는 거 봤나?”

소나 말보다 못한 자들.

이제는 인간의 지위를 박탈당한 사람들이 서로를 의지한 채 비를 맞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는 쳐주는데요.”

“말 관리 한번 확실하군.”

흉터 가득한 사내 마커스는 블라드의 말에 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노예 상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마 저 안에 마지막 라브노마의 핏줄이 있을 거다.”

“상인들 중의 하나인가요?”

잿더미 속 꺼지지 않은 불씨와도 같은 존재.

아직 라브노마의 영향력은 서부 깊숙한 곳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고, 가이다르는 그들의 핏줄을 찾아 척살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아마 여기까지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찬탈자들의 눈을 숨길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속임수가 필요했을 것이다.

“누군지는 몰라도 기가 막히게 변장을 했네요. 저기 있는 사람 중에 귀족가의 자제 같아 보이는 사람은 없는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조용히 손짓으로 대원들에게 위치를 지정하던 마커스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마지막 라브노마는 지금 노예처럼 행세하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창이라도 굴러야 한다.

누구인지 모를 마지막 라브로마는 지금 창살 안에서 치욕을 씹어먹으며 생존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레 쪽은 우리가 담당한다. 라브노마의 핏줄은 우리가 구출할 테니 너희는 앞에서 상인 놈들의 시선만 끌어주면 된다.”

“다 죽여도 되나요?”

한 줄기의 푸른 눈동자가 빗속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범죄 가득한 뒷골목에서 자라온 블라드였지만 노예 상인들만큼은 도저히 상종하고 싶지 않은 놈들이었다.

“그래도 되고.”

“알겠어요.”

마커스의 허락에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블라드의 손끝에 매달려 있는 한 방울의 검은 눈물.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 안나의 눈물을 닦아주었던 손이 조용히 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시작하지.”

“네.”

블라드와 마커스의 고갯짓에 따라 흩어지기 시작하는 사내들.

암행단과 헤어져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는 블라드의 뒤로 야만족과 용병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시선을 끌라고 했지 정면돌파 하라고는 안 했는데.”

조용히 언덕 위에서 자리 잡고 있던 마커스는 전혀 몸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블라드와 일행들을 보며 실소를 짓고 말았다.

바예지드 최고의 몰이꾼이라더니.

과연 용조차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

쏴아아아아-

내리는 비가 마치 장대처럼 쏟아진다.

북부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세찬 빗줄기.

가만히 그 비를 바라보고 있던 블라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에 있는 야영지를 향해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이건 또 뭐야?”

촤악!

떨어져 나온 목과 함께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핏물.

비와 함께 섞여 올라오는 비릿한 냄새가 블라드를 불쾌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거 너무 빨리 죽였네.”

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와 함께 찾아오는 축축한 공기는 언제나 가슴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불쾌한 냄새와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고는 했었으니까.

“하겠습니다.”

“그래.”

슈테판이 근처에 있는 작은 종을 집어 들고는 힘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빗소리조차 잡아먹지 못한 작은 종의 울림.

낯선 침입자를 알리는 경고음이 야영지 곳곳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다들 무기 챙겨!”

종소리와 함께 허겁지겁 천막 안에서부터 빠져나오기 시작하는 사내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천막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마구 흔들리기 시작하는 자그마한 천막들.

끔찍했던 비명이 그치고 조용해진 천막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문신 가득한 야만족이었을 뿐이었다.

크아아악!

이것들 도대체 뭐야!

산적처럼 보였으나 너무나 깔끔한 마무리.

야영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함께 언덕 위에서부터 검은 까마귀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다 죽여버려. 가능하면 도망치는 놈들까지도 잡아서.”

넌지시 건넨 명령과 함께 두건을 깊게 눌러쓴 블라드가 조용히 세찬 빗속에 섞여 들어갔다.

알아채지 못한 자는 조용히 스쳐 지나가고.

알아본 녀석들은 빠르게 베면서.

그렇게 천천히 걸어 마침내 다다른 가장 커다란 천막 앞.

천막의 입구 양옆으로 조용하지만 긴장된 숨소리들이 들려온다.

“어설프네.”

크악!

컥!

긴장된 기다림이 무색하게 아예 천막 채로 길게 베어버린 블라드의 일검.

세차게 튀어 오른 핏자국들이 밖에서도 느껴질 만큼 천막을 거칠게 두들겨 대었다.

“주인장 있나?”

이제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천막 안.

안으로 들어서자 요란하게 들려오던 빗소리가 조금은 잦아든다.

태연하게 망토에 묻은 빗방울을 털어낸 블라드는 허리 채 두 동강이 나버린 시체들을 지나 천막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뭣 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핏물들이 새겨놓은 블라드의 발자국이 천천히 땅바닥에 늘어서기 시작했다.

“혹시 최근에 산 노예 중에서 좀 수상한 자가 없었는가 싶어서 말이지······.”

천막 안쪽에 마련되어 있는 또 하나의 공간.

하늘하늘한 천을 들추고는 안으로 들어선 블라드는 그곳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런.”

두 눈을 부릅뜬 채 침대 위에 죽어있는 중년의 사내.

축축한 공기와 함께 퍼져 오는 비릿한 피 냄새가 강렬하게 코끝을 찔러왔다.

그렇게 처참히 널브러져 있는 시체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쌍의 눈이 있었다.

“나, 나가.”

희미하게 타오르는 등불의 빛이 희미하다.

좁고도 어두운 공간, 그곳에서 눈이 마주친 어느 여인과 아이.

“여, 여기서 나가라니까. 너도 죽여버리기 전에.”

겁에 질린 눈으로 아이를 감싸고 있는 여자의 헐벗음이 가련하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서 피 묻은 단검을 든 채 덜덜 떨고 있는 어린 소년도.

그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기시감에 사로잡힌 블라드는 그만 멍하니 멈춰서고 말았다.

“······.”

사내들의 시달림에 지쳐버린 여인의 품 안에서 어린 소년이 피 묻은 단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지키고 있었지만 너무나 미약한 그들의 몸부림은 깊숙한 곳에 묻어놓았던 블라드의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네가 죽였냐?”

“오지 말라니까!”

흐릿한 등불 아래 가득한 피 냄새.

아주 오래전, 비릿한 내음이 가득한 좁은 방안에서 아이를 껴안은 채 벌벌 떨고 있던 어머니가 있었다.

마치 지금의 여인과도 같은 모습으로.

“그래?”

밖에서부터 희미하게 퍼져 오는 빗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좁은 방 안, 바닥을 따라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색 핏줄기.

아마 그날도 오늘처럼 이렇게 비가 내렸었던 것 같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39화 12

최후의 라브노마 (3)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저열한 욕망을 풀러 오는 곳.

그런 곳이기에 가끔은 예상치 못한 사고도 생기는 법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내들은 고작 빛바랜 은화 몇 개로 여자의 모든 것을 살 수 있다고 착각하고는 했었으니까.

“으아악! 이 미친 애새끼가!”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희미한 등불 아래, 창관이 떠나갈 듯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내.

그 사내 앞에 주저앉아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여인의 목에는 새파랗게 부풀어 오른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꺾여서는 안 될 곳까지 꺾여 들어갔을 상처였다.

“이 미친놈이 감히 나를 찔러?”

차마 손이 닿지 않는 사내의 날갯죽지에는 자그마한 쇠붙이 하나가 달랑거리며 박혀있었다.

그것을 뽑기 위해 양팔을 허우적거리던 사내는 결국 앞에 있는 여인과 아이를 향해 분노를 푸는 것을 선택했다.

“······!”

마치 내가 맞은 듯 깊숙이 울려 퍼지는 진동.

그럼에도 버틸만한 이유는 이를 악문 채 자신의 아들을 온몸으로 가리고 있는 어머니 때문일 것이다.

가장 낮고 비천한 곳에서도 빛나는 모성은 어린 소년을 감싸 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밖에서부터 들리는 빗소리가 가득했다.

블라드는 그 빗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어머니의 비명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블라드는 언제나 무언가를 지키고자 소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키고자 들었던 검은 너무나 작고 짧았을 뿐이었다.

※※※※

누아르를 타고 앞장서고 있던 블라드.

그러나 자꾸만 뒤통수를 긁적거리는 모양새가 무언가 불편한 듯해 보였다.

“······저 꼬맹이가 아직도 나 노려봐?”

“네.”

넌지시 묻는 물음에 조용히 들려오는 대답.

슈테판의 대답을 들은 블라드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어젯밤, 노예 상인들에게서부터 구출해낸 마지막 라브노마.

카를이라는 이름의 어린 꼬맹이는 지금도 여인의 품에 안긴 채 블라드의 뒷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서 아는 척이라도 좀 해보지 그래.”

“······쟤 지금 칼 들고 있어요.”

“쟤가 아니라 카를 라브노마. 호칭은 정확할수록 좋은 거야.”

앞으로도 쓸데가 많은 백작 가문의 자제였으니 조심히 대하라는 말이었다.

괜스레 마커스에게 타박을 받은 블라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자그마한 소년.

여자에게 꼭 안겨 있는 모양새가 유약해 보일만도 했지만, 지금까지도 꼭 쥐고 있는 단검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네가 건네준 망토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

“비나 피하라고 빌려준 것뿐인데요. 어쨌든 다시 받아올 겁니다.”

힘겹게 말을 타고 있는 여인과 소년은 지금 검은 망토로 자신들을 가리고 있었다.

금화를 아끼지 않은 북부의 망토.

옥사나가 블라드를 위해 준 망토는 그녀의 의도대로 따뜻한 것이었고 지금 그 따스함은 가장 비천한 곳에서 헤매고 있던 두 사람을 감싸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귀하게 대해주라고. 사이가 나빠서 좋을 것은 없으니.”

애를 다루는 것은 애송이의 몫.

흉악한 얼굴이 가득한 이곳에서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외모는 블라드뿐이었으니 마커스의 인선은 정확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임무 아닌 임무와 함께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급하게 쳐낸 듯 엉망으로 잘려져 있는 녹색빛의 머리.

험한 일을 겪어서인지 홀쭉 들어간 볼은 분명 소년을 초라해 보이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본연이 가지고 있는 외모는 전혀 바래지지 않았다.

‘나중에 크면 여자 꽤나 울리겠군.’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꼬맹이였지만 전직 장미의 미소 초팔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소년의 외모가 여자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수준이 될 것임을.

그러나 블라드는 모르고 있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꼬맹이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저기.”

“꺼져.”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비수같이 날아오는 거절.

나름 용기를 내어 건넨 첫마디였으나 소년의 냉랭한 반응은 분위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 뿐이었다.

“딱히 말도 안 꺼냈는데?”

“꺼져. 마르타 옆에서 떨어져.”

짧은 손으로 휘적거리는 단검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다만 그 끝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만큼은 매서운 것이었다.

“그래.”

자신을 보며 미안해하는 여인의 눈빛을 마주하며 블라드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비록 은인에게 할 법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지키고 싶은 것은 있다는 것을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잘하고 있네.”

“······.”

상처 입은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는 아이를 보며 블라드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넌 나보다는 낫다.

결국, 지키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노예상의 목덜미에는 가느다란 상처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작고 얕았지만, 분명 치명적인 상처.

소년은 확실히 노렸고 여인에게 달려들던 악의를 막아내었다.

어렸을 적의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마무리였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라고.”

비슷한 광경이었으나 전혀 다른 결과.

노예상의 천막 안에서 상처 입은 여인을 가로막고 있던 소년을 보며 블라드는 왜인지 모를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받아.”

“······응?”

잔뜩 가시를 세우고 있던 카를이었지만 맥락 없이 날아오는 종이 뭉치에 당황하고 말았다.

둘둘 쌓여 있었음에도 알아챌 수 있는 고소한 냄새.

종이 뭉치 위에는 칸노르 가문을 뜻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뭔데?”

“먹어. 그거 비싼 거야.”

칸노르 가문의 소시지.

그것은 블라드가 카를에게 보내는 칭찬이자 고마움의 표시였다.

※※※※

타닥거리는 모닥불의 열기와 마찬가지로 저 멀리에 있는 소년의 눈은 여전히 블라드를 쫓고 있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시선을 뒤로하며 블라드는 가만히 육포를 뜯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카를 라브노마가 자네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인데.”

“······망토에다가 아끼던 소시지까지 내어줬으니까요.”

“하긴, 칸노르 가문의 소시지라면 더 달라 말하고도 싶겠지.”

마커스는 블라드의 대답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순히 무언가를 줬기에 이 만큼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나쁘지 않은 관계 형성이었다.

낮은 곳에서만 살아와 모나게만 행동할 줄 알았더니 그래도 나름 베풀 줄 아는 녀석이었다.

“······그런데 진짜 저 꼬맹이로 가능할까요?”

단검으로 육포를 깎아내던 블라드는 모닥불의 불길 너머로 카를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

어쩌면 서부의 또 다른 세력 축이 되어줄지도 모르는 소년.

그러나 그 소년이 짊어진 무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것이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가이다르의 뒤에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중립을 지키고 있는 가문들이 있었다.

몇몇 가문은 그저 기회를 엿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분명 아직 라브노마를 따르는 가문들 또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 전쟁에서 가이다르의 기세를 한풀 꺾어만 놓는다면 서부 연합군은 분명 흔들리게 될 거야.”

전쟁은 한 번의 맞부딪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페테르는 데어마르에서의 전투 너머를 보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를 서부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했다.

“전선이 앞뒤로 생기게 되면 아무리 가이다르라 해도 골치가 아파지겠지.”

앞을 노리며 나아가고 있었으나 뒤에서부터 불길이 일어난다면 가이다르라 할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그동안 라브노마의 핏줄들을 제거해 온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제는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임무는 성공적이었고 예상치 못한 전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블라드가 건넨 육포를 질겅거리며 씹던 마커스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오랫동안 바예지드의 그림자 뒤에서 활동해왔던 기사 마커스.

그는 언제나 복잡다단한 상황에 투입되고는 했었고 대부분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온 사람이었다.

“이게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말이지.”

그런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하나의 미신과도 징크스.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지 않다.

“이런.”

예감이란 말로 설명할 수 힘든 감각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결과물 같은 것이었다.

오랜 경험을 쌓아왔던 마커스의 걱정은 절대 기우가 아니었고 그의 불길한 예감처럼 어두운 밤하늘을 뚫고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퍼덕이는 날갯짓 사이로 풍겨오는 피 냄새가 아무래도 좋은 소식을 가져온 녀석은 아닌 것만 같았다.

“어쩐지 일이 너무 잘 풀린다 했지.”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 쓴 채 날아온 까마귀 한 마리.

그 까마귀가 가져온 전서구에는 다급하게 흘려 쓴 누군가의 경고가 담겨 있었다.

“······야영은 그만두지.”

“심각한 일입니까?”

아직 명령조차 내리지 않았지만 마커스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재빨리 모닥불부터 끄기 시작하는 암행단.

그들의 신속한 모습에 이제야 막 안정을 찾기 시작한 카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쩐지 너무 잘 풀려간다 했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마커스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바예지드 최고의 용몰이꾼.

그리고 가이다르와 착실히 원한 관계를 세워 온 북부의 기사.

마커스의 예상보다도 블라드를 주시하고 있던 지그문드의 시선은 깊은 것이었다.

“아무래도 가이다르는 내 예상보다 자네에 대한 원한이 깊은 모양이야.”

“······.”

블라드에게 피 묻은 전서구를 건네주는 마커스.

받아든 쪽지에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처음 들어본 명칭이 적혀있었다.

※※※※

“길목들은 다 봉쇄했다고 하나?”

“그렇습니다. 백작님. 마법 전보를 통해 영주들에게 확실히 확답받았습니다.”

페테르의 방해에 어쩔 수 없이 주저앉고 만 주둔지의 천막 안에서 지그문드 백작은 조용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그물은 쳐놓은 셈이 되었군.”

서부를 휘젓고 있던 북부의 타격대.

블라드의 방해에 바짝 약이 올라있는 것은 가이다르뿐만이 아니었다.

서부 연안의 가도를 중심으로 벌였던 블라드의 파괴 공작은 주변에 있던 영주들의 화를 돋우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어쨌거나 난 놈은 난 놈이로군. 이렇게나 빠르게 원한을 쌓아 놓았으니.”

하나둘 지도위에 있던 길목을 가로막기 시작하는 기물들.

지그문드의 손끝에서 옮겨진 기물들은 마치 체스판의 말처럼 북부로 올라가는 모든 길을 틀어막는 중이었다.

“너무 잘난 것도 문제로군. 쇼아라의 블라드.”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움직여주는 서부의 영주들.

블라드의 예상을 뛰어넘는 전과는 지금 원한이라는 형태로 돌아와 서서히 그의 목을 조르려 하고 있었다.

“얼마면 도착한다고?”

“사흘입니다.”

“좋아.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리하여 남은 마지막 길목.

그 말을 들어 길목을 천천히 가로막는 지그문드의 얼굴에서부터 짙은 미소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애송이 녀석에게 나의 기병대를 보내라. 빌어먹을 바예지드에게 가이다르의 의지를 보여줘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지그문드의 손끝에서부터 내려앉은 마지막 기물.

그 기물의 위에는 서부에서 가장 빠른 기병대를 뜻하는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그동안 날뛴 대가를 치르셔야겠어. 바예지드.”

서부는 빼앗는 자들이지 빼앗기는 자들이 아니다.

지그문드는 그것을 페테르에게 보여주고 증명해야만 했다.

주둔지를 떠나가는 말발굽 소리가 가득하다.

거친 들판을 서슴없이 내달리는 무법자의 무리.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서부의 모두가 두려워하는 기병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1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0화 13

맞부딪히는 화살들 (1)

도시 나사우.

서부에 몇 되지 않는 항구도시.

그곳의 지배자인 이즈니크 남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책상 위에 놓인 보고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도 털어먹었군.”

슬쩍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잇소리가 나는 보고서였다.

빌어먹을 북부 놈들.

누가 야만인들의 피가 섞여 있지 않달까 봐 하는 짓거리가 포악하기 그지없다.

“역시 상종하면 안 될 종자들이야.”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보고 있던 종이를 치워버렸다.

역시 무슨 일이든지 북부와 엮이면 재수가 없다.

제국에 깊이 뿌리 내린 편견과도 같은 격언이었지만 지금만큼 확연히 와 닿은 적이 없었다.

바로 지금만큼.

“남작님! 큰일 났습니다!”

순간, 부서질 듯 흔들리며 열리는 집무실의 문.

요란함 뒤에 찾아오는 잠깐의 정적 속에서 숨을 헐떡인 채 문턱에 기대어 서 있는 기사단장이 보였다.

“무슨 일이냐!”

“······남작, 남작님.”

남작의 호통에도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숨을 고르고 있는 기사단장.

가뜩이나 블라드라는 놈 때문에 심사가 잔뜩 뒤틀려 있던 이즈니크 남작이었지만 이윽고 들려온 말에 분노보다는 당황을 내비칠 수밖에 없었다.

“습격······입니다!”

“뭐?”

신음처럼 내뱉은 마지막 말과 함께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만 기사단장.

그가 기대고 있던 문턱에서 붉은 핏자국들이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멋들어지게 길러놓은 남작의 콧수염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잔뼈가 굵은 남작이라고 해도 지금의 사태를 바로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으니까.

적들은 북쪽에 박혀있었고 그나마 서부를 휘젓고 다니던 놈들이라고는 고작 20명가량밖에 되지 않는 별동대였을 뿐이었다.

“당신이 이즈니크 남작인가.”

그러나 불행과 사고는 언제나 인지 밖에서 찾아오고는 하는 법이었다.

집무실을 가로막은 채 기울어져 있는 단장의 시체.

아무렇지도 않게 그 시체를 넘어 들어온 사내가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여태껏 눈치채지 못했던 비명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구, 누구시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얼굴 위로 희미하게 떠올린 미소는 근사했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냉랭함은 북부의 설한보다 차가운 것이었다.

“바예지드의 루트거요.”

“······!”

루트거 바예지드.

북부뿐만 아니라 대륙에도 이름이 알려진 바예지드의 기사.

“어떻게, 어떻게.”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좀 했지.”

앉으라는 말도 없었지만, 근처에 있는 의자를 당겨와 책상 앞으로 가져온 루트거.

마치 제집처럼 당당히 행동하는 침입자였지만 이즈니크 남작은 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역시 짠 바람은 나랑 잘 안 맞는달까.”

‘······바다!’

이즈니크 남작은 루트거의 말을 통해 어디서부터 길이 뚫렸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가장 단단하기에 가장 안심하고 있던 곳.

북부의 침략자들은 과감하게 이즈니크의 심장을 꿰뚫고 들어왔다.

“나는 이번 전쟁의 사령관이시자 나의 아버지이신 페테르 바예지드님의 말씀을 전하러 왔소. 남작.”

미소를 지운 사내의 얼굴에서 그동안 켜켜이 쌓아온 사나운 냄새가 풍겨온다.

서부의 귀족이자 노련한 상인인 이즈니크 남작은 이런 냄새를 풍기는 부류를 잘 알고 있었다.

“이즈니크 남작가는 이번 전쟁에서 빠져주셔야겠소.”

사납게 치켜뜬 검은 눈동자.

그 너머로 보이는 항구에는 검은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나사우에 정박해있던 범선들의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도시 나사우는 함락당했다.

어울리지 않게 물결을 따라온 북부의 침략자들에 의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북부의 화살 하나가 가이다르의 어깨에 깊숙이 틀어박히고 있었다.

※※※※

“앞길도 막혔습니다!”

“······꽤 빠르군.”

점점 막혀오는 길목들.

그동안은 모래알과도 같았던 서부의 영주들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일사불란하게 일행의 퇴로를 막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직접 지시라도 내리는 듯이.

“예상보다 영주들의 움직임이 기민해. 잘못하다가는 꼼짝없이 갇히고 말겠어.”

절망스러운 상황을 말하는 마커스였지만 정작 여유로운 태도는 잃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러려고 애쓰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정면에서 뚫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나쁘지는 않지만 그다지 훌륭하지도 않은 방법이군.”

블라드의 제안에 마커스는 눈짓으로 뒤에서 말을 타고 달리고 있는 여인을 가리켰다.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는지 새하얗게 질려가는 여인의 입술.

그녀의 품 안에서 흔들리고 있는 소년의 눈빛이 블라드의 시선으로 가득 파고들어 왔다.

“뚫을 수야 있겠지만 말이야.”

길목을 단단하게 틀어막은 서부의 병사들이었지만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안한다면 뚫을 수야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와중에 소년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러면 어떡합니까?”

“아직 파악해놓은 탈출로가 몇 남아 있네.”

마커스의 말과 함께 앞쪽에서부터 계속해서 날아오는 까마귀들.

그러나 아까와는 달리 줄어들고 있는 까마귀들의 숫자가 불길해 보였다.

“······그렇지만 그쪽으로 가지는 말지.”

“네?”

물고 물리는 의도의 접전이었지만 마커스는 너무 늦지 않게 가이다르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말머리를 돌려라! 우리는 나사우로 향한다!”

길목 한두 개만 뚫으면 곧장 북부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마커스는 굳이 방향을 돌려 나사우로 향하기로 했다.

앞에 보이는 이 길은 탈출로가 아닌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나사우라면······.”

“아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한테 배 하나 빌려 타자고.”

“······.”

바예지드의 내밀한 속사정을 알고 있는 마커스는 지금쯤이면 루트거가 나사우를 점령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옆에 있는 블라드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황무지로 간다! 직선으로 길을 꿰뚫겠다!”

마커스의 명령에 따라 지체 없이 말머리를 돌리는 암행 단원들.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에 아게와 슈테판이 주저했지만, 이윽고 이를 악물고 따라 움직이는 블라드를 보며 그들도 말을 돌렸다.

“뒤에서부터 따라붙는 자들이 있습니다!”

“역시.”

희미한 미소를 짓는 마커스를 보며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해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무리들.

그러나 갑작스레 따라붙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블라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전장은 나로는 감당 못 해.’

기사는 평시에는 검객이지만 전시에는 지휘관이다.

블라드 또한 타격대의 지휘를 맡고 있었지만 이런 복잡한 양상의 접전은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만약 마커스의 판단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은 이들의 의도대로 꼼짝없이 앞뒤가 막혀버렸을 것이다.

“앞만 보지 말고 저 너머까지 한번 봐보라고.”

“······.”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블라드는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는 마커스를 보며 아직도 자신이 반쪽짜리 기사일 뿐임을 통감하고 말았다.

“화살이다!”

이제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뒤에서부터 날아오기 시작하는 화살들.

그중 악의 어린 화살 하나가 가장 가녀린 목표를 꿰뚫고 말았다.

“꺄악!”

눈 깜짝할 새 여인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보며 블라드가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빌어먹을!”

어깨에서부터 번져오는 핏자국이 선명해진다.

그와 함께 점점 창백해져 가는 여인의 안색.

“마르타! 안 돼!”

품 안에서 여인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울부짖음이 블라드의 기억 하나를 잡고 마구 뒤흔들기 시작했다.

“······다들 방패 메!”

블라드의 외침에 가시나무 용병 단원들이 등 뒤로 방패를 매달았다.

그들의 상징인 가시나무로 만든 나무 방패였다.

“가시나무 후미로!”

블라드의 지시에 뒤를 맡고 있던 아게와 슈테판이 서로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가장 후미에 서게 된 가시나무 용병단.

그들이 임시로나마 방벽을 세우자 날아드는 화살이 조금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얼마 못 버틸 겁니다!”

슈테판의 외침에 블라드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자그마한 방패로 막아봤자 임시방편일 뿐.

저 뒤에서부터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는 추격대를 보며 블라드는 당황하고 말았다.

“황무지다.”

“네?”

그런 블라드를 어르듯 전하는 마커스의 목소리.

마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앞에 샛노란 황무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숲길이었던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서부의 시작이었다.

“저들은 가이다르 기병대다. 황야의 무법자들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지.”

넓은 벌판으로 나오자 이제야 온전히 확인되는 추격자들.

하나같이 매서운 눈빛을 지닌 자들 위로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황야의 독수리를 새겨놓은 깃발.

서부의 지배자 가이다르의 문양이었다.

“어때. 해볼 만하겠어?”

지휘관으로서 한번 판단해봐라.

네가 저들을 저지할 수 있겠는지.

“······.”

마커스의 물음에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아보았다.

사납게 휘날리는 흙먼지들 속, 시선을 통해 쏘아 보내본 오러가 흔들리는 적들의 물결을 감지했다.

‘기사는 5명.’

블라드의 오러에 반응하는 5명의 기사.

말 위에서라면 지닌바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는 가이다르의 기사들이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나는 할 수 있을 것인가.

“······할 수 있습니다.”

“근거 있는 자신감인가?”

블라드는 감고 있는 왼쪽 눈으로 마커스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흐르고 있는 블라드의 세계는 분명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귀스트의 흔적이 블라드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키는 사람이 없다면요.”

“좋아.”

혼자라면 뚫을 수 있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을 테니까.

하나뿐인 길이 그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럼 나사우에서 보자고.”

마커스의 눈짓에 따라 비틀거리는 여인을 들어 올리는 암행 단원들.

그 사이에서 마주친 소년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바람을 타고 와 블라드의 볼에 와 닿았다.

‘······.’

소년에게서 소년에게로 이어지는 눈물 한 방울.

바로 앞에 있는 저 아이처럼 누구에게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시절이 있다.

“아게!”

“왜!”

그러나 블라드는 마주한 눈물 앞에서도 감고 있는 눈을 뜨지 않기로 했다.

이제 자신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놈들이 세상에서 제일 빠른 기병대라던데!”

“······누가 그래!”

어설픈 도발인 것을 알았지만 아게는 있는 힘껏 넘어가 주기로 했다.

노련한 야만 전사는 블라드의 의도를 확실히 파악했으므로.

서부의 무법자들 앞에서 꿇리지 않는 무도한 자들.

“누가 감히 부다아트 족을 눈앞에 두고 그런 말을 하나!”

블라드의 의도에 따라 아게는 큰소리로 전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시작했다.

그의 외침을 따라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치켜들었다.

“슈테판! 마커스 님을 따라가라!”

“하지만!”

“확실하게 임무를 완수해!”

인재는 적재적소에.

지금은 방패로 지킬 때가 아니다.

“알겠습니다!”

끄덕이는 고개와 함께 벌려놓은 아게의 진형으로 빨려 올라가듯 마커스와 합류하는 가시나무 용병대.

점점 멀어지는 일행을 보며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준비됐어?”

“물론.”

등 뒤에서부터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는 가이다르 기병대가 보였다.

위협적이지만 분명 증명할 수 있는 기회.

다가오는 위협을 향해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이 동시에 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는 말.

그 위에서 오직 허벅지만으로 균형을 지탱한 채 뒤를 돌아보고 있는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

매서운 그들의 눈빛만큼이나 시위 끝에 매달려있는 화살촉이 매섭다.

블라드는 이 무도한 자들의 방식에서 길을 찾았다.

“쏴!”

야만족들의 손에서부터 날카로운 화살이 뻗어나간다.

훈련해도 따라 할 수 없으며 오직 타고난 피로만 이어질 수 있는 특별한 자세.

그동안 북부의 전사들을 괴롭혀 대었던 야만인들 특유의 배사(背射)법이 서부의 황무지에서 시현되고 있었다.

※※※※

“적! 돌아섭니다!”

“뭐야?”

가이다르 제3 기병대장 와그너는 갑작스레 반전하는 북부인들을 보며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몸만, 몸만 돌렸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서부에서는 보지 못했던 희괴한 자세.

가능이나 할까 싶은 그 자세 속에서부터 날카로운 화살들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크악!”

“큭!”

난생처음 당해보는 전술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기병들.

달아나는 와중에도 정확한 명중률을 자랑하는 화살들을 보며 와그너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게 무슨······.”

그러나 그는 당황했음에도 흔들리지는 않았다.

부하들이 죽어 나가는 와중에도 틈을 파고드는 서부의 눈빛이 매서웠다.

“속도를 높여라!”

고삐를 잡지 않고 있으니 속도가 줄어들 것은 당연한 사실.

황야의 무법자들이 잔뜩 약이 오른 채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저딴 잔재주를 부릴 바에야 차라리 가까이 다가가 후려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응?”

그러나 북부의 손끝에서 시작된 화살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뭐야!”

눈 깜짝할 새 갈라진 야만인들의 진형.

그 안에서부터 달려 나오는 새까만 말 한 마리가 있었다.

이마 한가운데 매달린 뿔이 하얗게 빛나는 말이었다.

“······이거 짜릿하네.”

따라잡는 속도와 달려드는 속도.

서로가 마주 보는 역주행의 아찔한 순간에도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가자!”

가이다르의 깃발을 향해 매섭게 달려들기 시작하는 북부의 작은 깃발 하나.

스스로를 증명한 기사의 왼쪽 눈에는 소년의 눈물에서부터 시작된 세계가 흐르고 있었다.

맞닿은 세계 끝에서 한계를 확장하는 기사와 말의 돌격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꽈아아앙-!

소리조차 머물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충격.

그와 함께 사정없이 튀어 오르기 시작하는 누군가의 몸체들.

때 이르게 떠오른 낮의 달 위로 새빨간 핏물들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3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1화 39

맞부딪히는 화살들 (2)

황야의 무법자들이라 불릴 정도로 서부에서는 널리 이름이 알려진 가이다르 기병대.

기사들조차도 상대하기 까다로워하는 그들은 특유의 기민함을 통해 상대를 압박하는데 정통한 자들이었다.

나는 닿지만 너는 닿지 못하는 그런 거리, 그런 속도로.

그러한 장점을 통해 상대를 괴롭히는데 도가 튼 가이다르 기병대였으나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전원 산개해! 흩어지란 말이다!”

대장의 명령에 당황한 표정을 여실히 드러내는 기병대원들.

그들은 아직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이 되어버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악(惡)에는 더 큰 악으로.

지금 무법자들의 뒤에는 그들보다 더 빠르고 악독하며, 굶주려 있는 짐승 하나가 사나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콰아아앙-!

거대한 충격음 뒤로 달려드는 시뻘건 핏물들.

하얀색 빛줄기가 지나간 자리 뒤에는 어느새 자욱한 피 안개가 흩뿌려지고 있었다.

‘······!’

기병대장 와그너는 빛무리가 스치고 지나간 대원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비록 목이 날아간 채였지만.

부들부들 경련하고 있는 목 없는 시체 아래서 서부의 말이 공포에 질려 마구 울부짖고 있었다.

‘이건 도대체!’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대원들의 비명과도 같은 욕지거리가 퍼져나갔다.

그러나 방금 기병대를 뚫고 지나갔던 북부의 빛줄기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려 하지 않았다.

“적! 다시 반전합니다!”

역주행을 통해 정중앙으로.

그리고 이번에 뒤에서부터 달려들어 우측으로.

종횡무진 자신들을 휘젓는 블라드를 보며 가이다르 기병대는 실로 오랜만에 공포라는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기사! 기사들은 모여라!”

와그너는 재빨리 휘하의 기사들을 모아 공격에 대비하고자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유일한 수였지만 그 과정이 결코 녹록지만은 않았다.

“다가오는 녀석을 막아······!”

어느새 옆으로 따라붙은 야만족의 무리.

얼굴 가득 새겨놓은 문신 위로 비릿한 미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으아악!”

“화살, 화살이 날아옵니다!”

무법자들을 상대하는 무도한 자들.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은 적은 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을 틀어막은 채 공간을 내주지 않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자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교묘하게 벌려놓은 간격 사이에서부터 나는 쏘지만 너는 막을 수 없는 화살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런 빌어먹을!”

와그너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말았다.

사냥감에게 쫓기는 사냥꾼이라니.

좁은 산길이 아닌 너른 황야의 벌판은 오히려 자신들이 아닌 북부의 야만인들에게 더 알맞은 전장이었다.

“어서 틀어막아!”

그러나 판단은 냉정해야만 했고 자신은 이 난관을 뚫어내야만 하는 지휘관이었다.

와그너의 다급한 손짓을 따라 서둘러 대형에서 떨어져 나가는 4명의 기사들.

어떻게든 블라드가 가속할 거리를 좁히며 기세를 죽여보려 했던 그들이었지만 북부의 검은 말은 이미 기사들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는 존재였다.

“이런 미친! 가속합니다!”

보고인지 비명인지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외침.

와그너는 그 외침에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기사들의 힘겨운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 가볍게 따돌려내는 검은 말.

그 말의 이마에서 아까와도 같은 하얀색 빛줄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전원 산개해!”

와그너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소름이 돋고 말았다.

또다시 온다.

저 미친놈이.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속도.

“다들 흩어지란 말이다!”

어머니 세계수의 희뿌연 흔적만이 남아있는 황량한 벌판 위로 초원의 아들이 내달리고 있었다.

오귀스트의 흔적이 알려주는 틈새를 따라, 라문드가 건네주었던 강체술을 입고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질주로.

히이이이힝-!

서로가 맞닿은 경계를 통해 세계를 공유한 누아르는 거칠 것이 없다는 듯 길게 울부짖기 시작했다.

점점 넓어지는 세계와 함께 빛과 함께 점점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있는 일각수의 흔적.

그래.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너를 따라온 것이었다.

“지금!”

블라드의 외침과 함께 무법자들을 향해 거대한 화살 하나가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속도를 제압하는 속도.

갈라지는 파도처럼 스쳐 지나가는 선 위로 새빨간 물감들이 칠해지기 시작했다.

“하하!”

수많은 경악과 공포를 뚫고 마침내 기병대를 넘어 너른 황야 위로 빠져나온 블라드.

이제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기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황혼의 흔적이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을 뿐.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에 블라드는 큰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딘과 가이다르 백작에게 전해라!”

핏물이 가득한 끈적한 손으로 무언가를 불끈 쥐고 있는 북부의 기사.

그의 손에는 어느새 꺾여진 깃발 하나가 힘없이 너풀거리고 있었다.

“너희들의 깃발은 내가 가져간다고!”

가이다르의 자존심. 황야의 무법자들.

그들의 상징인 독수리 한 마리가 목이 꺾인 채 블라드의 손아귀 안에서 힘없이 휘적이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정당한 대가다!”

누군가가 알려준 대로 기사는 오직 정당한 대가를 가져가야 하는 법.

목숨 대신 가져간 명예 한 조각.

깃발에서 뚝뚝 떨어지는 무거운 황혼빛이 블라드의 어깨를 따라 붉게 반짝이고 있었다.

※※※※

어두운 밤, 밝혀진 횃불이 가득한 도시의 항구.

새까맣게 불태워진 배 사이로 멀쩡해 보이는 범선 두 척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바예지드의 기술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갤리온급 함선.

단연코 이번 약탈품 중에서 가장 가치 있다 말할 수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니까 그놈만 떨어져 나갔다고?”

“그렇습니다. 루트거 님.”

그러나 빛나는 전리품 앞에서도 루트거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을 뿐이었다.

계획했던 대로 도시 나사우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마커스의 일행.

사지를 향해 기어들어가는 대신 변수를 따라나선 마커스의 판단은 훌륭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골치 아프군.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나. 오웬?”

“지금은 마커스입니다.”

“이름 좀 통일하지 그래. 매번 헷갈리잖나.”

숨을 헐떡이며 들것에 실려 함선 위로 실려 가는 여인 한 명.

눈물 자국 가득한 얼굴로 그 여인을 따라가던 초록 머리의 소년이 루트거를 보고는 우뚝 멈춰 섰다.

“저 아이가 바로 마지막 라브노마입니다.”

“흠.”

카를은 마커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이 무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

당당히 펴져 있는 어깨와 가까이 있음에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마치 당당한 한 명의 군주였던 자신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하는 사람이었다.

“블라드 경을 기다릴 건가요?”

“······.”

루트거의 어깨 너머로 저 멀리서부터 불타고 있는 성벽이 보인다.

함락된 나사우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진 서부 연합군의 발버둥이 지금 성벽을 거세게 들이받고 있었다.

지금까지야 간신히 틀어막고 있었으나 철저히 불태워진 나사우의 여력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기다릴 거죠? 이거 전해줘야 해요.”

카를이 곱게 접어놓은 검은색의 망토.

루트거는 카를이 건네는 망토를 보며 혀를 쯧 하고 차고 말았다.

자신의 새어머니인 옥사나가 내어준 망토.

그 망토를 입고 스투르마의 저택을 누비던 어린 기사를 루트거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준비된 인원부터 승선. 그들부터 먼저 쇼아라로 보내라.”

“안 기다려요? 안 기다릴 거예요?”

자신의 부탁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임무를 수행하는 지휘관.

루트거의 차가운 태도에 카를은 눈물조차 말라버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안 데려올 것이냐고! 당신들 기사잖아!”

순간, 카를의 기억 속으로 함께했었지만 하나둘씩 사라져갔던 라브노마의 기사들이 떠올랐다.

어린 카를은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러져 갔던 그들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고 더는 그런 이별을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다려야 한다고! 좀 있으면 온다니까!”

“마커스. 모셔라.”

또 다른 이별의 순간 앞에서 발버둥 치기 시작하는 어린 라브노마.

루트거는 그런 카를을 가만히 내려다보고는 조용히 블라드의 망토를 건네주었다.

“당신이 직접 건네주시오. 카를 라브노마.”

“······.”

조금도 흔들리지 않은 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검은 눈동자.

그에게서 보이는 진심을 엿본 카를은 얌전히 암행 단원의 품에 안겨 배 위로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소리지를 뿐인 자신과는 달리 눈앞의 기사는 어느새 검을 움켜쥐고 있었으니까.

“어쩌실 겁니까.”

“일단 다 보내놓고, 녀석을 탈출시킬 배 하나만 남겨놓을 생각이다.”

“남아줄 선장들이 있겠습니까?”

마커스의 물음은 타당한 것이었다.

해군 병력이라고는 전무한 바예지드.

지금 이끌고 내려온 배들은 그저 상륙을 위해 차출해 온 상인들의 배였을 뿐이니 목숨이 위험한 지금의 상황에서 흔쾌히 남아줄 만한 선장은 없을 터였다.

“그래도 한 놈 정도는 남아줄걸?”

그러나 루트거는 자신 있다는 듯 진한 미소를 지을 뿐.

루트거는 꼭 두둑한 보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블라드를 기다려 줄 선장 하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멍청한 애송이가 지각을 하고 말았단다! 나와 함께 그 녀석을 기다릴 자원자들 있나!”

자신의 동생이 주워왔고 바예지드가 데려와 먹이고 입히고 씻긴 녀석이었다.

비록 녀석의 피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살과 검만큼은 바예지드가 집어 넣어준 것이었다.

그런 아이를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법.

“꽁지 빠지게 달리는 건 잘하는 녀석이었죠!”

“아마 금방 올 겁니다!”

저 멀리 허물어져 가는 나사우의 성벽과 달리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누군가의 손들.

그들 모두가 바예지드 최고의 용몰이꾼을 기억하는 자들이었다.

※※※※

“여기입니다!”

마커스가 남겨놓은 암행 단원을 따라 해안가를 달리고 있는 블라드와 부다아트 족.

희미한 달빛을 따라 모래사장을 달리던 블라드는 저 멀리서부터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너무 늦었나!’

기병대 모두를 죽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그저 깃발만을 빼앗아 온 이유.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당한 거냐!”

“······모르겠습니다!”

마커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해 최대한 빨리 당도하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음에도 이미 서부 연합군의 불길은 성벽을 넘어 항구를 향해 진격하는 중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적들이 가득한 도시로 진입하느니 차라리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고작 열 명 남짓한 인원만으로는 군대를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

진입과 퇴각.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블라드에게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내세울 수 있었던 예민한 청각.

날카롭게 세운 귀 끝에서는 분명 검과 검이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달려! 달려라!”

연안을 따라 항구로 향하는 바위를 뛰어넘은 블라드와 일행들.

말을 탄 채 어느새 항구로 돌입한 그들의 앞에는 잔뜩 몰려들고 있는 병사들과 그들의 앞을 틀어막고 있는 몇몇 사내들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애송이! 빨리 오지 못해!”

“저 자식 빠진 놈이라는 거 알고 있었다니까!”

열 명이 채 되지 않음에도 빛나는 오러와 함께 수백의 병사들을 물리고 있는 기사들.

그들 사이에서 잔뜩 피를 뒤집어쓴 루트거가 웃고 있었다.

“배로 올라타라!”

블라드는 루트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타버린 배들이 가득한 항구 위로 홀로 돛을 올리고 있는 자그마한 배 한 척.

저 멀리서 들려오는 악의 어린 함성 속에서도 홀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던 그 배 위에서는 지금도 누군가가 세차게 양팔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블라드! 여기야!”

무언가가 불편한 듯 삐딱하게 서 있음에도 흔드는 양팔만큼은 분주한 남자.

그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블라드의 얼굴로 웃음이 번져나갔다.

어디선가 본 듯이 익숙해 보이는 배의 몸체.

그 위에서 자신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뭐해 인마! 빨리 올라타라니까!”

모든 배가 위험을 피해 떠나갔음에도 홀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한 척의 배.

멋들어진 선장모를 쓰고 있는 사내는 분명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16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2화 16

바다에도 있었다 (1)

촛불이 내는 희미한 빛만이 가득한 천막 안.

그곳에서 지그문드는 고딘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깃발까지 빼앗겼다고?”

“그렇습니다.”

“······그것도 고작 열 명 남짓한 애송이와 야만인들한테?”

웃고 있었으나 깊이 묻어나오는 서늘함.

이미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아득한 곳까지 뻗쳐 있는 지그문드로서는 그저 차갑게 짓는 웃음만이 유일한 표현 방법이었을 것이다.

죄인 된 심정으로 서 있던 제3 기병대장 와그너는 감히 그의 웃음을 마주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도시 나사우는 실컷 물고 뜯다가 멀쩡한 범선들만 골라서 날라버렸고······.”

내뱉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쓴맛이 올라온다.

불타버린 항구 도시. 나사우.

전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파산해버린 이즈니크 남작의 소식은 이미 서부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상태였다.

아마 조금씩 늦어지고 있는 각 가문의 합류 소식은 이 일과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 백작께서 그동안 어떻게 참고 계셨는지 모르겠군.”

지그문드는 들고 있던 술잔을 돌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이는 바예지드의 손길들.

여태까지 페테르가 내놓은 계책들은 분명 즉흥적인 발상만으로는 해냈다기에는 너무나 뼈아픈 것들이었다.

“하긴 그동안 너무 쉽기는 했지.”

돌아가는 양상을 보며 이제는 지그문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을 기다려온 것은 자신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흔들리는 난세 속에서 바예지드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자들이었다.

“······역시나 어렵지만 옳은 길이었군.”

지그문드는 들고 있던 술잔을 들이켜며 한숨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페테르 바예지드.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다.

일개 가문도 아니고 서부의 군세들을 모아 올라가고 있건만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의 주도권을 쥐려 하고 있었으니.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나 힘겨운 상대임에도 지그문드가 기꺼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바예지드가 가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잡아낸 사냥감이 빛날수록 사냥꾼의 가치는 높아지는 법.

바예지드라는 거물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서부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가문도 더는 자신들을 찬탈자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고딘. 전보를 보낼 준비를 해라.”

“어디로 준비를 시킬까요?”

흔들리는 촛불 끝.

들어오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대는 촛불을 보며 지그문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라굴리아. 용혈공에게로.”

마지막 라브노마를 데려간 이유를 안다.

불안정한 서부의 후방에 불씨를 놓고 싶었겠지.

그러나 바예지드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후방에 먼저 불씨를 지펴놓은 쪽은 북부가 아닌 드라굴리아였다는 것을.

바예지드의 뒤쪽, 우트만 남작령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중앙의 군세들이 조금씩 깃발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

“진짜 넓긴 넓구나.”

블라드는 갑판 위 난간에 기대어 하늘 아래 가득한 푸른 물결을 보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였다.

언젠가는 나가겠다 다짐했던 쇼아라의 회색 성벽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크기.

블라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며 또다시 세계의 넓음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거 안 보고 죽었으면 진짜 억울할 뻔했네.’

세차게 불어오는 짠 바람과 함께 가슴 속까지 다다르는 것만 푸른 파도들.

난생처음 보는 짙은 푸른색의 물결이 하얀 포말을 만들며 조금씩 블라드의 세계로 밀려들고 있었다.

“우웨에에엑.”

한참 바다의 푸르름에 감탄하고 있던 블라드.

그러나 같은 바다를 바라볼지라도 각자가 느끼는 감상은 다른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홀쭉해진 볼과 어제와 비교해 확연히 창백해진 피부.

점점 퀭해지는 루트거의 눈가를 보며 블라드는 요제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눈그늘만 달아놓자마자 기가 막히게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너는 왜 멀쩡한 거냐.”

“바다 체질인가 보죠.”

“평생을 도시에서 산 녀석이 무슨.”

루트거는 블라드의 대답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다시금 난간 위로 널브러질 뿐이었다.

“어차피 살 거면 좀 더 큰 배를 사지 그랬냐······.”

원망할 이유는 없었지만 원망하고만 싶었다.

작기에 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디작은 코그선.

거기에 말과 사람들까지 한계치로 때려 실었으니 멀미에 약한 루트거가 받는 부담은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돈이 더 있었으면 큰 배를 샀겠죠.”

“······그러니까 요제프 말고 내 밑으로 오라고 했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루트거의 말.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 남자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블라드는 자신이 무사히 하벤의 배에 올라탈 수 있었던 이유가 전부 루트거 덕임을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수백 명을 가로막은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쉼 없이 황무지를 떠돌며 도망 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할만하니까 했을 뿐이야.”

그 말과 함께 늘어진 루트거는 마지막 기력을 다했다는 듯 갑판 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예지드가 자랑하는 기사조차도 안에서 올라오는 뱃멀미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만하다라······.’

블라드는 루트거의 대답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수백 명을 앞에 두고도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걸까.

“아직은 모르겠네.”

뒤돌아 난간에 기댄 블라드는 고개를 올려 배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는 붉은 색의 깃발.

따끔한 햇빛 때문인지 한쪽 눈을 찡그린 블라드는 깃발을 보며 조용히 읊조리고 말았다.

“나중에 쇼아라로 돌아가면 배 이름부터 바꾸라고 해야겠어.”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자그마한 배.

붉은 머리 제미나 호는 지금 데어마르 근처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

밤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명의 사내.

도시의 밤하늘보다 더 많은 별이 모여 있는 바다의 밤하늘은 굳이 등불을 들고 오지 않아도 환해 보였다.

“누아르가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아. 아무래도 바다와는 안 맞나봐.”

“······그렇겠지.”

블라드는 오타르가 하는 보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배가 좁아 짐칸에 실을 수밖에 없었던 누아르.

지랄 같은 성정이고 뭐고 간에 누아르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도 참 신기하다. 이렇게 멀미를 안 하는 사람도 있구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하벤을 보며 조용히 성질을 참을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항구에서 기다려 준 하벤이었으니 이번 일 만큼은 조용히 넘어가야만 했으니까.

“······그래도 배에다가 제미나의 이름을 달은 건 좀 그렇지 않아?”

“내가 하고 싶어서 했나. 제미나가 해야 한다니까 한 거지.”

대답과 함께 능청스럽게 조타륜을 돌려대는 하벤.

머리 위에 써놓은 선장모만큼이나 배를 모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 보였다.

“이 배에 자기 지분이 있다잖아. 이게 다 자기가 준 검에서부터 시작된 거라 그러면서.”

“하!”

블라드는 하벤의 말을 듣고는 그만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아니, 그런 논리라면 앞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다 한 발씩 거치겠다는 말인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렸어.”

“뭐 그건 둘이서 알아서 해결하시고.”

둘이서 해결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했다.

아무래도 제미나가 자기 이름으로 지으라 했을 때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나는 장미의 미소 마르셀라 호로 짓고 싶었다니까.”

“······왜 도대체 선원 놈들은 배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짓지 못해 안달이야?”

미신에 민감한 선원들의 세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미신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레이디들이 바람을 가르며 바다 위를 누비고 있을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것은 나는 잘 모르지.”

“······.”

언제나 조금은 주눅 들어 있었던 하벤.

그러나 지금 옆에 놓인 럼주병을 자연스레 들이켜는 그의 모습에는 그저 웃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제는 지팡이가 아닌 조타륜을 의지하는 그의 모습에는 조금의 구김조차 없어 보였다.

이름이야 괘씸하지만 역시 배를 사주길 잘했다.

“그나저나 장사는 잘돼?”

“우리야 사정이 괜찮지. 고정 고객이 있으니까.”

블라드는 쇼아라에서 떠나기 전 칸노르 가문과 하벤을 연결해 놓았었다.

아마도 동물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칸노르와의 무역에서부터 얻은 경험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겨울은 어쩔 수 없어. 강이 얼어붙으니까.”

차가운 북쪽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

바다와 통하는 넓은 강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쇼아라가 딱히 해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나사우 때 쇼아라의 상인들이 죄다 몰려나간 거야. 거기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니까.”

“그런 거였나.”

전쟁은 곧 기회.

쇼아라의 상인들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이번 일에 자원했다고 들었다.

만약 바예지드가 이번 전쟁을 통해 나사우를 확실하게 지배하게 된다면 이번 약탈 때 따라나선 상인들은 새로운 북부의 항구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받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사우만 가지게 된다면 북부 상행길이 상당히 다채로워질 거야. 우리에게도 기회란 이야기지.”

강 끄트머리 자그마한 방 안에서 썩어가고 있던 하벤은 이제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기회에 굶주려 있던 뒷골목의 소년은 오직 블라드 혼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기사님.”

“앞으로도 부탁하고 싶으면 상납이나 잘하시지.”

왠지 모를 머쓱한 기분에 하벤의 술병을 빼앗아 든 블라드.

“응?”

조타륜 근처에서 잔잔한 바다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멀리하던 블라드는 이윽고 배 주위에서 빛나는 발광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벤. 저게 뭐야?”

“뭐, 어디?”

블라드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마치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배 주위로 달라붙기 시작하는 빛무리들이 보였다.

조용히 하벤의 곁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오타르는 재빨리 갑판을 지나 밑을 확인해 보았다.

“오타르 그거 뭐야!”

“······음.”

오타르는 하벤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재빨리 작살 하나를 쥐어 들고는 배 밑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검은 피부의 남자.

“흡!”

그의 손에서부터 힘차게 떠난 작살 끝에는 힘없이 발버둥 치는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오징어.”

“뭐?”

“이거 오징어야.”

검은 손 위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하얀색의 바다 생물.

오타르의 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은 보기에도 실해 보이는 사람 팔뚝만 해 보이는 오징어였다.

“······오징어?”

처음 보는 바다 생물에 호기심이 동한 블라드는 부리나케 오타르에게 달려갔지만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벤의 눈썹은 좁혀져 있을 뿐이었다.

“요거 술안주로 괜찮나! 바다 고기는 진짜 처음인데!”

신난다는 듯 오타르에게 오징어를 받아들고는 흔들어대는 블라드.

그러나 하벤은 그런 블라드를 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지금은 여름인데.”

비록 바다 경력은 적었지만, 그에 대한 상식만은 확실히 배워놓았던 하벤은 지금 이 시기에 오징어가 남쪽에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가운 물을 따라 움직이는 한류성 어족인 오징어.

그러나 지금 창백한 빛으로 발광하며 붉은 머리 제미나 호를 감싸고 있는 것들은 분명 오징어들이었다.

그것도 감히 눈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로.

오징어를 들고 기뻐하는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주인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반짝이는 꽃가루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12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3화 12

바다에도 있었다 (2)

다급하게 잘라놓은 듯 엉망이 되어 있는 초록색 머리.

너무 크다 못해 땅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는 검은 망토까지.

지금도 흘러내리고 있는 망토를 어떻게든 움켜잡고 있는 가녀린 팔목이 요제프의 눈가에 가장 먼저 와닿았다.

고귀한 핏줄이라기 하기에는 너무나 비루한 모습을 한 아이였다.

“호이안.”

“지금은 마커스입니다.”

“······그래, 마커스.”

이름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바예지드의 숨겨진 검.

오직 가주만이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암행단의 대장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어느 정도 따져 물어도 될 것이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가 정말 카를 라브노마인가?”

“······.”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데어마르에 마련된 요제프의 집무실.

북부와는 다르게 온화한 곳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명백한 실수였으나 요제프는 굳이 마커스를 책망하지 않았다.

라브노마의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내보낸 아이인 만큼 이 일에 관련된 모두가 분명 필사적이었을 테지.

마커스 혼자의 힘만으로는 그 발버둥을 모조리 꿰뚫어 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라브노마인 것은 맞겠군.’

자신을 마지막 라브노마라 주장하는 아이.

이 아이를 서부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바예지드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카를 라브노마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래 이름을 말해보십시오. 라브노마의 자제.”

요제프의 물음에 아이는 애써 의연하게 보이려는 듯 턱 끝을 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이 눈동자 안에 가득했다.

지금 이곳에는 자신을 위해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나, 나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거짓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지켜주지 않는 어린아이.

그런 아이에게는 자그마한 경고조차도 천둥처럼 다가올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걸치고 있는 검은색의 망토뿐이었다.

“······샤를.”

무언가를 체념한 듯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감춰야만 했다.

그것이 아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배워야만 했던 생존 방법이었다.

“샤를로트 라브노마.”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역시나 아이를 반가워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녀가 태어났던 순간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지금까지도.

샤를이라는 소녀는 여태껏 그런 세상 속에서 살아왔었다.

“······이런.”

들려오는 대답에 낭패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예지드의 사내들.

살아오며 수 없이 들어왔던 가느다란 한숨들을 들으며 샤를은 다시금 떨리는 손으로 망토를 움켜잡을 뿐이었다.

“솔직하게 말해주어 고맙군.”

비록 반항기 넘치는 눈빛으로 위장하고 있었지만, 사정없이 흔들리는 샤를의 눈동자가 애처로웠다.

겨울날에 만났었던 그 소년과도 같이.

자신을 카를이 아닌 샤를로트라고 밝힌 아이를 보며 요제프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어 가기 시작했다.

※※※※

하늘은 푸르고 파도는 잔잔했다.

폭풍우가 사납게 몰아치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나는 제미나가 싫다.”

갑판 위에 젖은 미역처럼 널브러져 있던 검은 머리의 사내.

새하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읊조리는듯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미나는 너무 작고, 느리고, 그리고 흔들리거든.”

“루트거 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루트거와 마찬가지로 쫄딱 젖은 머리를 쓸어넘긴 블라드는 재빨리 축 늘어져 있던 그를 일으켜 부축했다.

블라드의 안색 또한 하얗게 질려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헛소리를 지껄여대는 루트거 보다야 훨씬 나아 보였다.

“나는 바다가 싫어. 폭풍도 싫고.”

“그래도 어떻게 잘 빠져나왔잖아요.”

“다시는 배 같은 건 타지 않을 테다. 평생 땅에만 발붙이고 살 거야.”

익숙하지 않은 바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폭풍우.

붉은 머리 제미나 호는 지난밤, 살벌하기 그지없는 폭풍을 뚫고 오늘에서야 겨우 북부에 속하는 해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벤의 말에 의하자면 조금만 대처가 늦었어도 전부 고기밥이 되었을지도 모를 그런 상황이었다고 했다.

‘······다들 맛탱이가 가버렸네.’

계속해서 주절대는 루트거를 해먹 쪽으로 옮기던 블라드는 조용히 갑판 위를 바라보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 엉켜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는 북부의 사내들.

거대한 자연의 힘이 만들어 낸 강제적인 북부의 대통합을 보며 블라드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도대체 왜 여기는 선장실 같은 것도 없는 거야?”

“애초에 작아서 그래. 전부 다 짐칸으로 개조해 버렸거든.”

골골거리는 루트거를 해먹에다 던져 놓은 블라드는 불만 어린 목소리로 하벤에게 항의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당당한 변명일 뿐이었다.

“이런 거 보면 이 배에 제미나라는 이름이 기가 막히게 어울리지 않아? 둘 다 쪼그맣잖아.”

“······그래 네 맘대로 해라.”

블라드는 신나게 조타륜을 돌리는 하벤을 뒤로 하고는 지금도 바삐 움직이는 뒷골목의 선원들을 대신해 기사들과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을 안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진짜 죽을 뻔했네.”

지금에서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이고 있었지만, 어젯밤 맞닥뜨린 폭풍우의 여운은 아직도 블라드의 뇌리 속에 강렬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마 오징어 떼들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진작에 침몰해버리고 남을만한 폭풍우였다.

‘거참 신기한 놈들이네.’

블라드는 조금은 널널해진 갑판 위에서 난간을 붙잡고는 밑에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폭풍우가 지나가자마자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는 발광체들.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깊은 바다 밑으로 돌아가는 오징어들을 보며 블라드는 재빨리 왼쪽 눈을 감아보았다.

‘암만 봐도 정령은 아닌데.’

다가오는 폭풍우를 경고해 주었으며 그 속에서 나아갈 길을 알려주었던 빛나는 오징어들.

그러나 목소리의 잔재를 흡수한 블라드의 세계에서도 녀석들은 그저 평범하게 못생긴 오징어였을 뿐이었다.

“······도대체 뭔지 모르겠네.”

하벤은 어젯밤 몰려들었던 오징어 떼들은 분명 폭풍을 피해 올라온 것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지금 멀어져 가는 오징어들이 그런 자연적인 이유로 들러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나한테 뭘 만들어준 거야?”

블라드는 조용히 허리에 매달려 있는 푸른색의 검을 바라보았다.

어린 세계수가 정령들과 함께 만들어주었던 별의 검.

어젯밤 검에서부터 조금씩 흩날리던 가루들은 오직 블라드만이 알아챌 수 있는 것이었다.

마치 하얀 뱀이 있던 하이날의 언덕에서와 같은 광경이었다.

‘하얀 뱀이 이거 보고 되게 좋아하긴 했었는데.’

그저 목소리의 잔재를 흡수했을 뿐인 블라드는 아직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씨앗을 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정령조차 되지 못한 어린 가능성들은 기사의 손에 이끌려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그 옛날 소드마스터가 하고자 했던 것처럼.

“보인다! 저기 육지가 보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선원의 외침과 함께 블라드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깨어났다.

조금씩 저 앞에서부터 가물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하는 육지의 흔적.

육지가 보인다는 파수꾼의 외침에 축 늘어져 있던 기사들이 조금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벌써 코끝에 와닿는 냄새가 달라지는 것만 같았다.

“좋아.”

하벤은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서 보이는 부둣가를 확인하고는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손님들께 알려라! 목적지에 다다랐다고!”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으며 맡은 바 화물을 폭풍우를 뚫고 무사히 목적지까지 옮겨낸 선장.

캡틴 하벤의 활약은 루트거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들어갈 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다.

“깃발 올려! 우리라고 식별할 수 있게!”

선장의 명령에 따라 작지만 강한 제미나의 위로 다시금 붉은색의 깃발이 올라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머리 색을 닮은 붉은색의 깃발.

스스로를 증명하는 깃발은 오직 땅 위에서만이 아닌 이곳 바다에서도 펄럭이고 있었다.

※※※※

푸히히히잉-

마치 멀미를 하듯 거칠게 투레질을 하는 누아르.

그래도 다행인 것은 거친 항해였음에도 딱히 다친 말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대로 쇼아라로 돌아갈 거야.”

자그마한 해안가 마을의 부둣가.

가장 작은 범선인 제미나조차 들어서기 버거운 부둣가에서 하벤은 블라드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나사우에서 기다려줘서 고마웠어.”

“그렇게 고마우시면 배라도 한 척 더 사주던가.”

날렵해 보이는 블라드의 갑옷을 두들기며 미소 짓던 하벤.

그러나 갑옷을 가까이서 바라본 하벤은 갑옷 곳곳에 새겨져 있는 흉터들을 보며 미소를 굳히고 말았다.

“당연히 한 척이야 더 사주지. 그래도 나름 상단인데 배 하나 가지고 태가 나겠어?”

싱글싱글 웃는 얼굴 위로 나풀거리는 금발이 반짝였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화려하지만 가까이서 보았을 때는 상처투성이.

주인의 모습과 똑 닮은 모습을 한 블라드의 갑옷을 보며 하벤은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라고. 나도 이제 돈 벌잖아.”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려고.”

비록 새침한 대답이었지만 하벤은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들고는 두 팔을 벌려 블라드를 안아주었다.

잠시 기우뚱한 균형이었으나 서로가 기대었을 때만큼은 온전한 자세가 될 수 있었다.

“제미나가 항상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잊지 말고.”

“······알았어.”

조심해라, 건강해라. 다음에 또 보자.

굳이 말로는 전하지 않았으나 한 번의 포옹 안에 담겨 있는 진심만큼은 서로의 온기를 통해 온전히 전해질 수 있었다.

“나는 아직 남아있는 화물이 있어서 말이야.”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킨 하벤.

그곳에는 침울한 얼굴로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는 루트거가 있었다.

승선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바예지드의 장남.

그는 이대로 땅에 머물지 못한 채 제미나 호를 따라 쇼아라로 돌아가야만 했다.

다가올 전쟁에서 본대를 이끌고 내려오는 페테르와 합류해야만 했으니까.

“가 봐.”

“그래.”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하벤과 블라드는 익숙한 듯 서로가 맡은 임무를 향해 등을 돌릴 뿐이었다.

뒷골목의 사내들에게 있어서 요란한 작별 인사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저 무던한 인사만이 내일의 만남을 이어줄 것이라 믿었으니까.

항구를 통해 마을을 빠져나가는 블라드와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

배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하벤은 시야를 넘어 망원경의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조용히 블라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폭풍우를 뚫자마자 전쟁이구나. 너는.”

홀로 일어선 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지금의 블라드처럼.

“오타르. 닻 올려.”

“응.”

또다시 전장의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친구를 보며 하벤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하벤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다.

“출발한다! 다들 준비해!”

비록 지금은 미약하지만 언젠가는 같이 나눠들 날이 오겠지.

상처 가득했던 블라드의 갑옷을 떠올리며 하벤은 조용히 선장모를 손에 들었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작은 배.

다행히도 오늘은 어제와는 달리 바다가 잔잔해 보였다.

※※※※

이름도 모르는 자그마한 해안가 마을을 벗어나 데어마르로 향하는 일행들.

바다에서 헤맸던 원한이 있었는지 북부의 말들은 거세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에서부터 하이날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하자 일행의 시야로 심상치 않은 군세의 무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이다르인가?”

“······본대는 아닌 것 같아.”

자그마한 개울을 사이에 두고 조금씩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 가이다르의 군사들.

아게의 말처럼 지그문드가 끌고 온 본대는 아니었지만 이미 상황을 점검하러 온 선발대로 보이는 무리였다.

“아주 대놓고 머리를 들이미는데.”

누구나 알 것이며 그렇기에 숨길 이유가 없다.

가이다르의 선봉대는 염탐의 임무가 무색하게도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냄에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자신감이었으며 또한 업신여김일 것이다.

“아게. 깃발 줘.”

“알았어.”

“아니, 내 것 말고.”

무시당하면 갚아줘야만 한다.

그것이 블라드가 세운 인생의 규칙이자 생존방식이었으니까.

“미리 인사나 한번 하고 오지.”

블라드의 사나운 미소를 보며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도 따라 미소를 지었다.

역시 초원의 아들이 내린 선택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가자!”

데어마르의 성이 아닌 벌판의 내리막길을 따라 달려나가는 전사들.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돌격에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 저것들 뭐야!”

“저희를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고작 열기 정도밖에 안 되는 기병으로 수백 명의 선발대를 향해 돌진하는 전사들.

상식을 뛰어넘는 블라드의 돌발행동에 아까의 여유만만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가이다르의 진형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방패는 접어둬라! 인사나 하러 왔으니까!”

그러나 블라드와 전사들은 그런 그들은 비웃으며 그저 진형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대담하게도 마치 닿을 듯 스쳐 지나가며 가이다르의 진형을 훑기 시작하는 블라드와 전사들.

그럼에도 가이다르의 군사들이 쉽사리 대응하지 못한 것은 단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 깃발 진짜야?”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누가 보아도 화려해 보이는 금발의 기사.

그러나 그 기사가 들고 있는 깃발은 그에 반해 형편없이 꺾여지고 더럽혀져 있을 뿐이었다.

“백작과 고딘에게 전해라! 선물해준 깃발은 고마웠다고!”

처음 보는 북부의 기사가 들고 있는 익숙한 깃발.

그것은 날개가 꺾여진 채 축 늘어져 있는 가이다르 기병대의 깃발이었다.

19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4화 19

뻐꾸기 우는 날에 (1)

온화한 햇빛이 비치는 요제프의 집무실.

알리시아가 요제프를 위해 특별히 내어준 집무실은 쇼아라의 시장실만큼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훌륭한 공간이었다.

“고작 열 명밖에 안 되는 인원으로 저 앞까지 나가 도발을 저지르고 왔다라······.”

그러나 이 훌륭한 공간에서 들려오는 것은 화기애애한 담소가 아닌 그저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뿐.

그의 옆에서 무표정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는 자야르는 아마 덤일 것이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거의 들이받기 직전까지 갔다고 하던데?”

“······.”

들려오는 질문에 블라드는 그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사실은 들이받기 직전이 아니라 들이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검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몇 명 정도는 냅다 걷어차고 돌아왔으니 사실상 교전이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도발이었다.

“죄송합니다.”

요제프는 거짓말을 싫어한다.

기도하는 리만이었을 시절 얻었던 소중한 교훈을 되새긴 블라드는 마치 이것이 반성하는 자세의 표본이라는 듯 재빨리 자세를 잡을 뿐이었다.

정중하게 뒷짐을 진 채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세는 누가 보아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해 보였다.

“······됐다.”

변명할 생각도 없이 그저 잘못했다 말하는 블라드를 보며 요제프는 이제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할만하다고 생각했으니 했겠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루기 어려운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조금은 틀린 판단이었다.

블라드라는 사람은 통제가 아니라 내버려 둬야 빛을 발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부디 너의 도발이 냉철한 판단을 통해 행한 일이었기를 바란다.”

요제프는 피어난 개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모자람도, 잘못됨도 아닌 스스로의 판단으로 행한 일이었으니 이제는 결과로써 판단해 줘야만 했다.

블라드라는 기사는 이번 작전을 통해 온전한 한 명의 기사가 되었음을 충분히 증명했으니까.

“다만 기억해둬라. 기사의 생각은 진중해야 하며 발걸음은 무거워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겠습니다.”

다만 조금은 더 신중해 줬으면 좋겠다.

이름이 알려진 지금부터는 네가 행하는 모든 결과의 흔적들이 발자국처럼 새겨져 너의 뒤를 따르게 될 테니까.

네가 멈출 테까지. 끊임없이.

“푹 쉬어두도록 해라. 체력을 비축해놓는 것이 좋을 거다.”

“알겠습니다.”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체력을 비축하라는 요제프의 말.

블라드는 예상했던 바와는 달리 의외로 큰 꾸지람을 듣지 않아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뭐 해? 나가시라잖아.”

“······네.”

다만 자야르만큼은 아직도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블라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나중을 기대하라는 듯한 스산한 눈빛과 함께.

요제프와는 다르게 자야르는 아직 블라드를 쉬이 놓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끼이익-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정련된 자세로 나서는 블라드를 보며 손님용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보르단은 그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저 녀석은 여전히 종잡을 수가 없군요.”

하는 짓은 영락없는 무뢰한, 그러나 보이는 겉모습만큼은 기품있는 기사.

이렇게나 확연히 다른 모습을 지닌 기사를 보르단은 본 적이 없었다.

“기가 막히게 섞인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튀기는 하지만 바예지드에게 있어서 필요한 색깔이야.”

만들어진 기사가 아닌 스스로가 성장한 기사.

요제프는 그런 기사를 원했고 블라드는 그의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다.

“형님도 탐낼 정도의 색깔이지.”

요제프는 책상 위에 놓인 블라드의 보고서를 집어 들고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흥분되어 있는 병사들의 모습.

아마 오늘 일어났던 블라드의 도발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는 중일 테다.

“바예지드의 기사 중에서 그 미친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기사가 몇 명이나 되겠나.”

실로 오랜만에 활기가 도는 주둔지의 모습을 보며 요제프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집무실 구석에 세워져 있는 초라한 깃발 하나.

가이다르의 독수리는 이슈트반의 검과 함께 훌륭한 전리품이 되어 또 다른 장식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

“블라드 님.”

“오. 슈테판.”

자그마한 저택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사람들.

몇 걸음만 걸어도 아는 얼굴이 보일 수밖에 없었기에 블라드와 슈테판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제가 할 말을 먼저 하시는군요.”

“딱히 할 말도 없잖아.”

용병대장 슈테판은 자연스레 블라드의 옆에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말 보러.”

“아 그 녀석 말이군요.”

“하루에 한 번은 봐주러 가야 해. 성격이 워낙 지랄 같아서.”

슈테판은 블라드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능력은 뛰어났지만 성질만큼은 더러운 말.

옆에서 지켜봤음에도 만만치 않았던 녀석이었기에 슈테판은 누아르를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소한 것은 저희가 돌봐드릴까요? 먹이 정도야 챙겨줄 수 있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지.”

그래 주면야 고맙겠지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고트 정도가 아니고서는 녀석에게 달라붙을 수 있는 마구간지기는 없었으니까.

“안 그래도 보르단 경에게 계약 연장을 신청하고 왔으니까 너무 달라붙지 말라고.”

“······하하하. 꼭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블라드는 슈테판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용병들이란 반짝이는 금화를 쫓는 사람들.

다만 누구나 금화의 소중함을 알았기에 주고받음의 단계에서 항상 잡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쪽 세계였다.

“저희는 그저 블라드 님과 한 번이라도 더 일을 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시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요제프 바예지드는 분명 훌륭한 고용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타노보에 있던 비츠카야 백작처럼 사기를 치지도, 도브레치티의 달마티아 남작처럼 가난하지도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이쪽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마구간의 위치가 바뀌었다고 하더군요.”

익숙한 듯 블라드를 수행하며 길을 찾아내는 슈테판.

마커스를 따라 미리 데어마르에 도착해 있던 슈테판은 그동안 재빨리 저택의 위치를 파악해놓았었다.

이런 사소한 준비 하나하나가 자신의 평가를 높인다는 것을 슈테판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가 맞긴 한데. 그런데 선객이 있는 모양이군요.”

“흠.”

누가 보아도 다른 말과는 다르게 혼자 널찍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검은 말.

그러나 이미 누아르의 옆에는 블라드가 허락하지도 않았음에도 착 달라붙어 있는 자그마한 그림자가 있었다.

낯익은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였다.

“너 여기서 뭐해?”

“······.”

마구간으로 들어서는 블라드를 보며 샤를은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불편해하는 것도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말은 얼마나 해요?”

“왜? 돈 있으면 사게?”

호출한 마구간지기가 들고 온 솔을 받아든 블라드는 옆에 있는 샤를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누아르의 털을 빗겨주었다.

낯선 항해에 예민해 있던 누아르였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블라드의 배려에 마치 개처럼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돈을 아무리 줘도 못 사는 게 있는 법이야. 얘도 그런 종류고.”

“······.”

어찌 보면 무례해 보이는 질문이기는 했으나 아마 진짜 사고 싶어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할 말이 없으니까 내뱉은 말이었겠지.

블라드와 샤를의 숨 막히는 어색함을 보며 슈테판은 재빨리 마구간에서 나가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 여자는 괜찮아? 화살 맞았던 여자 말이야.”

“아.”

이제 사람이라고는 둘밖에 없는 마구간 안.

눈치를 줬음에도 꿋꿋이 떠나지 않는 샤를을 보며 블라드는 아이가 마땅히 갈 곳이 없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모양새는 블라드에게 있어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마르타는 괜찮아요. 많이 나았어요.”

“가서 간호라도 해주지 그래.”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방해하면 안 돼요.”

마르타라는 여자는 샤를을 낳은 어미는 아니었으나 길러준 유모였다.

유일하게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구해줬으니 샤를이 블라드의 근처를 맴도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망토요. 돌려드릴게요.”

“······당분간은 가지고 있어. 어차피 전투 중에는 거치적거릴 뿐이거든.”

아이를 감싸 안은 채 차갑게 식어가던 여자를 생각한 블라드는 그녀가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서 떠오르는 낯익은 모습이 있었으니까.

블라드는 자신의 망토가 조금이나마 더 그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거요.”

“이게 뭔데?”

소년처럼 위장한 소녀는 한참을 고민했다는 듯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목걸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성의의 표시는 언제나 진지하게 하라고 배웠어요. 라브노마는 그래야 하니까.”

“······.”

샤를이 건네는 갈색빛 목걸이.

금이나 은이 아닌 황동으로 만든 것 같은 목걸이는 그 난리 중에서도 소중하게 닦았던 듯 미끈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걸 나한테 왜 주는데?”

“마르타를 구해줬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샤를은 일행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미끼를 자처했던 블라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블라드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차갑게 황무지를 굴러다니고 있으리라는 것도.

구명의 은혜는 무거운 것이었기에 샤를은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약속만큼은 해주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내어줄 게 없거든요. 그래도 제가 나중에······.”

“집어넣어.”

들고 있던 솔을 통에 던져 놓은 블라드는 이번에는 누아르의 발굽을 살피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거 유품이나 가보나 뭐 그런 거지? 난 이제 그런 거 절대 안 받기로 했어.”

“······.”

척 봐도 사연이 있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값이 나가고 안 나가고를 떠나서 블라드는 이제 그런 물건을 넙죽 받지 않기로 다짐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알리시아를 이리저리 피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발굽까지 다 살핀 블라드는 탄탄한 누아르의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내뱉으려 하니 가슴 끝까지 차오르는 기묘한 감정이 있었다.

내가 이 말을 남에게 알려줄 때가 오다니.

역시 세상일이라는 건 알 수가 없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야 하거든.”

언제나 가슴 속에 담아두었기에 무거울 수밖에 없는 말.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받아야 한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뒷골목의 소년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를 통해 블라드는 막연한 꿈의 실체를 확인했고 여전히 그를 쫓아 저 먼 하늘 위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푸른 달을 향해 쏘아 올린 소년의 화살은 지금도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난 이미 이번 임무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았어. 그러니 네가 주는 대가는 받지 않을 거야.”

“······.”

샤를은 이제야 자신을 돌아보는 블라드를 보며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무게감에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자격을 말하는 기사와 아직은 라브노마라 외칠 자격조차 없는 소녀.

샤를은 자연스레 내밀었던 목걸이를 다시 움켜쥐고 말았다.

왠지 모르게 분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나중에 꼭 갚아줄게요.”

거짓된 기사에게서 뒷골목의 소년에게.

그리고 다시 아무것도 내어줄 것 없는 소녀에게.

기묘한 울림을 주는 기사의 맹세는 그렇게 계속해서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

“앞으로 이틀 후면 도착할 겁니다.”

“알았다. 고딘.”

이제는 눈을 찡그리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진 데어마르.

이가 갈릴 정도의 견제와 방해가 있었지만 지그문드는 별 무리 없이 본대를 이끌고 오는 데 성공했다.

빠른 속행이었음에도 이탈자가 별로 없다는 것이 지그문드의 뛰어난 통솔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달이나 늦춰졌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예상 범위 안이야.”

지그문드의 사나운 미소가 북쪽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목표이자 목적이 있는 곳.

점점 윤기가 도는 발밑의 검은 흙들을 보며 지그문드는 자신이 원하던 곳에 도착해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

삭막했던 서부의 바람이 아닌 싱그러운 여름의 향기.

고딘 또한 지그문드처럼 가만히 눈을 감으며 다가오는 데어마르의 바람을 느껴보았다.

‘그렇지.’

저 멀리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새소리들.

그중에서도 확연히 귓가에 와닿는 새소리를 찾아낸 고딘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뻐꾸기는 여름에 울어야지.’

뻐꾸기 소리.

질겼던 인연의 시작을 알린 겨울날의 뻐꾸기 소리가 있었다.

어긋났지만 스쳐 지나갔기에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건만 결국 인연은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에 서로를 마주하게 하고 있었다.

“가서 찾아올 것들이 많아. 아예 끊어버려야 하는 것도 있고.”

“맞습니다. 백작님.”

같은 것을 생각하는 주군과 기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서부 연합군 5천의 군세.

지금 그들이 데어마르의 영역 안으로 첫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1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5화 11

뻐꾸기 우는 날에 (2)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알리시아는 홀로 등불을 든 채 저택 뒤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휴우······.”

가벼운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한숨.

방금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 나온 것인지 그녀의 옷차림은 하늘하늘한 옷 위에 그저 숄 하나를 걸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쉽게 잠이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긴장된 공기가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앗.”

언덕 어귀에 발을 딛자마자 갑작스레 불어오기 시작하는 여름밤의 바람.

알리시아는 그녀의 눈가로 파고들어 오는 바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바람에 알리시아의 물빛 머리카락들이 밤하늘 위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으으. 요즘 자꾸 이러네.”

짓궂다 느껴질 정도의 세찬 바람에 눈을 비벼댄 알리시아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투덜대고 말았다.

요즘 들어 알리시아가 언덕 위로 오를 때마다 자꾸 계절에 맞지 않는 바람이 불어오고는 했었다.

다른 고용인들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말하는 바람이었기에 알리시아는 그저 자신이 운이 없는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응?”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바람을 맞이하자 방금과는 무언가 달라 보이는 언덕 위 풍경.

아무리 밤하늘의 달이 밝다 해도 기이할 정도로 밝아 보이는 주변 풍경 속에서 낯익어 보이는 금발 머리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흥. 아주 괘씸해.”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아 있는 블라드를 확인한 알리시아는 새침하게 입술을 찌푸리고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주 말로만 떠벌이지 나한테 와닿는 게 하나도 없어.”

이제는 아예 자기 자리라도 되는 양 개의치 않고 올라와 대는 블라드.

그런 그를 보며 알리시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덜대고 말았다.

아무리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라 말하면 뭐 하나 불러야 겨우 한 번 찾아올까 말까인데.

자그마한 저택에서 어찌 그리 잘 숨어다니는지 발걸음 닿는 곳마다 흔적조차 보이는 않는 블라드였다.

“······.”

서운한 만큼이나 서둘러 언덕을 올라간 알리시아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무 밑동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라드였을 뿐이었다.

마치 자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검만큼은 껴안고 있는 모습에 알리시아는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팔자도 좋으시네.”

밤이니까 졸리기야 하겠지.

그런데 보통 기사들이 이렇게 정신을 놓을 정도로 깊게 잠이 드나?

자신이 왔다는 기척을 내는데도 미동도 없는 블라드를 본 알리시아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잘도 자네. 긴장도 안 되나?”

며칠 후면 치열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평온히 잠들어 있는 블라드의 모습에는 어떠한 고민이나 걱정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히 자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알리시아에게 있어 자그마한 평온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레이디도 못 알아보는 괘씸한 기사.”

말로는 괘씸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깰까 싶어 조용히 블라드의 옆에 앉는 알리시아.

나풀거리며 떠오르는 반딧불들이 그녀의 착지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여름밤 위로 떠오른 푸른 달 하나.

한참을 블라드의 옆에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알리시아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가만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래도 지금 잠든 모양새로 보아 무슨 짓을 해도 쉽게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블라드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다.”

잠들어 있는 블라드의 귓가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알리시아의 목소리.

“그러니까 앞으로는 알리시아를 자주 찾아온다.”

오직 둘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누가 들을까 봐 조용히 손바닥을 세워 입술을 가리는 알리시아.

오직 언덕 위에서 맴돌고 있는 바람들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 뿐이었다.

“요제프 님보다 알리시아를 더 자주 찾아온다. 알았지?”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 계속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하는 알리시아.

이렇게 한다 해서 블라드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의 읊조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듣지 못하기에 오히려 편하게 전할 수 있는 말.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블라드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거 듣고 있는 거 아냐?”

그저 장난삼아 한 행동이었겠지만 아마 알리시아는 몰랐을 것이다.

지금 블라드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귀는 왜 쫑긋거려?”

깊이 들어가야 했기에 활짝 열어놓은 블라드의 세계 안으로 알리시아의 읊조림이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다가올 일전을 대비해 명상을 통해 세계를 정비하고 있던 블라드.

예민한 작업이었기에 누가 오면 깨워달라 신신당부했었지만, 정작 부탁을 받았던 언덕 위의 하얀 뱀과 어린 정령들은 그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

“흐음.”

다음 날 아침.

요제프는 성벽 위로 올라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가이다르 군을 확인했다.

“용케도 이탈자가 몇 없었나 보군.”

숱한 방해 공작 속에서도 용케 군세를 흩트리지 않았던 가이다르 백작.

그가 이끌고 오는 서부의 군대가 데어마르의 푸른 초원 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요제프 님.”

“······미리 사기를 올려놓기를 잘했군.”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전장의 공기.

5천 대 1,300명.

아무리 성안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배는 넘는 군세가 다가오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날 군의 사기는 동요는 할지라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고 있었다.

“당연히 이 상황까지 내다보고 한 일이었겠지?”

“······아마도요.”

블라드는 무심히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에게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대었다.

어찌 보면 먼저 한 방 날린 것이나 다름없던 강렬한 도발.

하이날 군의 병사들은 뒤에 도착할 바예지드 군의 존재와 함께 블라드라는 기사에게서 적잖은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남작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들었다.”

“네.”

망원경을 접고는 천천히 성벽 위를 걷기 시작하는 요제프.

그를 따르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잘한 일이다. 아무리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이번 전쟁의 사령관은 알리시아 님이니 그녀의 격을 높여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성안에 있는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알리시아가 이번 방어전의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명목상일 뿐이라는 것을.

실제로 이 전쟁을 움직이는 것은 가이다르와 바예지드였으며 실제로 이곳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요제프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알리시아에게 보여주는 블라드의 존중은 분명 하이날 군에게 있어 사기를 높일만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예지드가 아끼는 기사임에도 자신들의 군주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개의치 않는 기사.

그녀를 존중하는 블라드의 태도는 분명 고단수의 정치적 행위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는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군.”

“······.”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짓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뒤통수를 긁적이고 말았다.

그냥 오늘만큼은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했을 뿐인데 이게 이렇게까지 이어지다니.

요제프의 말을 들어보니 어쩐지 고작 인사였을 뿐인데도 알리시아나 던칸이 크게 기꺼워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잘 봐둬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네가 맡을 구역이다.”

요제프의 지시에 따라 한 명씩 떨어져 나가는 그레고리, 케이드, 막심.

그리고 이제는 블라드의 차례.

한 명 한 명에게 세심히 구역을 지정해 준 요제프는 마지막으로 블라드가 담당할 구역을 알려주며 입을 열었다.

단순히 회의를 통해 알려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전쟁을 처음 겪어보는 블라드를 위해 특별히 하는 배려이기도 했다.

“가이다르 군이 공성 병기까지 갖추고 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분명 성벽을 타고 오르려 할 테지.”

단단하게 보수해놓긴 했지만, 규모상 작을 수밖에 없는 데어마르의 성벽.

지그문드는 충분히 그 성벽을 뚫을 수 있다 판단했고 들고 오는 공성 병기들을 통해 그에 대한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치열할 거다. 어느 때보다 너의 판단이 필요한 순간일 테고.”

“······.”

셀 수 없는 접전 속에서 어느 쪽이 밀리는지 뚫리는지.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것은 이제부터 블라드의 몫이 될 것이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성벽 위 구역이었지만 지금부터 블라드는 이곳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상대 기사들을 눈여겨봐라. 너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얼마든지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사뿐.

경험이 없는 블라드는 언제나 자신만큼이나 날카로운 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

더 전해줄 말이 있었지만, 요제프는 이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미 자신의 기사는 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헤어지는 두사람.

좁디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요제프는 추웠던 겨울날을 떠올려 보았다.

“둘이 붙겠나?”

“아마 기회만 있다면 할 겁니다.”

“······그래.”

비루한 뒷골목의 소년이었음에도 당당히 서부의 달을 부술 거라 말하던 녀석이었다.

그때야 그저 희미한 가능성이었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의미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블라드가 이길 수 있겠나.”

“······아직은 아닙니다.”

요제프는 그 당돌한 소년에게 약속했었다.

네가 복수할 수 있는 기회, 만들 수 있다면 만들어주겠다고.

그때의 그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닌 언젠가는 맞붙을지도 모르는 가이다르를 상기한 조건이었다.

“위치를 내 반대편에 박아두기를 잘했군.”

그러나 지금과 같이 필패가 약속된 상황에 올리겠다는 약속은 아니었었다.

가이다르의 고딘과 쇼아라의 블라드는 아직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

요제프는 같은 전장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구분된 공간 속에 둘을 갈라놓을 생각이었다.

“생각대로 잘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영민한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전장의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는 법.

저 멀리 황혼과 함께 다가오는 가이다르 군을 바라본 요제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서쪽에서 다가오는 그림자가 길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 다가온 북부의 초원.

수많은 천막들이 나부끼는 곳에서 당당히 병사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가 있었다.

“비켜라.”

자신을 노려보는 수많은 기사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는 남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조차 내쉬지 못할 압박감 속에서도 강철공 티무르와 북부의 기사들은 평온히 앞길을 열뿐이었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천막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기세였지만 용살 기사단의 라두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태연히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을 뿐이었다.

“너무 일이 늦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지. 역시 버거운 짐이었나 보오?”

강철공 티무르.

북부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그는 더 이상의 견제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짐이라도 좀 덜어드리러 왔지. 인제 보니 진작 올 걸 그랬군.”

반년이나 계속된 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군세들을 우트만 남작령에 발끝조차 들이밀지 않았으니 누가 보아도 의도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끌려다니지 않겠다.

티무르는 교황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우트만 남작령을 칠 작정으로 이곳으로 왔다.

이래저래 반발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예 빌미의 근원을 제거해 용살 기사단을 몰아내겠다는 의도였다.

“하하! 그동안 이 못난 후배를 걱정해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그러나 정작 이 원정의 사령관인 기사 라두는 태연할 뿐이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 보이는 것은 그저 티무르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이제 곧 여기에서 떠난다고 보고를 드릴 예정이었죠.”

“······떠난다고?”

예상치 못한 라두의 말에 티무르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소로부터 전해지는 알 수 없는 낭패감이 티무르의 발끝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제는 움직여야지요.”

티무르에게 희미하게 감도는 당황을 알아본 라두는 과장된 행동으로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라두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레들.

그 위에서 흔들거리는 정체 모를 것들이 티무르에게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행이었습니다. 쉬운 전투는 아니었지만 역시 신께서는 저희를 굽어살피고 계셨습니다.”

“······.”

티무르는 라두의 이죽거림은 무시한 채 조용히 수레 위에 실려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눈길을 따라 쉼 없이 마주치는 희미한 시선들.

수많은 머리들이 몸을 잃어버린 채 마치 짐짝처럼 수레 위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여기 보시면 아마 낯이 익을 겁니다. 우트만 남작님도 계시고 그의 부인과 기사들도······.”

“지금 이게.”

흔적만으로도 사태를 파악한 티무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갑작스레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주위의 공기.

기사 중의 기사. 티무르 바라노프가 내뿜는 거친 기세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숨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실체가 없었음에도 짓눌리고 있는 잔디들.

아무런 반항의 흔적이 없는 머리들과 출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군사들의 모습을 보며 티무르는 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정하시지요. 공작님.”

심상치 않은 티무르의 기세에 이제야 비릿한 미소를 지워낸 라두.

그러나 그는 미소는 지웠을지언정 여유로운 모습은 잃지 않고 있었다.

오랫동안 맞대왔던 가장 오래된 용의 기세는 이것보다 훨씬 찐득이고 매서운 것이었으니까.

“우트만 남작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굽히지는 않았지만 떨릴 수밖에 없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물건 하나.

“이건 뭐냐.”

“압실론입니다. 요즘 한참 중앙에서 말이 많은 물건이지요.”

티무르가 상자를 열자 느껴지는 청량한 냄새가 있었다.

아직은 북부에 유통되지 않은 엘프들의 차. 압실론이었다.

“마약입니다. 이것을 통해 북부를 병들게 하려고 했다는군요. 사특한 존재가 그것을 요구했다 합니다.”

아니었고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이란 것은 힘 있는 자들의 앞에서는 깨어진 조각이나 마찬가지.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을 흩뿌려진 조각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북부에서 그 차를 가장 먼저 받아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맞춰진 조각에서부터 강철공에게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용의 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예지드의 옥사나 백작 부인이라 하더군요.”

“······.”

어서 용의 조각들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의 북부를 깨뜨려버릴 테니까.

“아무래도 수상하지요?”

사납게 마주 보는 용과 사자.

티무르는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용의 발톱이 다다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진형을 거두고 있는 용살 기사단과 중앙의 군세들.

그들의 깃발이 천천히 바예지드의 주도. 스투르마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23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6화 23

쇼아라로 보내는 편지

곳곳에서 날아드는 까마귀들.

지금도 계속해서 반짝거리고 있는 도로테아의 마법구까지.

데어마르로 향하는 바예지드의 군세를 향해 불길한 소식들이 속속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바예지드에서 보내는 긴급 전보에요.”

수인족 특유의 삐쭉한 귀를 쫑긋거린 도로테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옥사나 님께 지금 교황청의 소환 문서가 날아왔다고······.”

병약한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노력이었지만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사특한 행위로 보였을 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누군가들에 의해 옥사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멋대로 재단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도.

“아버지.”

“······.”

이제 곧 데어마르가 지척인 상황.

반나절만 걸어가면 전장으로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도 불길한 소식들은 계속해서 날아들고 있었다.

곳곳에 뿌려놓았던 간자들, 이빨을 들이미는 교황청, 그리고 영역을 접하고 있는 주변의 영주들까지.

모두가 한 소리로 지금 스투르마에 큰 변고가 생길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돌아가야겠군.”

북부의 가장 끝에서 보내온 까마귀까지 받아든 페테르는 진중히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작님. 지금 저희가 돌아가 버리면 홀로 있는 요제프는 고립되고 맙니다.”

루트거는 돌아가야겠다는 페테르의 말을 듣고는 이대로는 안 된다며 강경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데어마르는 몰라도 요제프만은 빼 와야 합니다. 저에게 군사를 내어주신다면······.”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아주 조금이었지만 루트거에게서 번져 나오는 진심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싸울 수밖에 운명일 수밖에 없는 형제였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같은 바예지드였다.

“걱정하지 마라. 요제프를 혼자 두지는 않을 테니.”

“네?”

루트거는 페테르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백작가의 안 주인은 교황청에 소환당했고 중앙의 군세가 스투르마를 위협하는 지금, 페테르의 모습은 그저 여유로워 보일 뿐이었다.

“본래 전쟁이라는 것은 적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핵심이지.”

전쟁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형성된 전선에 얼마만큼의 자원을 밀어 넣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렇기에 지그문드와 드라굴리아는 바예지드의 본대와 하이날 군을 떼어놓으려 지금 같은 수작을 부려온 것이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위협을 통해서.

“이제 적들의 의도를 확실히 알았으니 대응하기도 쉬워졌군.”

강철공이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꾸깃하게 접은 페테르.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부터 여태껏 고이 담아두고 있던 분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게 돌아가야겠다. 조금은 늦을지도 모르겠구나.”

말을 마친 페테르의 시선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나아갔던 방향과는 조금은 틀어진 방향이었다.

※※※※

“······이런 이유로 바예지드의 요제프는 어서 나와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하고! 알리시아 남작은 이번의 혼인으로 서부에 대한 존중심을 보이길 바라오!”

전령을 뜻하는 하얀 깃발을 든 채 큰소리로 성벽 앞을 뛰어다니는 서부의 기사.

블라드는 비록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수많은 적 앞에서 당당히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 용기만큼은 높게 평가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뭐?”

그러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둘씩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하이날의 병사들.

마치 여기서라면 네가 나서서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표정들이었다.

“······흠흠. 저 죽일 놈. 저 자식 이름이 뭐야.”

그저 묘하게 다가오는 압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의 사기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감히 남작님을 능멸하다니! 이름을 밝혀라! 이 무례한 놈아!”

“블라드 님이 네 놈의 이름을 물어보신다!”

블라드의 조용한 웅얼거림에서 시작된 말은 파도가 되어 병사들을 타고 성벽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가! 너를!”

“전장에서 만나면 오체를 분리시켜주마!”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터져나가는 병사들의 욕지거리를 보며 선전포고를 하러 왔던 기사뿐만 아니라 블라드조차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불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에서부터 요제프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컥!”

분노하는 데어마르의 군사들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갑작스레 날아드는 화살.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지만 말 엉덩이에 꽂혀버린 화살은 충분히 전령을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저 같잖은 놈이 떨어졌다!”

“나가서 죽여버려!”

선전포고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려던 가이다르의 의도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먼저 도망쳐버린 말을 향해 뛰어나가는 가이다르의 기사.

낙마하며 어디가 다쳤는지 실룩거리며 뛰는 그의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이거 약을 바짝 올려버렸군.”

가장 화려한 깃발 아래, 성벽 위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던 요제프는 저 끝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이다르 군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긁적여대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재능이야. 말 한마디로 5천을 움직였잖나.”

“······나중에 한마디 해놓겠습니다.”

초원의 끝에서부터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는 가이다르 군.

얼핏 보아도 성벽만큼이나 높게 조립해 놓은 공성탑이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놓으셨군.”

수십은 될 것 같은 공성 병기들.

그나마 바위가 없는 곳이기에 투석기를 쓸 수 없다는 점이 조금이나마 위안일까.

“화살에 불을 붙여라.”

그러나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것은 가이다르뿐만은 아니었다.

횃불에 화살을 가져다 대 불을 붙이기 시작하는 궁수들.

이제야 떠오른 태양을 향해 하이날 군의 화살이 치켜 올려졌다.

“아직.”

냉정하게 거리를 재며 사정거리를 확인하는 요제프.

수성하는 입장에 있어 처음에 날리는 화살만큼이나 확실한 공격은 없다는 것을 요제프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귀중한 기회를 가장 확실하게.

“옵니다.”

“아직이다.”

저 앞에서부터 가이다르 군의 함성이 들려온다.

각자 방패를 집어 들고 뛰어오는 서부의 약탈자들.

발이 빠른 몇몇은 이미 성벽 밑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

“지금!”

갑작스레 기우뚱거리는 공성탑의 끄트머리.

그 모습을 보며 때가 되었음을 눈치챈 요제프가 큰소리로 외치며 신호를 보냈다.

함정이다! 적들이 함정을 파놨다!

이런 미친! 아까까지만 해도 건너갔는데!

무게에 따라 발동되는 함정.

해자처럼 깊게 파인 함정들이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며 가이다르의 공성 병기들을 한입에 삼키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부터 새빨갛게 달궈진 불화살들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

“······저놈 이름이 뭐라고?”

“요제프라고 합니다. 바예지드의 둘째지요.”

지그문드는 말 위에 앉아 전장을 바라보고는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놈도 제정신은 아니었구만.”

으아아악! 화살이다!

공성탑이 불타고 있다! 불부터 꺼!

제정신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 파놓은 수많은 함정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함정을 보며 지그문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는 짓거리는 겁쟁이나 쓸 수법이었지만 이 정도까지 진심으로 틀어박혀 버리면 이제는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보니 눈을 가린 거였구만.”

페테르가 별동대를 풀어 후방을 교란했던 것은 단순히 보급을 차단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정찰병들.

진작에 전장을 염탐했어야 했을 수많은 서부의 정찰병들은 블라드와 같은 별동대를 쫓아다니느라 지금과 같은 상황을 미처 발견해내지 못했다.

“무너진 곳만 피해서 다시 보내. 어차피 시간 끌기에 불과하니.”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러나 예상보다 큰 피해였음에도 지그문드는 침착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공성전에서 공격 측의 피해는 강제될 수밖에 없는 법.

지그문드는 과정에 압박받기보다는 결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성벽만 넘으면 된다.”

데머마르의 성벽은 낮으며 딱히 가로막는 지형도 없다.

게다가 병력의 차이도 거의 5배의 차이인 1,300대 5천.

게다가 자신의 병사들은 숱하게 싸워오며 경험을 쌓아온 강병들이었으니 이 전투는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

미친 듯 박아 넣은 함정들이 오히려 수비 측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기다리던 아비는 오지 않을 텐데 말이지. 참으로 안타깝구만.”

어떤 영주라 해도 주도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막으려 할 터.

고작 남의 땅인 데어마르를 지키기 위해 스투르마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공성탑. 성벽에 안착했습니다.”

“그래. 봤다.”

고딘의 보고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공성탑 하나가 용케 데어마르의 성벽 앞에 찰싹 붙어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듯 웅성이기 시작하는 성벽 위에 모습을 보며 지그문드는 두툼한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공성탑이 온다!

화살 쏴! 넘어오기 전에 죽여버려!

“후······.”

블라드는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바로 앞으로 다가오는 공성탑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거대한 몸체.

악의를 가득 담은 공성탑의 위에는 방패를 치켜든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한가득이었다.

“블라드 님!”

“나도 알아.”

용병대장 슈테판은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려 블라드를 보조하고 있었다.

“근처에 쟤네 말고 달라붙은 딴 놈들은 없지?”

“네, 네! 없습니다!”

그러나 경험 없는 것이 확실한 자신의 상관은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타고 났구만.’

간혹 이런 자들이 있고는 했다.

타고난 피가 전장에 맞는 사람들.

실전에 강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전장에 알맞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는 했었다.

“공성탑이 닿았다!”

“이 개자식들아! 다 죽어!”

마침내 성벽에 닿은 공성탑에서 불타는 나무문을 걷어차며 뛰쳐나오는 가이다르의 기사.

“나는 가이다르의 홈멜······. 컥!”

잔뜩 웅크려 있던 분노를 터트리며 포효하듯 외친 가이다르의 기사.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내뱉지 못한 채 거친 발길질에 탑 안으로 밀려들어 갈 뿐이었다.

“슈테판.”

“네!”

“문 닫아.”

“네?”

요란한 우당탕 소리를 내며 공성탑 안으로 밀려 들어간 기사.

곧 그를 따라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공성탑 문. 걸어 잠그라고.”

비명과 고함, 그리고 아우성이 가득한 공성탑을 향해 블라드는 서슴없이 발을 올려놓았다.

“그래 아까 뭐라 하던 녀석. 이름이 뭐라고?”

불청객이 채 닿기도 전에 먼저 적들의 불청객이 되기로 한 블라드.

불길이 가득한 공성탑의 안에서 블라드의 왼쪽 눈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

쇼아라에 있는 장미의 미소.

그곳에 있는 붉은 머리의 마담은 이제야 막 건네진 편지 한 장을 집어 들고는 숨기지 못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그놈이 굳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쓰겠다지 뭐야. 그동안은 너무 바빠서 못 썼다고 그러면서.”

“블라드가 퍽이나 그랬겠다.”

하벤은 날카롭게 날아드는 제미나의 핀잔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오직 귀한 손님들만이 앉을 수 있다는 4층의 테이블.

그곳에는 이미 반가운 소식을 들고 온 선장을 위해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술 한잔이 올려져 있었다.

“어쨌든 걔가 쓴 건 맞아.”

“······흥. 내가 알게나 뭐야.”

말과는 다르게 떨리는 손끝으로 블라드가 보낸 편지를 뜯어내는 제미나.

샹들리에 밑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 장식이 화려했다.

그 누구라도 지금의 제미나를 보며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피워진 장미의 미소 앞으로 레이디 제미나에게 보내는 기사의 편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 속에서 그리웠던 누군가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

제미나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저 미친 새끼 뭐야!

-죽여! 죽여버려!

흔들리는 배 위라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버틸 만은 하네.

-공성탑이 흔들린다!

-저 미친놈이 사다리를 부순다!

뭐 이런저런 임무가 있긴 했었지만 다 시시한 것들뿐이었고 조만간 전쟁이 있긴 할 건데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어차피 나는 요제프 님의 호위 기사 같은 거라 막 깊숙한 곳까지 안 나갈 거 같거든.

안전하다는 이야기지.

-블라드 님!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공성탑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말고 나중에 쇼아라에서 보자.

그럼 이만.

※※※※

낮이었지만 차가운 바람이 맴도는 벌판 위.

곳곳에 쓰러져 있는 깃발들 사이로 시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살아있는 자도, 죽어있는 자도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신음만을 내지르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크윽! 컥!”

“다시 한번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

새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기사.

그러나 라두의 머리카락은 본래 가지고 있던 색보다도 더 진한 붉은색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북부······. 북부입니다.”

“그래. 이곳은 북부다.”

나이에 알맞은 희미한 머리 색깔.

그러나 짓고 있는 표정만큼은 생동감이 넘치는 북부의 사자. 강철공 티무르.

“그런데 북부에서 왜 나를 무시했던 거냐. 내가 우스웠나?”

“끅!”

라두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다시금 습기 가득한 진창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숨을 들이쉬지 못해 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목덜미가 다급하게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용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반쪽밖에 못 물려받은 빨간 놈아. 잘 들어라.”

“끅! 끄읍!”

살기 위해 강렬히 뿜어져 나오는 오러에도 굳건히 버틸 뿐인 티무르의 팔.

하룻강아지에게 죽음의 경계를 선사하는 사자의 얼굴로부터 잔인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 골골대며 누워있는 황제가 이미 송장이 되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티무르의 말에 세차게 진흙을 움켜쥐기 시작하는 라두의 손.

거칠게 헤매는 그의 손이 점점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푸압! 커헉!”

고개를 짓누르던 묵직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그제야 겨우 진창에서 빠져나온 라두.

“헉, 헉.”

다급하게 들어 올린 고개 주위로 각기 모양이 다른 색색의 깃발들이 가득했다.

북부의 영주들을 뜻하는 깃발들.

차갑게 용을 내려다보는 영주의 눈빛에는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티무르의 하얀 이빨이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용을 보며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회는 일찍 해도 늦는 법.

스트루마로 향하던 수많은 병사의 시체들은 라두의 뒤늦은 후회에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목숨은 살려주마. 그러니 네 아비에게 가서 전해라.”

“끄아아아악!”

감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뽑혀 나간 티무르의 검.

그 검의 끝이 라두의 손바닥을 꿰뚫고는 땅을 향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더는 정당한 황제 없는 제국에게 충성하지 않겠노라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울고 있는 용.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는 북부의 사자.

오랫동안 숨겨왔던 그의 미소가 환히 밝혀지고 있었다.

억눌린 울음소리와 함께 차가운 침묵만이 가득한 이곳은 북부.

더는 제국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그들만의 땅이었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7화 17

격돌 (1)

벌떼같이 성벽으로 달라붙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끓는 기름의 냄새가 코끝을 매캐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

저 아래서부터 차마 듣기 힘든 비명이 솟구쳐 온다.

녹아내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떨어지는 병사와 그의 몸부림에 휘말려 추락하는 사내들.

그 광경은 단 한순간일 뿐이었지만 전쟁에 관한 모든 감상을 담은 순간이기도 했다.

“젠장.”

케이드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또다시 화살을 메겨야만 했다.

이미 굳은살이 가득한 손가락이었지만 지금 그의 손끝에는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3일이나 이어졌던 격렬한 농성은 깊게 박힌 굳은살도 벗겨낼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차라리 그때가 더 나을 지경이로군.’

케이드는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묵묵히 다음 화살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서 화살이 하나 떠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누군가가 고꾸라졌지만, 그 또한 잠시였을 뿐이었다.

5천 명 대 1,300명.

성벽과 함께라면 3배의 병력도 감당할 수 있다는 병법론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이 자그마한 성벽은 애초에 이러한 대규모 전쟁을 가정한 채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데어마르를 함락시키고 말겠다는 지그문드의 굳은 의지가 점점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네 이놈!”

케이드가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에 아무도 없는 사다리 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손 하나.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손은 데어마르의 성벽을 쓸어올리며 기어이 위를 기어오르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이 너구리 같은 새끼. 아까부터 지켜 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왼쪽 눈 사이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자. 그에 대한 증거.

오러였다.

“죽어라!”

“크윽!”

으지지직-!

최선을 다해 막았으나 결국 뚫려버리고 만 구멍 하나.

그 구멍에서 들어오는 거센 물결이 케이드를 향해 사납게 짓쳐 들기 시작했다.

“병신 같은 놈! 끝까지 검을 안 뽑는군!”

이름 모를 기사의 비웃음과 함께 점점 번져가는 활대의 균열.

케이드의 자부심이자 소중히 쌓아 왔던 세계의 단초가 부서지고 있었다.

“역시 근본 없는 북부 놈들답구나. 이딴 반푼이도 기사랍시고 들먹이고 있다니!”

검이 아닌 활을 쓰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가이다르의 기사.

그러나 그의 비웃음을 벗겨내기에는 케이드의 발버둥은 아직 미약할 뿐이었다.

“크윽!”

결국, 오러가 실린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쪼개져 버린 활대.

차마 막아내지 못한 검 끝이 케이드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소문만 자자했지 북부의 기사들도 별거 없구만.”

케이드를 내려다보는 이름 모를 기사의 눈빛에는 차마 감출 수 없는 희열이 감돌고 있었다.

약한 자를 통해 확인하는 나 자신에 대한 증명.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남을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가 그의 검 끝에 맴돌고 있었다.

“이름이 뭐냐. 갈 땐 가더라도 서로 통성명은 하고 가야지.”

핏물 가득한 성벽 위에서 침을 내뱉는 가이다르의 기사.

그 위로 다시 덧칠될 붉은색을 기대하며 기사의 검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잖냐. 이 활쟁이 자식아.”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순간에도 어째서인지 웃음 짓고 있는 케이드.

힘겹게 벽에 기댄 채 기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뭐?”

스걱-

앞을 향해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뒤에서부터였다.

서늘한 대답과 함께 반전하기 시작하는 세상.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빙글빙글 돌던 기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저 멀리서 휘날리는 가이다르의 깃발을 담아내었다.

철퍽-

“케이드. 괜찮아요?”

“흐, 흐흐······.”

벽에 기대 있던 케이드는 블라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빨리 가요. 우리 쪽도 뚫렸어요.”

“······성벽이 너무 작아. 애초에 농성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어.”

케이드를 부축한 블라드는 웅얼거리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뒤에서부터 따라오는 슈테판과 블라드의 병사들.

그들이 물러나는 자리로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한둘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단 합류하죠.”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이름 모를 기사의 머리를 멀찍이 발로 차낸 블라드.

블라드는 끝까지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블라드의 귓가에는 쉼 없이 성벽으로 달라붙는 사다리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고 있었다.

※※※※

“우측 성벽이 함락되었습니다! 현재 가이다르 군이 성벽을 타고 성문으로 오는 중입니다!”

“성문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충차를 부수지 못한다면요.”

요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귀를 열고 있었다.

굳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보고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불길한 공기와 함께 섞여 들려오는 둔중한 소리.

가이다르의 충차가 계속해서 성문을 두들겨 대는 소리였다.

“도대체 지원군은 언제나 오는 겁니까? 저희는 3일이나 버텼습니다!”

하이날의 기사 중 하나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책상을 성벽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하고 말았다.

적의 피로 끈적해진 그의 갑옷.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달려드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그의 인내심까지도 갉아먹은 듯해 보였다.

“조금 늦는군요.”

“······.”

그러나 그의 울분에 답하는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할 뿐.

“우측 성벽은 포기하겠습니다. 성안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파괴하십시오.”

“하지만!”

“지금부터 시가전을 준비하겠습니다. 준비했던 대로 성벽과 가까운 민가들에 불을 붙이겠습니다.”

쉼 없이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도 요제프의 대처는 차분할 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는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성벽을 포기하실 겁니까?”

“미안합니다. 던칸 경.”

요제프의 사과에 던칸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말하고 싶었지만 늙은 기사는 이미 상황이 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요.”

데어마르를 포기해야 한다.

평생을 하이날을 지켜왔던 늙은 기사의 절망을 보며 하이날의 기사들도 같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순간 던칸의 귓가로 맴도는 희미한 소리가 있었다.

크게 상심하고 있던 그조차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낮지만 진하게 깔리는 소리.

여태껏 전장에서 들어본 적 없던 낯선 소리였다.

“······이빨 나팔입니다. 북부에서만 서식하는 검치호의 이빨로 만든 것이지요.”

“네?”

던칸은 더 설명해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요제프는 그저 자그마한 한숨만을 내쉰 채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혹시 계획이 새어나갈지 몰라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다.”

이제야 가까이서 마주 볼 수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

파리한 안색, 짙어진 눈그늘.

누구보다 평온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발버둥이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

내가 헛 늙었구나.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던칸은 조용히 하얀 눈썹을 감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었을까.

다가올 확실한 순간을 위해 요제프는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아군의 공포까지도 책임져야만 했다.

그것이 지휘관의 무게였고 바예지드로서 짊어져야 하는 의무였다.

“위스키입니까?”

“네.”

이 자리에 있던 하이날의 누구도 요제프에게 자신들을 속였다며 화를 내지 못했다.

수통을 들고 있던 요제프의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짙은 눈그늘의 청년은 분명 데어마르의 성벽 위에 자신의 목숨도 함께 걸어 놓은 것이었다.

“아끼던 것이었는데 다행히 살아서 마실 수 있었군요.”

역시 데운 와인이나 희멀건 차 따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목구멍을 파고들어 내장까지 태우는 이 술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니까.

우우- 우우우우-

저 멀리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나팔 소리.

그 소리가 다가올수록 질척이던 전장의 공기는 빠져나가고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깃들고 있었다.

요제프는 익숙한 북부의 소리와 함께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위스키를 들어 올렸다.

※※※※

“어서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란 말이다!”

사납게 울부짖는 서부의 패자.

지그문드는 직접 검을 뽑아 들고는 미친 듯이 외치는 중이었다.

“얌전히 내려오는 자식은 내가 친히 죽여주겠다! 뭐라도 찌르고 내려오란 말이다!”

핏줄이 터져버려 붉게 물든 눈동자와 체면 따위는 내던졌다는 듯 아예 쉴 새 없이 뛰어다니기까지.

누가 보아도 고귀한 귀족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지그문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늘이다! 오늘 안에 우리는 이 빌어먹을 성벽을 넘어가는 거다!”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이 또한 분명 지휘 방법의 하나.

열정적이다 못해 미친것만 같은 가이다르의 몸짓은 분명 병사들을 가혹하게 독려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지그문드는 점점 기울어 가는 전장의 기세를 느끼며 환히 미소를 지었다.

쾅! 쾅!

힘없이 부서지고 있는 성문과 어느새 자신들의 병사로 가득 찬 성벽까지.

결국은 이것이었다.

그 어떤 전략의 귀재가 와도 농성하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직하게 병사들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그문드는 그 우직함이라는 덕목에 확실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선봉에 서라. 아들아. 가서 네 꺾어진 자존심을 세우고 와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지그문드의 명령에 이슈트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긴장과 흥분 그 어딘가.

아버지의 명령은 분명 이슈트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을 말하고 있었다.

저곳에 내가 빼앗긴 검이 없다면 물망초 꽃이라도 꺾어오리라.

“성문이 뚫렸습니다!”

“좋다!”

길게 걸리면 1년도 넘을 수 있다는 게 바로 공성전이었다.

그러나 지그문드에게는 데어마르를 함락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병이 있었다.

“그래도 애송이치고 끈질기게 버텼군.”

지그문드는 거멓게 그을린 데어마르의 성벽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바예지드의 애송이가 애는 썼다만 애초에 이 성벽은 5천의 병력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지 않는 아비를 기다리며 악을 쓰기야 했겠지만 말이다.

“기사들은 들어라! 가장 먼저 요제프 놈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는 금화 300골드를 주겠다!”

금빛 약속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함성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지그문드의 목소리는 분명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 남작을 데려오는 자에게는······.”

그러나 그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우우- 우우우우-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리.

서늘함을 간직한 나팔소리가 지그문드의 말을 가로막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누구랄 것도 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그곳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있던 진형 뒤의 숲속.

그곳에서부터 까맣게 초원 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병사들.

어림잡아도 3천은 되어 보이는 군사들이었다.

“아니······.”

지그문드는 그 모습을 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를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서둘러 손으로 닦아내 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두 눈에는 굳건히 서 있는 군세들이 가득할 뿐이었다.

“······스투르마를 버렸다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이라 생각했건만.

그러나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것은 분명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들의 깃발이었다.

“어째서?”

북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차별과 멸시, 그리고 끊임없는 견제를 넘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그때를.

드라굴리아와 가이다르의 위협은 그때를 앞당겨주는 불씨가 되었을 뿐이었다.

“바예지드! 바예지드가 어째서!”

저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

그 깃발이 바로 북부가 서부에게 전하는 답변이었다.

깃발에 나부끼는 스투르마의 성벽이 우리는 오랫동안 참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

“역시나 조금 늦고 말았군.”

페테르는 까맣게 그을려 버린 데어마르의 성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성벽 가장 높은 곳에는 여전히 하이날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늦지는 않았다.

“잘 버텨주었구나.”

3천이나 되는 대병력을 우회 기동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 안에서 버티고 있던 요제프보다야 나았겠지.

페테르는 여태껏 고군분투했을 자신의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들아. 앞장서거라.”

“네. 아버지.”

루트거는 페테르의 명령에 들고 있던 창(Lance)을 바짝 치켜세웠다.

날카롭게 치켜떠진 창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뒤를 훤히 열어놓은 가이다르 군의 진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말 않겠다! 나의 기사들아. 저들에게 보여주고 와라!”

페테르의 검은 눈동자에서부터 천천히 짙은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능멸하고 나의 부인을 모욕하고 나의 아들을 괴롭힌 자들.

차갑게 벼려놓은 페테르의 분노가 바예지드를 피를 타고 루트거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바예지드가 누구인지를-!”

페테르의 명령과 함께 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넓은 초원을 따라 돌격하기 시작하는 바예지드의 기병대.

이제야 그들을 확인한 가이다르 군이 허둥지둥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이미 달려들기 시작한 기병들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다.

저게 뭐야!

저놈들이 왜 우리 뒤에 있어!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수백 기의 말이 달려드는 정면.

뒤로는 아직 뚫지 못한 성벽.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루트거는 조용히 자신의 창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들어올 때는 네놈들 마음대로였지만.”

깊은 세계에서부터 퍼지는 울림이 그의 창끝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그의 창끝에 매달릴 파멸들을 기대하며 루트거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러나 나갈 때는 아니지.”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마치 깨어진 파편처럼 흩날리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가장 단단한 용도 갈라내었던 루트거의 세계가 매서운 기세로 서부의 독수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17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8화 17

격돌 (2)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들이 귓가에 윙윙거렸다.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누군가의 사지들.

차마 죽지 못한 병사 하나가 쏟아지는 내장을 주워 담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이거 뭐야.”

이슈트반은 자신의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무언가 꿈속을 걷고 있는 기분인 것 같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방금까지만 해도 우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는데.

“정신 차리십시오!”

갑작스레 당겨지는 멱살.

먹먹한 귓가를 꿰뚫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슈트반은 그제야 묘한 부유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기사단장인 고딘이었다.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히 빛나는 고딘의 눈빛에서 혼란을 진압하는 강압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독과 같이 느껴졌던 고딘의 기세였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슈트반에게 득이 되어 주었다.

“그래······. 그렇지. 아직 끝난 게 아니지.”

고딘의 눈빛을 마주한 이슈트반은 그제야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는 전장을 바라볼 수 있었다.

과연 그의 말처럼 분명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도 전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진형을 정비하고 있었으니까.

“어서 우측 성벽으로 붙으라니까! 멍청하게 화살이나 처맞지 말고!”

갑작스레 들이닥친 바예지드의 기병들.

그들은 첫 번째 돌격으로 원하던 모든 것을 가져갔지만 그럼에도 가이다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와그너! 기병대를 이끌어라! 저 미친놈들을 떼어놔!”

“알겠습니다!”

비록 깃발을 잃은 기사였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제 역할을 해야만 할 것이다.

서둘러 기병들을 수습해 본대에서 떨어져 나가는 와그너.

그리고 자신들이 점령한 우측 성벽 쪽으로 진형을 움직이는 지그문드.

2차 돌격을 위해 숨을 고르던 루트거는 예상보다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는 가이다르 군을 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이슈트반-! 이 멍청한 아들놈아! 내 말을 못 알아들은 거냐!”

이슈트반은 지그문드가 고래고래 자신의 이름이 외치자 그제야 온전한 눈빛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는 행동은 경박하고 가볍지만 그럼에도 군주의 자질만큼은 확실한 자.

“충차에 불을 붙이라는 내 말이 안 들리느냔 말이다-!”

지그문드의 외침에 퍼뜩 정신을 차린 이슈트반은 잔뜩 그을려 있는 데어마르의 성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널브러져 있는 각종 공성 병기들.

방금까지만 해도 성문을 함락하기 위해 쓰였던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하이날 군이 나오는 것을 가로막아야 하는 기물들이 되어버렸다.

“······너희 분대를 나를 따른다! 각자 기름과 횃불을 들어라!”

지금도 앞에서 자신들을 날카롭게 바라보는 바예지드 군의 눈빛이 매섭다.

그러나 그들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존재는 진형 바로 뒤에 둘 수밖에 없는 데어마르일 것이다.

“젠장!”

바예지드와 하이날, 둘 사이에서 완전히 끼어버린 상황.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나서야만 한다.

자신들이 실컷 두들겨 놓은 데어마르의 성벽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기에 밀고 들어가봤자 의미가 없을 테니까.

“어서 불을 붙여라!”

이슈트반의 지시에 따라 하나둘씩 타오르기 시작하는 충차와 공성탑들.

육중한 몸체에 불이 붙기 시작하자 곧 시꺼먼 연기가 데어마르의 성문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됐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이슈트반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 정도의 장애물과 불이라면 아무리 성문을 열어보았자 곧장 뛰어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공성 병기들을 치우려면 아마 몇 시간은 걸릴 것이고 그 정도라면 충분히 시간은 번 셈이었다.

이제 가이다르 군은 앞에 있는 바예지드만 상대하면 된다.

“······!”

그러나 순간 이슈트반은 갑작스레 느껴지는 기세에 어깨를 움찔거리고 말았다.

“이런.”

성문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

너무나 조용해 마치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데어마르의 성문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자식······.”

분명 들리지는 않았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성문 뒤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는 누군가의 기척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날의 결투가 이슈트반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

서로를 의지하며 좁디좁은 계단을 통해 내려오는 병사들.

성벽이 함락될 것을 염려해 일부러 좁게 설계해 놓은 계단은 병사들의 발목을 잡아채며 움직임을 굼뜨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더딘 후퇴에도 그들이 무사히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지금도 병사들의 뒤에 서서 버티고 있는 한 명의 기사 덕분일 것이다.

“허억, 헉······.”

바예지드의 기사. 쇼아라의 블라드.

화려했던 금발은 온데간데없이 이제는 새빨갛게 물들고 만 머리카락이 그간의 치열함을 드러내 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면 홀로 빛나고 있는 푸른 눈동자일 것이다.

잔뜩 피칠갑이 되어 있는 와중에도 홀로 제 색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또 들어와 봐. 새끼들아.”

가래 맺힌 말의 끝맺음이 마치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이 들려왔다.

그러나 단순한 위협이 아닌 날카로운 경고임을 알기에 가이다르의 기사들은 그만 이를 악물고 말았다.

“저 미친 새끼가.”

“그만 보내줘. 우리 여기서 힘 빼지 말자고.”

그 소리에 질렸다는 듯 가이다르의 기사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마치 길을 열어 보내주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지만 그들의 발걸음 어딘가에는 어찌할 수 없는 패배감이 스며들어있었다.

성벽을 따라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새빨간 피의 길이었지만 블라드의 뒤에서부터는 온전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마치 뱀의 목을 베어낸 것 마냥 저 어린놈의 기사는 기어이 피로 이어진 길을 끊어낸 것이었다.

“블라드 님. 모두 퇴각했습니다.”

“······좋아.”

뒤를 흘끗 본 블라드는 과연 슈테판의 말대로 모든 병사가 퇴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가자.”

가이다르의 기사들을 보며 천천히 뒷걸음질 치는 블라드와 슈테판.

분명 분전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데어마르의 우측 성벽에는 이미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득시글거렸으며 지금도 새파란 날을 세운 기사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조심하십시오.”

블라드는 눈도 깜빡하지 않은 채 앞에 있는 기사들을 노려보며 슈테판을 의지해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블라드와 가이다르의 기사들 사이로 생겨나는 기묘한 거리.

그러나 지금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은 블라드였지만 안도의 표정은 오히려 가이다르의 기사들에게서 떠오르고 있었다.

‘가이다르······.’

블라드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저 위에서 펄럭거리는 깃발을 눈동자 속에 가득 담아두었다.

하이날의 나무가 아닌 가이다르의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

더는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복수의 대상을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각오를 굳혀내었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고?”

성벽에서 빠져나온 블라드와 슈테판은 서둘러 뒤에 있던 예비대로 뛰어나갔다.

블라드가 다가오자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하는 칭송의 목소리들.

곳곳에서 지쳐 쓰러져 있던 하이날의 병사들이 블라드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괜찮습니다.”

자야르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얼굴 가득한 핏물을 닦아낸 블라드는 저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물빛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단단히 틀어 올린 머리만큼이나 앙다문 입술이 굳건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걱정 가득한 눈길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청각이 예민했던 블라드는 저 멀리서 어서 내려오라 소리쳤던 가녀린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수고했다. 이제 쉬어라.”

요제프는 피로 물든 블라드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많은 말을 대신했다.

성벽 위에서 번뜩이던 블라드의 발버둥을 누구보다 가슴 졸이며 바라봤던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요제프였을 것이다.

“가겠습니다.”

“······고집부리지 마라.”

“따라가게 해주세요. 저와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나 블라드는 요제프의 배려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듯 검을 집어넣지 않고 있었다.

지금도 검을 따라 뚝뚝 떨어지고 있는 붉은색의 실선.

거친 숨결만큼이나 들썩이는 어깨가 블라드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었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저를 고딘의 앞으로 보내주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것이 저희의 약속이었습니다.”

“······.”

약속했던 때가 왔다.

소년이었던 기사는 그 어느 때보다 푸른 달에 가까워졌고 이제는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 분명 그랬었지.”

요제프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다.

너는 신의를 나는 명예를.

그리하여 기회와 자격이 생긴다면 너에게 복수할 자리를 만들어주겠다.

그것이 자신이 내걸었던 한 7년의 조건이었으니까.

“약속드립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않을게요.”

블라드는 그저 내어달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딘의 앞에 서더라도 기사의 책임과 의무를 우선시하겠습니다.”

그동안은 많은 실수를 해왔지만, 이번만큼은 믿어줬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니까.

기사라는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블라드는 더는 복수만을 생각하는 소년일 수 없었다.

“저의 개인적인 원한으로 이 전쟁을 망치지 않겠습니다.”

“······.”

의무는 삶의 무게를 더하며 무게는 곧 진중함을 갖추게 한다.

그렇게 이제는 흔적만이 남아 있는 소년의 모습을 보며 요제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다.”

요제프는 뒤에서 따끔히 다가오는 알리시아의 눈빛을 무시하고는 손수 손짓을 하며 누아르를 끌고 오라 지시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그동안 나에게 보낸 신의는 분명 진실된 것이었다.”

요제프가 수많은 실책 속에서도 블라드를 놓지 않은 것은 단순히 재능이 탐나서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년이었을 시절에도 블라드는 분명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키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이 아무리 거대하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할지라도.

요제프는 블라드의 그런 진실된 모습을 높이 산 것이었다.

“그 어떤 분노 속에서도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너 자신을 잃는다는 것은 곧 앞으로 나아갈 길마저 잃어버린다는 것이니까.”

저 멀리서부터 누아르의 울음소리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요제프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것은 그가 지금 전해주는 말이 수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이다르가 문 앞을 막았다. 나아갈 길은 좁고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이제야 요제프의 눈에서 벗어나 굳게 닫혀있는 데어마르 성문을 바라보았다.

최선을 다했기에 곳곳이 터져버린 가련한 성문.

그러나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젠가는 안전한 성 밖을 뛰쳐나가야만 한다.

“가라. 가서 우리의 건재함을 알리고 와라.”

요제프의 지시에 따라 천천히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

좁디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것은 곳곳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블라드는 자신이 나아갈 길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깊게 감은 왼쪽 눈 사이로 떠오르는 하나의 길.

오귀스트가 남겨준 흔적이 블라드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었으니까.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길이 있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막혀 있던 세상 속에 갇혀 있던 블라드는 아주 좁은 틈이라도 뚫고 나갈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붉은 불길과 시꺼먼 연기를 넘어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성문 밖을 넘보기 시작했다.

※※※※

“이런 미친!”

이슈트반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욕을 주워섬기고 말았다.

검은 연기 너머 조용히 타오르고 있던 푸른 횃대 하나.

그 횃대가 지금 서슴없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으니까.

“막아! 막아라!”

거친 공세에 어딘가가 망가졌는지 반밖에 열리지 않은 데어마르의 성문.

그러나 고작 그 정도라 할지라도 단기필마가 지나가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뒷골목의 소년에게 있어 이 정도의 열린 틈은 축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저놈이 달려들고 있습니다!

어차피 통과 못 해! 장애물이 한둘이야!

어지러이 늘어서 불타고 있는 공성 병기들.

아무리 기마술에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이만한 장애물들을 넘어설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이슈트반은 블라드가 멈추어 설 순간을 노리며 눈을 번뜩여대었지만.

히이이이힝-!

그러나 초원의 검은 말은 그의 상식을 뛰어넘는 영물이었다.

맞닿은 세계를 통해 블라드의 길을 완벽히 인식한 누아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불을 뚫고 보이지 않는 연기를 가르며 앞을 향해 뛰쳐나가 버렸다.

“맙소사.”

이슈트반은 자신의 머리를 뛰어넘는 블라드를 보며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자신의 검을 빼앗아간 기사.

여태껏 그를 향해 이를 갈고 있었건만 이제야 마주한 블라드는 자신을 뛰어넘어 더 큰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누아르!”

히이이힝-!

감고 있는 왼쪽 눈 사이로 기억하고 있던 푸른 달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아픈 상처라 할지라도 그것이 블라드의 세계를 근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모닥불 사이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기사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둥지.

여태껏 끊임없이 그것들을 되뇌이고 있던 블라드는 이제야 온전히 달빛의 이름을 내뱉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고—딘! 가이다르의 기사 고딘!”

가로막고 있는 병사들을 베어내며 아직 갖춰지지 않은 가이다르의 진형을 꿰뚫어 달리는 블라드와 누아르.

갑작스레 뒤에서부터 나타난 기사의 돌격에 가이다르의 모두가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내가 여기 왔다!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기사야!”

혼자서 거대한 물결의 사이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블라드.

스치듯 지나가는 고딘의 눈길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 다시 가져가 이 개자식아!”

아직은 온전히 닿을 수 없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나를 보는 푸른 달빛.

크게 떠진 고딘의 두 눈으로 블라드가 집어던진 시꺼먼 덩어리 하나가 날아들어왔다.

“내가 말했었지!”

차가운 겨울날, 붉게 물든 바닥을 기며 외쳤던 소년이 있었다.

“반드시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침묵만이 가득했던 장미의 미소.

흔들리던 호르헤의 목과 흐느끼던 창녀들의 울음만이 소년의 증인이 되어 주었던 그곳.

그곳에서 흘러내렸던 것은 피와 눈물만이 아니었다.

“······하.”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가는 법.

그러나 소년이었던 블라드는 자신에게 건네진 거짓된 대가를 받지 않았다.

그저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상처가 남긴 흉터처럼.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나.”

어설프게 뭉쳐놓은 고깃덩이 하나.

그날 블라드의 머리 위로 흘러내린 어설픈 육포 하나가 다시금 그의 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고딘은 정확히 자신을 향해 날아든 시꺼먼 덩어리를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비켜어어-!”

블라드는 가이다르의 군의 진형을 곧장 꿰뚫으며 바예지드를 향해 나아갔다.

마치 화살이 나아간 흔적처럼 일직선으로 갈라져 버린 진형의 틈.

그 사이에서 블라드는 이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달빛을 향해 있는 힘껏 집어던져 버렸다.

육포와 함께 간직하고 있던 그 날의 아픈 기억까지도.

10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49화 10

격돌 (3)

한참 혼란을 수습하던 지그문드는 자신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그 강렬한 인상은 옆에서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익히 들어왔던 이름이 떠오르는 생김새였다.

“저, 저······.”

쇼아라의 블라드.

감히 내 아들의 검을 빼앗아 간 북부의 애송이.

“저런 미친 새끼가 있나!”

그리고 지금 미친 짓거리를 펼치고 있는 녀석.

아무리 진형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적진의 한복판이건만 저 망할 놈의 애송이는 교묘하게 틈을 타며 내달릴 뿐이었다.

적만 아니었다면 넋 놓고 보고 싶을 정도의 곡예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저놈이 움직일 때마다 애써 봉합해 놓은 진형이 찢겨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그문드는 방금 돌격해 들어왔던 바예지드의 기병대보다도 지금의 블라드의 행태에 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공격은 예상이라도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미친 짓은 태어나 처음 보는 기행이었으니까.

-저게 뭐야···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왔어!

-성문이 열렸나?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마치 너희 따위는 얼마든지 헤집을 수 있다는 듯 벼락같이 나타나 떠나버린 바예지드의 기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의 기행은 지그문드가 애써 잠재워놓았던 불안감에 돌 하나를 던져놓은 격이 되었다.

호수에서 잔잔히 이는 파문처럼 병사들의 불안한 웅성거림이 가이다르 군 사이로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

홀로 적진에서 뛰쳐나와 푸른 초원을 내달리는 블라드.

가이다르와 바예지드의 사이, 아무도 다다르지 못한 탁 트인 공간은 블라드에게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

그러나 느껴지는 해방감에 미소 짓던 것도 잠시. 곧 블라드는 누아르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며 숨을 죽여만 했다.

불길한 냄새가 하늘 끝에서부터 풍겨오기 시작했기에.

“쏴라!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함성과 함께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시꺼먼 화살들.

블라드는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 등 뒤로 떨어지는 악의들을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블라드가 미묘하게 벌려놓은 틈은 바예지드에게 또다시 시간을 벌어주었고 페테르의 매서운 눈빛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으아아악!

방패 들어! 방패!

땅은 푸르렀으나 하늘은 새까맸고 시커먼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누군가의 피가 모여 새빨간 웅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좁은 틈을 헤치고 나온 세상은 분명 넓었으나 여전히 잔인할 뿐이었다.

“신원을 밝혀라!”

“바예지드!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요제프 님이 보내시는 전언을 들고 왔다!”

마치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매섭게 떨어지는 화살들.

누아르와 함께 그것들을 넘어온 블라드는 정체를 밝히라 외치는 병사들을 향해 봉인된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요제프가 직접 적어넣은 그 편지에는 마법 전보와 까마귀의 전서구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귀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들여보내라.”

편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소속을 알려주었고 틈을 가르며 나온 방향이 블라드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런 자에게 있어 엄밀한 신원 확인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

“따라오십시오.”

병사의 안내를 따라 이동한 진형의 중앙.

그곳에서 블라드의 시선에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이었다.

강인한 스투르마의 성벽이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었다.

“요제프 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저는 블라드라고 합니다.”

천막조차 세워지지 않은 벌판이었으나 그 어느 곳보다도 진중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마치 붉은 카펫을 밟으며 들어갔던 그때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기사들.

그들이 천천히 열어주는 길 사이로 익숙한 검은 눈동자가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요제프의 기사 블라드.”

페테르는 아들이 보내온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애써 호흡으로 가다듬고 있었으나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

게다가 잔뜩 우그러져 있는 갑옷은 분명 이 어린 기사가 그동안 치열한 전장 속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도 그렇고, 요제프도······. 어디 다친 곳은 없었느냐.”

“네. 건강하십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블라드의 대답에 페테르는 그제야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행이로군.”

귀족의 푸른 피는 페테르로 하여금 최선의 효율을 선택하게 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심장마저 차갑게 식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는 병약한 아들을 걱정했었고 또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500명이라.”

힘차게 눌러쓴 필체로 아들의 안위를 확인한 페테르는 블라드가 전해온 편지를 기사단장인 안탈라스에게 건넸다.

아들이 아닌 데어마르의 지휘관인 요제프로서 보내는 보고서.

그 보고서에는 오직 500명의 군사만이 성문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흠.”

그러나 페테르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500명이라는 숫자보다 보고서의 가장 밑에 쓰여 있는 한 줄의 첨언이었다.

평소 군말 따위는 하지 않던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건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자신의 기사를 위해 한 줄을 더 적어 보낸 것이었다.

“······고딘과의 대결을 원한다고?”

“네.”

나지막이 들려오는 페테르의 목소리에 그를 수행하던 기사들의 눈초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딘이라면 혹시 가이다르의 기사단장인 고딘을 말하는 것인가?

“너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너의 차이는 뛰어넘기 힘든 것일 텐데.”

너무나 희미한 기색이었기에 블라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페테르를 모셔온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들의 주군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좋을 대로 해라. 너에게 자격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북부의 기세.

찬란히 꽃피웠던 바예지드의 황금세대가 지나간 지금, 다시금 높은 벽을 향해 도전하겠다 말하는 어린 기사를 기꺼워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꽃피우려는 어린것들은 언제나 귀한 존재였으니까.

※※※※

“이 개자식!”

질척이는 언덕 위를 오르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용케 진형을 갖췄지만, 또다시 제 발로 혼란 속으로 기어들어 가야 하는 현실에 지그문드는 그만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페테르 바예지드!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아!”

데어마르를 미끼로 삼아 혼란을 유도하고 철저하게 그 틈을 노려 깊은 상처를 낸 북부의 군주.

이제 그는 언덕 위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지그문드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들어와라.

비록 나는 단단히 준비하고 있을 테지만.

보급로는 막고 퇴로는 끊었으며 이제는 막다른 곳까지 밀어 넣고만 페테르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지그문드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냉혹한 악랄함은 서부의 찬탈자인 지그문드조차도 치를 떨게 만드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

불리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올라가야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가이다르일테니까.

도무지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지그문드는 어떻게든 눈앞의 군대를 뚫고 서부로 향하는 활로를 만들어야만 했다.

“창병 앞으로!”

그리하여 기어이 맞닿은 북부의 병사들.

단단히 쌓아 올린 방패 벽 너머로 시퍼런 도끼들이 번뜩인다.

그 옛날 강을 타고 내려오며 도시들을 약탈했던 야만인의 습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창이 부러졌어!

무기 잃은 놈들은 뒤로 빠져!

으아악! 저 미친놈들이 도끼를 던진다!

대등한 숫자의 싸움.

그러나 방전된 체력과 떨어진 사기만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차이였기에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오직 가이다르만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예지드! 앞으로!”

야만인들의 피가 섞인 자들.

차별과 멸시가 가득한 표현이었으나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 피로부터 전해지는 흉악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끼들이 감히 어딜 들이대!”

“죽어! 죽으라고!”

북풍의 설한에서도 뜨겁게 유지해야만 하는 사내들의 성정은 분명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야만적이고 포악한 것이었다.

전술과 전략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북부의 광기가 그들의 도끼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역시!’

쉼 없이 병사들을 독려하던 지그문드는 앞에서 터져나가는 핏물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역시나 서부의 창병만으로는 북부의 보병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병대 보병의 싸움이라면 그들을 꺾을만한 병과는 제국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라! 분명 때가 온다!”

그럼에도 지그문드가 쉼 없이 전선을 향해 병사들을 밀어 넣고 있는 이유.

북부에 흉악한 도끼병들이 있다면 서부에는 거친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기병들이 있기 때문에.

“이놈들만 버텨내면 다시 우리의 흐름이 온다!”

서부라는 지역의 특성상 기병들의 수준이 발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드워프들에게서 갈취한 장비들까지 두른 서부의 중기병들은 분명 북부의 기병들로는 대적하기 힘든 존재였다.

페테르가 일부러 질척한 초원 위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들의 돌격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방이면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의지해야 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그문드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로 결정했다.

가이다르의 자랑인 기병대의 창끝을 통해서.

※※※※

땅은 질척이고 말발굽은 무거워지고 있다.

여름의 날씨와 함께 끈적이는 데어마르의 초원은 분명 서부의 기사들에게 있어 낯선 전장이었다.

“적 대응합니다!”

고딘은 참으로 지랄 같은 전장을 선택했다며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속도가 점점 죽고 있다.

그러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공격에 모든 것을 때려 실었으니까.

“우측에 바예지드 기병대가 달려옵니다!”

“무시해라!”

기병들의 돌격은 화살과도 같다.

떠나간 순간부터 적에게 닿기까지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가이다르 기병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패를 들이밀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뿌드드드득-

으아아아악!

방패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와 함께 따라오는 비명은 이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역시!’

알고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는 것이 있다.

가이다르에게 있어서 기병들의 돌격은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확실한 공식이었으며 그렇기에 지그문드는 이 한방을 통해 활로를 꿰뚫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그러나 정작 돌격을 감행하던 고딘은 창끝으로 와닿는 기이한 감각에 조금씩 손끝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자라다!’

분명 닿고는 있었으나 무언가 모자란 감각.

한참을 더 찔러내야 했지만 내지르는 창끝이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기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창끝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던 고딘은 그 기이한 감각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굽이진 언덕이 교묘히 감추고 있던 각도.

아래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진형이 맞닥뜨린 지금에서야 자신의 모습을 보이었다.

‘사선 진형!’

일직선으로 서 있다 생각했지만 바예지드의 병사들은 사실 대각선으로 늘어서 있었다.

정확한 타점만이 확실한 충격을 안겨다 주는 법이었지만 비스듬히 꺾여버린 가이다르의 돌격은 천천히 세워진 방패 벽을 따라 그들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우회······!”

가장 자신 있어 하기에 가장 확실히 대응할 수 있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어느새 바짝 붙어 버린 바예지드의 기병대가 또 다른 벽이 되어 가이다르에게 우회할 공간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도 활개 치고 다녔겠다.”

감고 있는 왼쪽 눈 사이로 붉은색의 세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트거 바예지드.

다음 대의 가주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남자.

“밀어붙여라! 공간을 내줘서는 안 된다!”

“젠장!”

오른쪽에는 보병들의 방패 벽이.

왼쪽에는 굳건히 따라붙는 바예지드의 기병대가.

그리하여 점점 깔때기의 입구처럼 좁아지는 그곳에서 가이다르 기병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왼쪽 눈을 감고 있는 자들이었다.

“나에게 가지고 와라! 기사들아!”

군주이자 기사인 페테르의 검 끝이 달려오는 기병대를 향하고 있었다.

“저들의 목을! 바예지드를 능멸한 자들의 끝을!”

파멸을 향해 달려드는 돌격.

서부의 기사들도 서둘러 자신들의 세계로 대항하려 했지만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히이이이힝-!

으아아악!

다리를 잃어버린 말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초원의 언덕 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닿지 못하는 땅을 향해 분리되어 버린 무릎들이 허무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크으윽!”

육중한 소리와 함께 땅으로 쓰러지고 마는 말들.

그들의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기사들의 몸짓이 하늘 위로 높게 떠 오르고 있었다.

추진력을 잃어버린 서부의 돌격이 북부의 기사들 앞에 멈추기 시작했다.

“바예지드 기사단!”

말을 잃어버린 기병대는 더 이상 기병이라 할 수 없는 법.

강제로 하마해버린 그들의 앞으로 차가운 북풍의 설한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멈춰버린 땅 위에서 마주 보는 서로 간의 시선.

이제부터는 기사들의 시간이었다.

31 별을 품은 소드마스터-150화 31

달은 지고

시선을 잃은 채 힘없이 흔들거리던 호르헤의 눈빛을 기억한다.

흐느끼던 창녀들의 울음소리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비릿한 고깃덩이의 냄새까지도.

그렇게 나의 둥지를 부숴버린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 내가 저 남자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었다.

“고딘.”

기사들이 열어주는 틈 사이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행색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들고 있는 검만큼은 여전히 빛나는 남자.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애송이.”

이제야 가까이서 마주한 고딘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거짓된 이름으로 소개했던 그때처럼.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그가 치켜드는 검은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을 말해라. 가이다르의 기사.”

“······뭐?”

이제는 뒷골목의 소년이 아닌 한 명의 기사로 서 있는 남자.

이제야 마주한 푸른 달을 향해 블라드는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열었다.

“네 이름. 말하라고. 지금 내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품어 이제는 염원이 되어버린 분노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날의 거짓된 이름이 아닌 진실된 이름을 원한다.

동등한 자리에서 마주 본 지금, 나는 너에게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 테니까.

“그래. 그렇겠지.”

고딘은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한 블라드의 눈동자를 보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녀석의 이런 면이 좋았었다.

역시 그때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가이다르의 고딘이다.”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야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진실된 이름.

그 이름을 들으며 블라드는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드디어 왔다. 이곳까지.

하늘 위 달처럼 멀었던 남자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고 했었지 고딘?”

이제는 뒷골목의 소년과 거짓된 기사가 아닌 진실된 이름으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은 고딘과 블라드는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동시에 왼쪽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 너에게 못 받은 것이 있어.”

부서진 둥지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오늘 달을 부순다.

너를 죽여서. 고딘

그것이 그날에 대한 나의 정당한 대가일 테니까.

※※※※

콰아아앙-!

수많은 기사들이 맞부딪히는 전장의 한 가운데.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대결이 펼쳐지는 공간이 있었다.

폭발하듯 터져나가는 푸른색과 그 색을 닮은 하얀색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곳이었다.

‘빠르군!’

예측을 뛰어넘는 속도.

분명 단순하기 그지없는 경로였지만 블라드의 일격은 고딘에게 당황감을 안겨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흐아아압!”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그리고 잡은 기세는 절대 놓지 말 것.

목소리가 가르쳐준 대로 선공에 성공한 블라드는 잡아놓은 주도권을 마음껏 흔들며 고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또 커버렸군.’

유연히 내딛는 발걸음에는 수많은 수를 감춰두었지만 내리치는 검만큼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예측을 불허하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확실한 의도를 담은 일검.

그야말로 모순과도 같은 존재.

예전의 치기 어린 내려치기 따위는 이제 흔적조차 없다.

“······!”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고딘의 세계가 보였다.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지금!’

그리고 어디가 비어있는지까지도.

제국의 검에게서 배운 예리한 간파가 푸른 달빛이 닿지 못하는 공간을 향해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까가가가강-!

"크윽!"

확신하기에 망설임 없는 돌진.

그와 함께 요란히 터져나가는 오러의 잔상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빛이었다.

“내가 그때 말했었지.”

“······!”

들고 있는 검은 이빨이고 노려보고 있는 것은 짐승이다.

요란하게 까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두 개의 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푸른 눈동자 안에서 감히 인간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기이한 광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마치 나를 보라 외치는 것만 같은 블라드의 함성.

더는 무시한 채 뒤돌 수 없는 울림이 고딘의 앞에 서 있었다.

“죽어!”

지친 몸에서는 가쁜 숨이 차올랐지만 정작 내딛는 발걸음은 가벼울 뿐.

마주한 상대가 고딘이었기에 블라드는 그 어떤 때보다도 깊은 세계에 빠져들며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검 끝에 맺히는 빛이 푸른색에서 점점 다른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콰앙-! 쾅! 쾅!

별을 담은 검과 달빛이 머무는 검 사이로 거친 불꽃들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에 전혀 망설이지 않는 금발의 기사.

원했고 바랐고 진심으로 닿고 싶었던 세계가 지금 내 앞에 있다.

“고작 이거냐! 애송아!”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지 마라!”

지금에 와 뒤를 돌이켜보면 남겨진 것들은 흔적일 뿐.

진실된 사제가 전해준 이름에서부터 지금 들고 있는 검에 이르기까지 전부 누군가의 흔적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만큼은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면 안 돼.”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새겨진 흔적 하나.

그것은 상처이자 흉터였고 블라드의 세계에 가장 아프게 박혀있던 기억이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마주 보고 있잖아.”

“······!”

장미의 미소. 소년의 둥지.

그곳에 가득 피워졌었던 새빨간 장미들.

굴러다니던 버레이의 목을, 힘없이 흔들리던 호르헤의 시선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했지만.”

마주한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확연한 형체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안에만 있던 세계가 세상 밖으로.

이제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그와 함께 천천히 떠지기 시작하는 왼쪽 눈.

“지금은 아니잖아.”

이제야 온전히 두 눈으로 마주한 세상 사이로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오러가 있었다.

황금색.

그 색은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찬란히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

각자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던 기사들도.

그리고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페테르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는 빛줄기 하나.

크게 휘두르는 검 끝으로 황금색 물결이 굽이치기 시작했다.

“피해라!”

“다들 고개 숙여!”

온전히 마주한 세상 위로 블라드의 세계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물결.

마치 달빛이 퍼져나갔던 그때의 광경과도 같은 물결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

나 쇼아라의 블라드가 너를 향해.

이제 굳건히 세워진 나의 세계는 너라는 달을 향해서도 닿는다.

“크윽!”

펼쳐지는 황금색의 물결 앞에서 고딘이라는 세계가 새빨간 피를 튀기며 장미꽃 한 송이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물결이었지만 색만큼은 확연히 다른 세계.

“크하하하하!”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기어이 자신을 쫓아온 어린 세계를 보며 고딘은 크게 웃음 짓고 말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따라 커버린 세계를 보며 어찌할 수 없는 흐뭇함이 감돌았으니까.

“적으로 만나 너무 아쉽군.”

아쉽다 말하는 고딘의 검 끝에서부터 푸른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과도 같았던 푸른 달빛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처연할 뿐이었다.

※※※※

수많은 고함이 가득했으나 이제는 침묵만이 가득한 전장.

흩뿌려진 피와 뒤섞인 진창이 끈적하다.

“허억, 헉······.”

고개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끈적해서 블라드는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목덜미로 차가운 검날이 와닿았음에도.

“그런데 애송아.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었냐.”

애송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건만 고딘은 여전히 자신을 애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연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패배했으니.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네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하라고 했잖냐.”

쇼아라의 어둠을 가르며 뛰어가던 소년에게 알려주었던 가르침이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부터.

“그래야만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거······ 아니냐.”

빠른 속도보다는 옳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처럼 빗나가지 않을 테니까.

“쿨럭.”

목덜미에 와닿는 검날 위로 검붉은 핏줄기 하나가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검을 타고 오던 새빨간 핏줄기는 천천히 블라드의 목을 타고 내려와 차가워진 손끝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너에게는······. 딱 이름까지다. 애송이.”

흔들리는 검 끝처럼 고딘의 말끝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블라드는 고딘의 말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먹혀들어 가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

어느새 고딘을 둘러싸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고딘의 몸 곳곳에 꽂혀 있는 검들이 블라드의 목으로 닿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확히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검에는 오직 바예지드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환영한다. 애송아.”

저 하늘 위에 있던 달이 추락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검에 의해.

“기사의 세계에 온 것을.”

끄드드득-

천천히 뽑혀 나가는 검들의 상처 위로 새빨간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와 함께 천천히 허물어지는 고딘.

그러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나 분노가 아닌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을 뿐이었다.

오직 승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제가 졌습니다. 가이다르의 고딘.”

비록 지금 내뱉는 말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그를 위해 기사로서 해야 하는 마지막 말을 해주었다.

증오했으나 동경했던 푸른 달.

그토록 닿기를 원했으나 결국 뛰어넘지 못한 그 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그리고 이제는 도전할 수 없는 푸른 달은 영원히 나의 위에.

그렇게 블라드는 땅에 떨어져 버린 달을 향해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

“백작님! 백작님!”

“······.”

옆에서 크게 소리치는 친위기사.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지그문드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만 같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뒤에서 데어마르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가이다르의 뒤쪽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야 병력을 수습하고 성문을 열어젖힌 하이날 군.

짙은 눈그늘의 청년과 함께 빠져나오는 그들의 기세는 그동안 당한 만큼이나 살벌했다.

“······내 아들을 챙겨라. 이제는 나 다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백작님!”

전투는 졌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란 한 번의 전투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그문드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수많은 고함이 울려 퍼지는 전장 속에서 지그문드는 가만히 저 위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히 달리고 있었으나 어느새 멈추고 만 독수리의 깃발.

역시 그 깃발 하나에 모든 것을 의지하기에는 짊어진 부담이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전원 후퇴하라!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남아라!”

이 전투는 졌다.

인생이란 불확실함의 연속이라지만 설마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뼈 아프군.”

그러나 한 번의 패배보다 지그문드를 괴롭히는 것은 이제는 꺾이고 만 자신의 기사일 것이다.

충성스럽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명 같은 꿈을 꾸고 있던 푸른 달빛의 기사.

그와 함께였기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건만.

“백작님!”

“······가자.”

들어올 때는 허락이 필요 없었지만 나갈 때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가야만 했다.

그것이 페테르의 요구였고 이제 지그문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려놓지 않기 위해 초라하게 모습을 숨겨야만 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병사들의 원망과 욕설.

그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빠져나가는 지그문드 옆에는 이제 100명조차 되지 않는 초라한 군세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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